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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일보 오피니언


“아버지, 지금 저보고 나가라고 하셨어요? 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지금 바로 나갑니다.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세요.” 

얼마나 기고만장했던가. 어린 날부터 늘 어려웠던 아버지였는데 그 때는 아버지가 나보다 작아 보였다. 부모라는 것만으로 내 인생에 개입하려는 것에 짜증이 났다. 

잘 나가던 인기절정의 연예인이 연예 활동을 그만두고 학교 공부에 전념하라는 아버지의 호통에 대한 분노어린 반응이었다. 그는 “부모라는 것만으로 내 인생에 개입하려는 것에 짜증이 났다”고 그때의 심경을 표현하였다. 자식하나 잘 되라고 노심초사하는 부모의 경책을 자신을 옥죄는 쓸데없는 간섭으로 치부하는 순간 그의 삶은 꼬이기 시작했다.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을 자기식대로 해석하여 분노로 반응했다. 

우리나라가 매우 혼란스럽다. 주말마다 서울의 세종로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수많은 촛불이 넘쳐난다. 국가 권위의 상징인 청와대는 국민시위대에 의해 포위됐다. 대통령의 권위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사리 분별에 거리가 먼 초등학교 어린 아이들까지 부모의 손에 이끌려 광장으로 나왔다. 모두가 울분 가득 소리 높여 국민주권 회복을 외치고 있다. 어디에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진 것일까? 얼빠진 아들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돈을 손에 쥐자 그 어려웠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자신보다 작아보였던 순간이 인생의 내리막길로 떨어지는 때였다. 무릇 국민의 공복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국민을 어려워하지 않고 자신보다 작게 보는 순간 정상적 관계는 꼬이기 시작한다. 왜 우리 시대에는 멋있게 출발(Starting Well)하는 이들이 많건만 유종의 미(Finishing Well)를 거두는 이는 생각보다 적을까? 여러가지 그 이유를 분석해서 내놓을 수 있지만 그 으뜸 이유는 결코 배우려하지 않는 차돌맹이 같은 마음이라 생각한다. 

이제 성탄의 계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은 죄인을 찾아오시는 지극정성 사랑의 행위였다. 그런데 마음이 높아져 더 이상 배우기를 거부하는 지구촌의 수많은 이들은 그 지고지순한 사랑을 곡해하여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간섭이라 단정 짓는다.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환영 받기는커녕 배척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만약 우리 대통령이 집권초기부터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귀를 열어 국민들을 섬김과 존중의 대상으로 확신하고 달려왔더라면 어떠했을까? 역사에는 가정법이 성립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이 마음 아픈 현실이다. 왜 사람들은 배우는 지혜를 거부하는 것일까? 착각은 자유가 아니라 멸망인 것을 왜 조금 더 일찍 헤아려보지 않을까? 이제 연말, 절망의 거리에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크리스마스트리의 반짝이는 별을 보며 홀로 생각에 잠겨본다. 

“주여, 착각하지 않고 사는 지혜를 주소서!” 


출처 | 중보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