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성경 인물들이 보여 주는 배려의 모습과 교훈 – 김준수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명예교수)
2026.06.09 14:11

오래전 눈이 내리고 길이 미끄러웠던 겨울, 고속 도로 갓길에서 차가 고장 났을 때 많은 차량이 지나쳤지만 한 분만이 위험을 감수하고 멈추어 도움을 주었던 경험은, 배려가 얼마나 강력하고 따뜻한 힘을 지니는지 알게 하였다. 이처럼 타인을 향 한 따뜻한 마음과 행동은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녹이고, 우리 사회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동력이 된다. 배려의 사전적인 의미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는 마음 씀”이다. 배려는 나의 필요를 넘어서 상대방의 필요를 보는 관심에서 출발한다. 배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배려는 단순하게 상대방의 어려움을 보는 마음이 다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행동이 동반된다. 우리 사회가 삭막해지는 가장 큰 원인도 서로 배려하는 마음보다 자기중심적 마음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배려의 부족은 자기-초점적 주의(Self-Focused Attention)와 깊은 연관이 있다. 자기-초점적 주의는 자신의 내면(생각, 감정, 신체적 감각)이나 외현적인 모습(타인에게 비치는 이미지)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는 경 향을 말한다. 이는 적절한 수준에서는 자기 이해와 성찰에 도움이 되지만, 지나칠 경우 방어적 자기-초점적 주의로 발전하여 자신의 이익이나 욕구에 집착하고 타인의 어려움에는 둔감하게 만들 수 있다. 반면, 배려는 타인-초점적 주의(Other-Focused Attention), 즉 타인의 상태, 필요, 감정에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데서 비롯된다. 이는 단순히 타인의 어려움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그들의 형편을 살피는 마음을 전제로 한다. 배려는 이기적인 손익 계산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돌아갈 이익을 우선하며,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로 승화된다.
성경은 배려가 단순한 사회적 미덕을 넘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영적 덕목임을 강조한다. 인간이 행하는 배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은 인간이 이 땅에서 우선적으로 가져야 하는 기본자세이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의 삶에서 이러한 배려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삶의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브라함의 즉각적인 환대(창세기 18장): 손익 계산을 뛰어넘는 배려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명의 나그네를 보았을 때,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물을 준비해 발을 씻게 하고, 떡과 송아지 고기를 내어주며 극진히 대접했다. 아브라함은 먼저 나그네들의 필요를 보았다. 아브라함은 이들의 피곤하고 배고픈 상태를 보는 눈이 있었다. 배려는 상대방의 형편을 살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아브라함이 주저하지 않고 곧 달려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평소 마음을 나타낸다. 즉 손익 계산을 하지 않는 즉각적인 행동이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이익과 손해를 계산할 때가 많다. 그래서 막상 누군가를 도와주려 할 때 망설이고 주저하게 된다. 소비자의 마음으로 계산한다. 소비자는 물건을 구입할 때 내가 잘 사는지 따져야 한다. 좋은 물건을 싸게 사는 것이 소비자의 지혜다. 그러나 배려는, 이러한 소비자의 태도를 버려야 한다. 상대방의 필요를 본 후에 먼저 나에게 올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면 배려하는 행동을 실천하기 어려워진다. 배려는 나에게 돌아 올 이익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돌아갈 이익을 우선 해야 가능하다. 배려의 행위가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남을 배려할 때 나는 시간적, 물질적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배려는 단순히 물질적인 손익 계산을 뛰어넘는 비물질적인 축복을 가져온다.
현대 사회는 물질이 모든 삶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의 잣대가 된다. 그리고 나의 행불행을 비교를 통해서 확인한다. 얼마나 가졌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남보다 더 가진 것이 중요하다.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랐는가가 아니라, 남보다 더 높은 자리가 중요하다. 그 결과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도 만족이 없고, 공허해지는 것이 현대인의 마음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비물질적이고 영적인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선언한다. 영적인 복이 물질적인 복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이 된다고 가르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천사들에게만 대접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모든 나그네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익 계산을 하지 않고 베풀고 배려하는 일관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이 행한 배려는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복으로 돌아오고, 고대하던 아들 이삭의 출산을 확인받는다. 배려는 대가를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지만, 그 결과는 내가 기대하지 못한 영적인 복으로 돌아온다.
룻의 헌신적인 선택(룻기 1장): 책임과 헌신에 기반한 배려
룻은 남편을 잃고 자신도 힘들었지만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홀로 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르는 선택을 한다. 인간적으로 무모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룻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룻은 절망과 슬픔에 잠긴 늙고 약해진 시어머니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편안한 부모 친척과 익숙한 고향 땅을 등지고, 알 수 없는 나오미와의 불안한 미래를 선택한다. 물질적인 손해를 보는 선택을 하기도 어렵지만 자신의 인생을 거는 선택을 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 손해 본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손해 본 인생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기에 나의 미래에 손해되는 책임을 회피한다. 그러나 룻은 자신이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선택하지 않고 더 고생스럽고 암울해 보이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책임을 선택한다.
이처럼 배려는 나에게 주어진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책임보다 권리를 우선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권리를 위해서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책임지는 것은 소홀히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남을 배려하는 선택은 어리석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강조한다. 우리의 삶은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내가 책임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권리를 선택할 것인지에 따라서 내 삶의 양상이 달라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앞길을 예비하신다. 룻은 낯선 시어머니의 땅에서 보아스를 만나 도움을 받으며, 궁극적으로 메시야를 준비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을 받는다. 배려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다양한 역할의 책임을 다하는 자세이다. 부모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교회의 지체로서, 그리고 이웃과 직장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배려의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궁극적이고 영적인 배려
이 땅에서 가장 완벽한 배려의 삶을 사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서 섬김을 삶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으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삶의 자세를 가르치셨다.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슬픈 자를 위로하셨다. 예수님은 삶의 의미와 소망을 잃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셔서 영적인 목마름을 채워 주셨다. 오라버니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슬퍼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찾으셔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적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궁극적인 배려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생을 주신 구원 사역이다.
이 땅에서의 슬픔과 원통함, 아픔과 배고픔은 위로받고 채움을 받아도 다시 찾아온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은 사람들은 하루가 지나면 또 같은 배고픔을 경험한다. 나사로의 부활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큰 기쁨이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는 다시 죽는다. 예수님은 우리의 궁극적인 필요를 보셨다. 우리의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질병과 죽음의 궁극적인 해소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한 구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러한 상태를 보시고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다.
육적인 어려움을 보고 필요를 채우는 배려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필요를 보고 도움을 주는 영적인 배려는 더 중요하다. 상대방의 육적인 어려움을 보아야 배려를 할 수 있는 것같이, 영적인 상태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배려는 상대방의 어려움을 보는 것이 첫 단계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돕는 행동이 그다음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행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기에 영적 배려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영적인 안목이 열려서 영적인 필요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영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 문제의 뿌리에는 존재 가치의 이슈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존재 가치를 누리면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단절시키고 존재 가치를 하나님 밖에서 스스로 찾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은 물질, 외모, 학력, 지위, 명성 등 다양한 것들을 채워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진정한 존재 가치를 누리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올무가 되어서 우리로 집착하고 노예가 되게 한다. 성경은 존재 가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찾으려고 애써도 결국 허무만 남게 된다고 선포한다(렘 2:13). 하나님을 떠나서는 채워지지 않는 존재 가치의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존재 가치를 회복시키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고생하고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자신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궁극적인 배려이다. 아브라함은 물질적인 손해를 보는 배려를 하였고, 룻은 자신의 미래에 손해되는 배려를 하였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배려를 하셨다.
배려는 거창한 일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시작된다. 지친 사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늦게 들어오는 가족을 위해 켜놓은 조명의 불빛, 동료의 수고를 알아주는 한 문장 속에도 배려가 깃들어 있다. 그러나 그 배려의 마음이 진정한 힘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점점 삭막해지는 이유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보다,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타락의 본질 역시 자기중심성이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다. 그 유혹은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전환, 곧 자기 신격화의 욕망이었다. 즉 자신이 하나 님처럼 세상의 중심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면서 살려는 마음이 인간 타락의 중심에 있다. 이 원죄가 인류 역사 모든 불행의 출발점이다. 타락은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욕심이다. 따라서 배려는 단순한 사회적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영적 행위이다. 배려는 죄로 왜곡된 자기중심성을 하나님 중심으로 되돌리는 회복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