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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낙스와 스코틀랜드에서의 개혁

 

 

스코틀랜드에도 개혁의 바람이

이제 잉글랜드와 인접해 있고, 그레이트 브리튼 섬 상층부에 위치한 스코틀랜드에서의 교회 개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북아일랜드와 더불어 ‘영국’이라고 불리지만 16세기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다른 나라였고,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대결했던 나라였다. 이 나라의 개혁자가 존 낙스(John Knox, c. 1514~1572)였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 이를테면 독일이나 스위스, 잉글랜드에 비해 시기적으로 후기에 일어났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의 지리적 위치와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는 지리적으로 유럽 대륙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대륙에서 전개된 개혁 정신이 늦게 전파되었다. 또 스코틀랜드는 인접한 잉글랜드로부터 빈번하게 침입을 받았는데, 이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선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의 강력한 국가이자 종교적으로 강력한 로마 가톨릭 국가였으므로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가톨릭의 우산 아래 있었다.

  이런 스코틀랜드에도 점차 개혁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1525년부터 종교개혁을 알리는 문서가 은밀하게 유입되기 시작했고, 1527년부터는 위클리프가 번역한 영어 성경이 유통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528년에는 최초의 순교자가 생겨났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 개혁 운동의 선구자였던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4~1528)이었다. 독일 비텐베르크대학과 파리에서 공부한 그는 1524년 10월 세인트 앤드류스(St. Andrews)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는 성경 원리에 근거하여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을 반박했다. 즉 고해성사는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지 않다. 연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면부(면죄부)로는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가르쳤다. 곧 그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고, 당시 악명 높던 세인트 앤드류스의 대주교 제임스 비튼(James Beaton, ?~1539)에 의해 체포되었고, 이틀 뒤인 1528년 2월 29일 화형을 당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왕은 제임스 5세(James V, 1512~1542)였는데, 1542년 30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외동딸 메리 스튜어트가 출생 6일 만에 왕이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 출신 가톨릭교도인 어머니 기즈가(家)의 메리(Marie de Guise, 1515~1560)가 섭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는 탄압을 받고 있었고, 낙스를 개혁자로 인도했던 조지 휘샤트(George Wishart, 1513~1546)도 1546년 3월 1일 화형을 당했다. 당시 세인트 앤드류스의 대주교는 제임스 비튼의 조카인 데이비드 비튼(David Beaton, 1494~1546)이었는데, 이 일이 있고서 4개월 후 피살되었다.

이처럼 개신교가 소개된 후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이 성취되기까지 30여 년간 약 20여 명의 개신교도가 화형을 당했는데, 이들이 스코틀랜드 교회 개혁 운동의 선구자들인 셈이다.

 

개혁자 존 낙스

존 낙스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고향에서 가까운 해딩톤에 소재한 지방학교에서 공부하고 16세 전후인 1529년에는 세인트 앤드류스(St. Andrews)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가 대학을 졸업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세인트 앤드류스 3대 학교의 졸업생 명단에 낙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1536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가 되었다. 그런데 1540년에 ‘존 낙스 경’(Sir. John Knox)으로 불리며 교황 휘하의 공증인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 교회에서 인정을 받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낙스가 언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점이 되고 있다.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낙스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개혁의 선구자였던 조지 위샤트와의 만남을 통해 개신교 신앙을 접했고 개혁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낙스는 개신교 운동의 중심지인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설교자로 부름 받았고, 이때부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대변자가 되었다. 세인트 앤드류스가 개신교도들의 거점이 되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자 위협을 느낀 기즈가의 메리는 프랑스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1547년 7월 30일 프랑스 함대가 세인트 앤드류스까지 공격하여 도시는 함락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피살되었다. 낙스는 120여 명에 달하는 젊은이들과 함께 체포되어 프랑스 전함의 노예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낙스는 갈리선의 노예(the Galley slave)로 19개월 동안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 기간의 경험을 통하여 강인한 지도자로 성장해 갔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대해 보다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하였다. 19개월간 노예 생활 후 1549년 석방된 그는 개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스코틀랜드로의 귀환

석방된 낙스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잉글랜드로 피신했으나, 후일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메리가 1553년 집권하게 되자 위협을 느끼고 테임즈강을 건너 유럽으로 도피했다. 처음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6개월간 체류한 후 스위스 제네바로 갔다. 거기서 칼빈을 만났고 칼빈으로부터 실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제네바를 떠난 낙스는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영국인 망명자 교회에 목회자로 체류하였다.

  후에 낙스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1555년 3월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고 이곳에 체류하였다. 이곳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는데 이 기간에 낙스는 칼빈과 교제하며 개혁 사상을 터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로정치를 실현하였다. 그가 제네바를 가리켜 “사도 시대 이래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불렀던 것은 그가 칼빈에게서 가장 성경적인 신앙과 신학 원리 그리고 교회 정치 형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낙스는 1555년 가을 비밀리 조국 스코틀랜드를 방문하고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는 한편 마조리(Marjorie) 양과 결혼했다.

  낙스가 제네바에 체류하는 동안 스코틀랜드에는 개혁의 때가 성숙되고 있었다. 1555년부터 세인트 앤드류스, 스털링(Stirling), 던디(Dundee), 에든버러(Edinburgh), 퍼스(Perth) 등지에서 비밀교회를 형성하였고 급속히 성장하였다. 1555년에서 1556년 사이 개신교회 연합세력인 소위 ‘종교개혁 추진 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1557년 3월 10일 낙스로 하여금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결국 낙스는 1559년 5월 2일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개혁 운동의 전개

낙스는 구체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정치적 환경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존 낙스는 1560년 4월 이래로 에든버러의 세인트 가일(St. Gile)교회의 설교자로 봉사하면서 학개서를 강해하였다. 이 책은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귀환 후 성전 재건에 관한 예언서인데 낙스는 이 책을 통해 스코틀랜드 교회 재건의 정신을 고취하고 교회 개혁 운동을 격려하였다. 열정과 강인한 성품을 지닌 낙스의 우렁찬 설교는 청중들을 압도하였다. 그의 지도력하에서 1560년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공식적으로 라틴어 미사를 금하고, 감독제를 거부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모든 집회를 불법화했다. 또 프랑스와의 단절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여섯 명의 존(John)으로 구성된 신앙고백 준비위원회가 4일 만에 작성한 25개 항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서를 8월 17일 채택하였는데, 이것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 Confession)이다. 이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여섯 명의 존이란, 존 낙스를 비롯한 존 윌록(John Willock), 존 스포티스우드(John Sopttiswood), 존 윈람(John Winram), 존 더글라스(John Douglas) 그리고 존 로우(John Row)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채택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앙고백서가 되었다.

  1561년 12월에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세계 장로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이때 스코틀랜드 교회는 교회정치제도로 장로(교회)제도를 채택하였고, 교회 직원은 목사, 장로, 집사로 구성하였다. 또 장로와 집사는 일 년에 한 번씩 선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제도는 신학적으로는 개혁신학을 고수했으나 교회정치 형태로 ‘장로제도’를 취한 최초의 교회가 된 것이다. 또 이때 ‘치리서’(The Book of Discipline)를 작성, 채택하였다. 이 문서를 보통 후일의 개변된 치리서와 구별하기 위해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라고 하는데 이 치리서는 신앙고백을 작성한 동일한 위원회가 작성한 것이지만, 스코틀랜드 의회의 인준은 받지 못했다. 치리서(治理書)란 일종의 교회 헌법인데, 위에서 언급한 장로교회의 여러 규정을 정리한 것이다.

  또 이 치리서에서는 세례와 성찬식의 단순한 시행과 주일 및 주중 예배 규정을 두었고, 충분히 훈련된 목사들이 배출될 때까지 교구를 돌볼 임시직으로서 ‘독경사’(讀經師, Reader)의 임명, 그리고 목사의 선택과 목사와 독경사들의 활동을 감독하는 임시직 ‘감독’(Superintendent)의 임명에 관해 언급하였다. ‘독경사’란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평신도 가운데서 신앙과 행실이 모범적인 사람을 선출하여 예배 시간에 성경을 읽도록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이 당시 훈련된 목사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임시적인 조처로 독경사를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 치리서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기독교적인 교육을 위한 제안이 있었는데 모든 교회는 라틴어 문법과 교리 공부를 가르칠 교사를 두고 각 마을마다 고등교육 기관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러한 교육 정책의 결과 스코틀랜드에는 고등학교와 대학들이 세워졌고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국가가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정리해 두고자 하는 것은, 왜 낙스는 스코틀랜드에서 개혁을 단행하고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라고 이름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라고 불렀을까? 제네바에서 칼빈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고 이름한 것은 인접한 잉글랜드의 ‘감독제도’와 다른 ‘장로제도’를 채용한 교회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장로교회’라고 부른 것이다.

 

메리 여왕의 도전

낙스가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이후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1561년 8월 19일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프랑스로부터의 귀국은 달갑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1542년 12월 7일생인 메리는 1558년 프랑스의 황태자인 프란소와와 결혼하였는데, 그가 프란소와 2세란 이름으로 왕이 되었으나 1560년 12월 5일 사망하게 된다. 남편이 사망함으로써 프랑스에 계속 남아 있을 수도 없게 된 메리는 1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청산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때가 1561년 8월 19일, 그녀의 나이 18세 때였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신자인 메리는 귀국 후 첫 일요일에 국법으로 금지한 미사를 드렸고 계속해서 미사를 고집하였다. 이것은 갓 이루어진 교회 개혁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 개혁을 반대하는 천주교 귀족들의 저항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때 낙스는 성 가일교회 강단에서 메리의 미사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면서 메리의 미사를 ‘새 이세벨’(New Iezebel)의 ‘우상숭배’라고 공격하였다. 낙스는 메리와 대결하였다. 낙스는 “한 번의 미사는 1만 군대의 침입보다 더 위험하다”고 했다. 교회 개혁을 부정하고자 했던 메리는 복잡한 이성 관계, 분별없는 처신으로 국민적 신뢰를 잃었고, 영국으로 피신하였다. 거기서도 미움을 받아 투옥되어 있던 중 처형되었다.

  한편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총회는 1567년 6월 25일 메리의 왕위 상실을 선언하고 그녀의 아들을 제임스 6세로 공식 옹위하였다. 제임스 6세의 대관식 때 설교를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낙스였다. 낙스는 어린 요시야 왕에 대한 설교를 통해 개혁 운동을 국가적 과제로 확고히 했다. 이 제임스 6세가 후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옹립되어 제임스 1세로 불리게 된다. 정리하면 낙스의 개혁 운동은 메리의 저항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소멸되지 않고 승리를 얻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스코틀랜드는 강력한 장로교 국가가 되었고, 그 후예들에 의해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 장로교회가 이식되었고, 다음 세기에 한국에도 장로교회가 소개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코틀랜드는 장로교회의 모국이 되었다.

 

존 낙스의 죽음

낙스는 1559년 5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이후 13년간 교회 개혁을 위한 나팔수(Trumpeter)의 사명을 감당하고 1572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낙스는 전 생애를 살면서 자신의 설교를 ‘주인(주님)의 나팔을 부는 것’(blowing the Master's trumpet)으로 묘사하였다. 예레미야 등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도출해 낸 이 사상은 자신의 사명에 대한 자기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그는 당대의 뛰어난 설교가였으며 애국자였고 개혁자였다. 낙스의 후계자인 앤드류 멜빌은 낙스를 가리켜 “우리 민족의 가장 고귀한 예언자이자 사도”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낙스의 장례식에서 섭정이었던 몰톤(Mort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여기 이 자리에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누워 있다. 너무나도 많은 날 동안 단도와 검의 위협에 시달렸으나

그는 평화와 영예 속에 이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특별히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글/이상규 교수

미국 Calvin College와 Associated Mennonite Biblical Seminary 방문교수, 호주 Macquarie University 초기 기독교연구소 연구교수, 고신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며 역사신학을 가르쳤다. 현재는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 학술상, 기독교문화대상, 올해의 신학자상,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학술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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