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예수님처럼_Just Like Jesus - 송준인 목사 (청량교회 원로)
2025.07.31 15:36
▶들어가는 말
2001년 담임 목회를 시작하면서 어떤 목회 철학을 가지고 목회를 할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다. 기도하는 중에 마가복음 10장 45절이 떠올랐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목회의 근간으로 삼고 목회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교회의 표어를 <예수님처럼>이라고 지었다.
예수님처럼 섬기는 목회자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으셨다. 영광스러운 많은 칭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라고 부르셨다. 물론 '인자'라는 말 속에 담긴 신학적 담론이 많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의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이름을 통해 강조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셔야 마땅하심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선생으로서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섬기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끝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대속물로 내놓으셨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오신 예수님은 참으로 훌륭한 목회자셨다. 겸손, 섬김, 희생으로 표현되는 예수님의 목회는 이 땅의 목회자로 부름받은 모든 주의 종들의 본보기이다.
▶ 목회의 스승
청량교회에 6대 목사로 부임할 때 나는 유학을 마치고 신학교 교수 사역을 하고 있었다. 교수 사역을 위해 공부만 했지, 목회에 대해서는 경험이 일천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목회의 스승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목회의 스승을 떠올리게 해 주셨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오늘의 양식>이라는 소책자를 묵상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빌(Bill)이라는 청년이 예배 시간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예배는 이미 시작되어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계셨다. 예배당에 들어가 보니 자리가 꽉 차서 앉을 데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청년은 가운데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설교를 듣던 회중들은 예의 없는 청년의 뒤통수에 대고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설교하시던 목사님도 놀라서 잠시 설교를 중단하고 청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인 청년은 가운데 통로의 맨 앞자리 바닥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털썩 주저앉았다. 회중들과 목사님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고 설교에 집중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저 뒷자리에서 예배드리던 한 노집사님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청년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서 나온 것이다. 회중들은 또다시 놀라며 그 노집사님의 뒤통수에 대고 '노망이 드셨나?' 의구심을 품으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목사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노집사님은 청년이 앉은 자리 옆에 지팡이를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몸에 전율을 느꼈다. 사람들은 청년의 겉모습만 보고 예의 없다고 비난했지만, 그 노집사님은 그 청년의 마음을 살폈던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좋은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저 청년은 혼자서 바닥에 앉아 예배를 드리니 얼마나 외로울까, 내가 친구가 되어 주어야지." 이렇게 청년의 외로운 마음에 공감했던 것이다. 빌과 노집사님의 이야기 말미에 이 성경구절이 적혀 있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지하철을 타고 가가며 이 대목에서 나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하나님, 제게도 이 노집사님과 같은 영성과 마음을 주세요." "공감" 상대방의 마음을 살필 줄 아는 능력,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이다. "제게 목회의 스승을 허락해 주세요"라는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이 노집사님을 떠올리게 해 주셨다. 이름도 모르는 이 노집사님이 내게는 하나님이 주신 목회의 스승이었다.
▶ 좋은 교회, 좋은 교인, 좋은 목회자
목회를 시작하면서 교회의 사명선언문을 만들었다. 교회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하면서 오랜 시간 수정을 거듭하여 이와 같은 사명선언문이 만들어졌다. "우리 교회의 사명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예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들으며, 예수님의 참 제자로 훈련받아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다." 교회의 핵심 가치는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와 전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와 구제, 그리고 하나님 나라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과 장학 사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 가지 핵심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사명선언문을 만들어 교회 앞에 공포하였다. 그리고 매월 첫째 주일을 선교주일, 셋째 주일을 구제주일, 마지막 주일을 교육장학주일로 지정하고, 이 세 가지 핵심 가치를 상기하며 실천하고자 했다.
한편, 종교개혁자 칼빈의 목회관에 따르면, 목회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얻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양육하는 일체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의에서 목회의 분명한 목표를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닮아 가도록 말씀을 통하여 양육하는 일체의 모든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의 표어인 <예수님처럼>과 교회의 핵심 가치인 선교, 구제, 인재 양성, 그리고 칼빈이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닮아 가도록 말씀을 통하여 양육하는 모든 사역이 목회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모든 요소가 균형 잡힌 목회를 하려면 우선적으로 목회자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본다. 좋은 교회는 좋은 교인이 만들고, 좋은 교인은 좋은 목회자가 만든다고 볼 때, 좋은 교회는 결국 좋은 목회자가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좋은 교회, 좋은 교인, 좋은 목회자 중에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좋은 목회자인 것이다. 목회자가 먼저 예수님처럼 살고, 선교와 구제와 인재 양성을 위해 헌신하고, 목회자가 먼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때 결국 좋은 교인이 양성되고, 그 좋은 교인들이 모여 좋은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 좋은 사모와 건강한 교회
목회의 절반 이상은 사모가 감당한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 같다. 내 아내는 원래 목회자의 아내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저 교수의 아내로 지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청량교회가 필자를 목회자로 부를 때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 사실 개인적인 자유를 유보하고 공적인 매임을 선택한 것이다.
아내는 공감 능력이 탁월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는다. 아내는 상담을 공부했다. 총신대에서 성경적 상담학으로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다. 더 좋은 사모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가정에서는 1남 1녀의 어머니로 아이들을 성경적 가치관으로 키우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서 아들은 미국에서 EM(영어 사역) 교역자로 살아가고 있고, 딸도 목회자 사모가 되었다.
아내는 인사를 참 잘한다. 아내는 별명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인사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르신들께는 허리를 90도 굽혀 밝은 미소로 인사하고, 청년들은 모두가 아내의 '자기'이다. "자기야, 자기야" 이것이 아내가 청년들과 조금 젊은 여성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아내는 항상 본당 3층 로비에서 성도들을 맞이한다. 눈썰미가 탁월하여 새가족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새가족들은 아내를 여전도사인 줄 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여전도사가 없다. 아내가 다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전화기를 붙들고 산다. 성도 한 사람, 한 살람을 살뜰히 챙기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하고 책 읽기 좋아하는 천생 학자 스타일이어서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것이 부족하다. 그런 부족함을 아내는 넉넉하게 채운다. 아내가 전공한 분야는 성경적 부부의 친밀감이다. 그래서 아내는 교회 내에서 부부학교를 열어서 집단 상담을 하곤 했다. 그리고 미혼 청년들을 대상으로 결혼예배학교도 열곤 했다. 장애인들도 살뜰히 챙겨서 은퇴를 앞두고 장애인들이 나와 아내를 붙들고 통곡을 했다.
내가 있는 곳엔 늘 점잖은 고요함이 있고, 아내가 있는 곳엔 늘 기쁨과 웃음이 있다. 아내와 난 천생연분이다. 아내는 그야말로 목회자의 아내로 적격이다. 내겐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지쳐서 귀가하는 나를 향해 늘 톤을 높여 인사한다. "여보, 어서 와요. 오늘도 수고 많았지요?" 아내의 밝은 목소리는 나의 피로를 날려 버린다. 그렇게 아내는 좋은 아내로, 좋은 엄마로, 좋은 사모로 살아왔다. 그렇게 나의 부족함을 '돕는 배필'이 되어 채워 주었다. 그래서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목회의 40%는 내가 하고, 나머지 60%는 아내가 한다고 말이다.
좋은 사모는 이렇게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간다. 하나님이 주신 기질대로, 그리고 교회의 형편에 따라 사모들은 남편 목회자의 빈 공간을 채우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한다. 목회의 음지를 양지로 만드는 일은 사모의 역할이다.
▶ 목회자 부부는 양 무리를 섬기는 목자로 부름받았다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에 대해서 가장 잘 묘사해 주는 그림이 바로 목자와 양떼의 모습이다. 목자는 언제나 양 무리의 앞에 위치한다. 그리고 홀로 거기에 서 있다. 목자는 양 무리의 리더이며, 리더십이라는 특권을 누린다. 하지만 목자는 언제나 양 무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고 실제로 양 무리를 보호하다가 죽기도 한다. 목회자의 리더십은 일차적으로 권위라기보다는 섬김이다. 이상적인 목회자는 여러 모습의 성도들에게 여러 모습으로 다가가야 한다.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유명한 자나 무명한 자나 차별 없이 대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2). 이처럼 목회자가 성도들과 같은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성도들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지혜로운 목회자는 개인적인 묵상이나 연구, 또는 설교 준비와 기도를 위해 자기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성도들과의 만남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필요가 목회의 방해거리가 아니라, 그것이 목회 자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목회자는 교회 성장 전문가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목자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목회자는 목장 주인이나 목장 관리인이 아니라, 양 무리를 치는 목자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신실한 목자는 양 무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진심으로 잘 보살핀다. 목회자는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내가 정말 양 무리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그리고 내 목회의 성공을 위해 양 무리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 목자장 예수님의 섬김의 본을 따라 솔선수범하라
목회자가 목자장 되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양 무리를 사랑할 수 없으며, 양 무리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목자장 되신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 양 무리가 목회자 안에서 목자장을 볼 수 있어야 하며, 목회자로 인해서 목자장을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땅의 목회자들은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에 비추어 좋은 목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15).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다. 사도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라고 말했다. 목회자도 이와 같이 가정생활, 헌금, 기도, 묵상, 전도 생활에서 교인들의 앞에 서서 본을 보일 때, 교인들이 그 뒤를 따르며 궁극적으로 주님을 따르게 되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리라 믿는다.
2001년에 시작한 목회가 이제 지난 6월 29일에 마무리되었다. 교회의 새로운 비상을 위해 조기 은퇴를 결심했다. 약 4년 반 일찍 은퇴하는 셈이다. 감사하게도 좋은 후임자가 와서 마음이 든든하다. 뒤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면서도 아쉬움이 가득하다. 나의 23년간의 목회 여정은 표어대로 <예수님처럼> 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