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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내용은 총신원보에 실린 내용입니다]
비느하스여 일어나라!
(민수기 25:1-15)
양지 종합관 앞에는 소나무가 한그루 심겨져 있습니다. 관상용으로 심었거나 건축허가를 위한 조경으로 심었을 것입니다. 그 소나무를 보면서 소나무 같은 신학도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활엽수 같은 신학도들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소나무 성도”라는 자작시 한편을 나누고 싶습니다.
소나무 성도
동대구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사경회가
반야월교회에서 열렸다.
반야월교회 100년 역사에 감사 마음 담아 표현한
예배당 앞마당에 심겨진
소나무 4그루
큰 키 소나무 3그루와 낮은키 1그루
교우들이 오가며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꿈꿀 수 있도록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소나무 성도 되라고,
소나무 교회 되자고
하나님께서 직분 주신대로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대로
춘하추동 변함없이
기도의 자리, 충성의 자리
잘 지키라고
삐죽빼죽 교우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요즘
소나무 성도가 그립다
소나무 자태가 그립다
소나무 냄새가 그립다
소나무는 솔향기로
성도는 예수향기로 말하는
존재의 냄새를 간직한 그들이 그립다
소나무 성도가 많은 교회
세상에 점령되지 않는 교회
소나무교회가 많은 도시
희망의 산소를 뿜어내는
생명의 허파를 가진 도시
내가 섬기는 새로남교회
소나무 성도가 많아지기를 간구해본다
내가 먼저 소나무 목사 되자고
내가 먼저 소나무 인도자 되자고
나는 오늘도
소나무 성도로
가득 채워진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꿈꾼다
솔향처럼
예수향기 온 누리에 가득히
지난 10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일반인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신뢰하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 “개신교”라고 답한 사람이 18%로 천주교, 불교보다 적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적표가 이렇듯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의 슬픔이며 탄식입니다. 우리 주님께 이러한 성적표를 내어 놓기가 너무도 송구스럽습니다.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가운데 개신교를 가장 신뢰한다는 비율은 7.6%에 불과하다는 통계까지 접하면 거의 좌절과 체념의 수준까지 도달하는 듯 합니다.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의 열정과 신뢰를 국민들로부터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2004년 한국 갤럽이 주도한 한국의 종교실태조사에서 나타난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와는 다른 반전이기에 약간은 억울하고 또 항변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작년 아프카니스탄 사태로 말미암은 국민여론의 악화도 한 몫을 단단히 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목회자와 성도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매우 따갑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타개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주님의 음성에서 몇 가지 소망을 주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이 짧은 우리의 삶 가운데는 많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일들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문제의 발단인 동시에 그 사람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정말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주님과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 주님과 싸이클이 맞는 사람, 주님이 뽑아서 세울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영적인 정병을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영적인 정병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기 정체성은 거룩성(Holiness)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외 없이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가져야 할 정체성인 거룩을 상실하거나 훼손하려고 도전합니다. 거룩성이 함몰 되어가는 우리 시대이기에 주님께서는 더욱 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정체감이 분명한 영적인 정병을 찾으십니다.
타락한 시대, 타락한 백성
우리 시대처럼 출애굽 시기에도 백성들의 타락이 있었습니다.(민수기25장) 하나는 성적(性的) 타락이며, 또 한 가지는 영적간음이라 불리는 우상숭배였습니다. 발람이라는 거짓 선지자와 모압과 미디안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하게 했습니다. 미디안 여자들은 바알 신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러자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그 모임에 참석하고 우상의 재물을 먹고, 우상에게 절을 하는 도무지 행하지 말아야 할 죄악을 자행했습니다. 홍해의 영광과 그 기적을 맛 본 백성들이 유혹의 화살에 찍혀 그 고상한 분별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성적으로도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의 타락을 본 하나님의 마음은 너무나 아팠고,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뇌와 역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했던 모압이나 미디안의 역사는 지금도 예외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도록 간교하게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 거룩함을 상실하도록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건물이 화려하고 찬란하고 그 가운데 똑똑한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맛 잃은 소금이 되어버립니다. 맛 잃은 교회는 맛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꺼진 등불은 쓸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일수록 깨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히 알기를 원하는 참된 성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멈춘 비느하스
하나님의 진노가운데서 이 진노와 저주와 재앙을 멈추어 서게 하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은 비느하스란 사람입니다. 성경의 지식이 어설프게 있는 사람은 비느하스라고 하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중에 비느하스를 생각하게 됩니다. 출애굽에 나오는 비느하스는 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입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입니다. 제사장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했습니다. 음란을 행한 지도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진 자 이만사천명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한 도시 정도 되는 사람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시편 106편 30절 31절에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죄악이 관영한 때에, 비느하스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범죄한 사람들을 처벌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어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이 그와 그의 후손에게 있게 하신다며 약속을 허락했습니다.
비느하스여, 일어나라
비느하스인들 이 일이 쉬웠을까요? 그에게도 많은 고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간에 비느하스는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비느하스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비느하스가 되어야 되겠습니까? 잠자고 있는 비느하스가 있다면 일어나야 합니다. 방관자. 혹은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삶을 떨쳐 버리고 분연히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외없이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너는 완벽하냐? 너에게는 결점이 없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난관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을 위하여 또한 우리시대를 주님 앞에 거룩하게 세우기 위해 자신을 거룩함에 드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바로 세우기 위해 분투하며 일어서는 우리 시대의 비느하스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대의 비느하스를 찾고 계십니다. 비느하스가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한국교회의 건강성은 결정되게 될 것입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순간에 개인적인 안일함을 추구하는 자리를 과감하게 뒤로하고 하나님의 편에 섰습니다. 비느하스가 그리운 계절입니다.
총신 학우들이여! 주님께서 우리 시대의 비느하스를 찾고 계십니다. 누가 주님의 부르심에 대답하겠습니까?
비느하스여 일어나라!
(민수기 25:1-15)
양지 종합관 앞에는 소나무가 한그루 심겨져 있습니다. 관상용으로 심었거나 건축허가를 위한 조경으로 심었을 것입니다. 그 소나무를 보면서 소나무 같은 신학도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활엽수 같은 신학도들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소나무 성도”라는 자작시 한편을 나누고 싶습니다.
소나무 성도
동대구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사경회가
반야월교회에서 열렸다.
반야월교회 100년 역사에 감사 마음 담아 표현한
예배당 앞마당에 심겨진
소나무 4그루
큰 키 소나무 3그루와 낮은키 1그루
교우들이 오가며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꿈꿀 수 있도록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소나무 성도 되라고,
소나무 교회 되자고
하나님께서 직분 주신대로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대로
춘하추동 변함없이
기도의 자리, 충성의 자리
잘 지키라고
삐죽빼죽 교우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요즘
소나무 성도가 그립다
소나무 자태가 그립다
소나무 냄새가 그립다
소나무는 솔향기로
성도는 예수향기로 말하는
존재의 냄새를 간직한 그들이 그립다
소나무 성도가 많은 교회
세상에 점령되지 않는 교회
소나무교회가 많은 도시
희망의 산소를 뿜어내는
생명의 허파를 가진 도시
내가 섬기는 새로남교회
소나무 성도가 많아지기를 간구해본다
내가 먼저 소나무 목사 되자고
내가 먼저 소나무 인도자 되자고
나는 오늘도
소나무 성도로
가득 채워진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꿈꾼다
솔향처럼
예수향기 온 누리에 가득히
지난 10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일반인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신뢰하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 “개신교”라고 답한 사람이 18%로 천주교, 불교보다 적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적표가 이렇듯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의 슬픔이며 탄식입니다. 우리 주님께 이러한 성적표를 내어 놓기가 너무도 송구스럽습니다.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가운데 개신교를 가장 신뢰한다는 비율은 7.6%에 불과하다는 통계까지 접하면 거의 좌절과 체념의 수준까지 도달하는 듯 합니다.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의 열정과 신뢰를 국민들로부터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2004년 한국 갤럽이 주도한 한국의 종교실태조사에서 나타난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와는 다른 반전이기에 약간은 억울하고 또 항변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작년 아프카니스탄 사태로 말미암은 국민여론의 악화도 한 몫을 단단히 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목회자와 성도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매우 따갑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타개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주님의 음성에서 몇 가지 소망을 주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이 짧은 우리의 삶 가운데는 많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일들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문제의 발단인 동시에 그 사람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정말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주님과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 주님과 싸이클이 맞는 사람, 주님이 뽑아서 세울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영적인 정병을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영적인 정병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기 정체성은 거룩성(Holiness)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외 없이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가져야 할 정체성인 거룩을 상실하거나 훼손하려고 도전합니다. 거룩성이 함몰 되어가는 우리 시대이기에 주님께서는 더욱 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정체감이 분명한 영적인 정병을 찾으십니다.
타락한 시대, 타락한 백성
우리 시대처럼 출애굽 시기에도 백성들의 타락이 있었습니다.(민수기25장) 하나는 성적(性的) 타락이며, 또 한 가지는 영적간음이라 불리는 우상숭배였습니다. 발람이라는 거짓 선지자와 모압과 미디안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하게 했습니다. 미디안 여자들은 바알 신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러자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그 모임에 참석하고 우상의 재물을 먹고, 우상에게 절을 하는 도무지 행하지 말아야 할 죄악을 자행했습니다. 홍해의 영광과 그 기적을 맛 본 백성들이 유혹의 화살에 찍혀 그 고상한 분별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성적으로도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의 타락을 본 하나님의 마음은 너무나 아팠고,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뇌와 역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했던 모압이나 미디안의 역사는 지금도 예외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도록 간교하게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 거룩함을 상실하도록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건물이 화려하고 찬란하고 그 가운데 똑똑한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맛 잃은 소금이 되어버립니다. 맛 잃은 교회는 맛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꺼진 등불은 쓸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일수록 깨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히 알기를 원하는 참된 성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멈춘 비느하스
하나님의 진노가운데서 이 진노와 저주와 재앙을 멈추어 서게 하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은 비느하스란 사람입니다. 성경의 지식이 어설프게 있는 사람은 비느하스라고 하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중에 비느하스를 생각하게 됩니다. 출애굽에 나오는 비느하스는 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입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입니다. 제사장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했습니다. 음란을 행한 지도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진 자 이만사천명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한 도시 정도 되는 사람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시편 106편 30절 31절에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죄악이 관영한 때에, 비느하스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범죄한 사람들을 처벌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어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이 그와 그의 후손에게 있게 하신다며 약속을 허락했습니다.
비느하스여, 일어나라
비느하스인들 이 일이 쉬웠을까요? 그에게도 많은 고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간에 비느하스는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비느하스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비느하스가 되어야 되겠습니까? 잠자고 있는 비느하스가 있다면 일어나야 합니다. 방관자. 혹은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삶을 떨쳐 버리고 분연히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외없이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너는 완벽하냐? 너에게는 결점이 없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난관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을 위하여 또한 우리시대를 주님 앞에 거룩하게 세우기 위해 자신을 거룩함에 드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바로 세우기 위해 분투하며 일어서는 우리 시대의 비느하스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대의 비느하스를 찾고 계십니다. 비느하스가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한국교회의 건강성은 결정되게 될 것입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순간에 개인적인 안일함을 추구하는 자리를 과감하게 뒤로하고 하나님의 편에 섰습니다. 비느하스가 그리운 계절입니다.
총신 학우들이여! 주님께서 우리 시대의 비느하스를 찾고 계십니다. 누가 주님의 부르심에 대답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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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해봅니다.
맡겨진 사명 묵묵히 감당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평신도 지도자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