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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이 되라

2005.01.14 18:22

지난주간 서울시내교회서 신년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교회의 따뜻한 배려로 숙소를 남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 정할 수 있었다.
매 집회 후 호텔로 돌아와서 커튼을 열어 젖히고 눈앞에 펼쳐지는 전경을 누리는 기쁨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오 목사, 남산이 되라!”는 강한 내적인 음성을 듣게 되었다.
“남산이 되라니요?”

온통 오염된 서울의 중심부에 버티고 서서 묵묵하게 자기의 소임을 다하는 남산.
도심지의 온갖 먼지를 소리 없이 빨아드리고 대신 생명의 산소를 뿜어내는 남산
그렇지. 문제 많은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우뚝 설 수만 있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가?

이어 스쳐지나가듯 시심이 발동하였다.

목사여 남산이 되라
교회에 성령의 불타오르도록
산소를 공급하는 남산이 되라

성도여 남산이 되라
찌들고 무거운 심령이
교회문턱을
지나들 때마다
생기를 띠도록
생명의 산소를 공급하라
절대 청정지역으로 서 있으라

춘하추동
도심지의 기상의 변화를 따라
자신을 내어주면서도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남산이 되라

성도여 남산이 되라
이 시대의 소망의 진원지가 되라


어느 교회고 두 종류의 교인이 있다. 이산화탄소 같은 교인과 산소 같은 교인이다. 어느 부서이든 동일하다. 이산화탄소는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부정적인 것을 확대재생산한다. 가능성을 깎아 내린다. 문제에만 집중한다. 결코 희생하는 법이 없다. 자신도 묶어놓고 타인도 묶어 놓는다. 산소는 꺼져 가는 불길을 다시 살려 놓는다.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을 주목한다. 공동체의 성숙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다. 자신도 살리고 타인도 살린다. 소리 없이 희망을 공급하여 생명의 능력을 강화시킨다.

문제는 어느 곳에라도 있다.
문제없는 개인과 문제없는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의 단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로 확대재생산 된다는 현실이 아픔으로 자리잡는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사람이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사람이다.
요한삼서에 보면 이산화탄소같은 디오드레베가 등장한다. 그는 스스로 교우들을 접대하지도 않고, 심지어 접대하고자하는 교우를 교회에서 내어쫓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데메드리오처럼 산소 같은 교우도 있다. 상처를 치유하고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는 성도이다.

목사의 세계건, 장로의 세계건 이런 양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남의 발목 잡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사역의 핵심은 남산처럼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성도가 된다는 사실에 있다.
담임목회자로서 올 한해도 남산처럼 쓰임 받고 싶다.
내가 섬기는 목양지와 지역사회에 생명의 산소를 공급하고 싶다.


기독신문 목회 칼럼
제목 : 남산이 되라
오정호 목사(대전새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