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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박사 파동의 여파는 전국민적인 범위를 이미 넘어섰다. 온 지구촌의 스캔들로 오명을 떨치게 되었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의 논문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해외 주재 동포들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황우석 박사 자신은 여전히 언론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는 계속 취재경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황우석박사 사태의 본질은 ‘진실게임’에 있다. 그 외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적 진실만이 황 박사 사건의 최후 최종의 해답이기 때문이다.
지지자들의 촛불집회시위나 언론이나 정권의 편 가르기식의 태도는 본질을 호도할 뿐이다. 황박사 팀은 과학자 세계의 ‘게임의 룰’을 일방적으로 깨드렸다. 그 결과 국내 과학자들의 비판, 특히 과학계의 소장파들의 끊임없는 추구열과 비판의식에 기초한 저항을 맞이하게 되었다. 과학적 정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소장학파들의 열정을 꺽어 놓으려고 수많은 조직적 혹은 개인적 비난이 난무했다. 진실을 덮으려는 시도는 MBC PD 수첩을 억압하는 것을 나타났다. 심지어 광고가 중단 당하고 설자리조차 없도록 한 민족주의를 가장한 광풍(狂風)이 한반도를 몰아쳤다. 청와대조차 개입하여 혼돈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최고의 힘은 항상 진실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황박사 사태를 통하여 인터넷시대의 양지와 음지를 동시에 보고 있다. 거짓이 진실을 핍박하는 세상의 적나라한 실체를 보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속도 못지않게 그 방향의 중요성을 직시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제는 ‘나는 승리를 도적질 하지 않겠다’는 압축된 문장 속에 담긴 게임의 룰에 대한 철저함이 33세에 요절한 그를 대제(大帝)의 반열에 올려놓은 동인이 되었다. 세상 어디에 가나 두 종류의 인간상을 만난다. 게임의 룰을 지키는 부류와 게임의 룰을 깨뜨리는 부류이다. 황우석 박사는 소위 세계표준으로 불리는 글로벌 스탠다드 (Global Standard)의 룰을 깨뜨렸기에 저명한 과학 잡지 사이언스 (Science)와 네이처 (Nature)에서 그의 논문이 쫒겨 났다. 게임의 공정한 룰을 교묘하게 깨뜨린 결과였다. 문자 그대로 글로벌 스탠다드는 단일화된 세계시장에서 그 기준으로 통용되는 규범이며 원칙이다. 첨단산업의 기술분야에서 시작하여 금융시장까지를 아우르는 거대범위의 모든 산업과 경제를 총괄하는 지구촌시대의 법이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고의적으로 혹은 무지하여 깨뜨리는 기업과 국가는 지구촌시대의 미아로 남을 수밖에 없다. 글로벌 스탠다드는 국가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세계화의 산물이다.
왜곡된 민족주의 의 열정은 우리를 지구촌의 악동으로 몰아간다. 우격다짐을 밀어 붙인다고 통하는 시대는 끝났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링 위에서는 투명함과 공정성 그리고 진실만이 끝내 살아남기 때문이다.


"비브리컬 스탠다드의 원리와 규범에 충실하면
우리 교단의 한국교회내의 장자적 위상은 자연스레 회복될 것이고
한국교회의 윤리성의 탁월성은 사회에 의하여 주목받게 될 것!"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우리 교회는 어찌 할 것인가? 이렇듯 세차게 밀려오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시대에 우리 교단은 어찌할 것인가? 겁낼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는 이미 비브리컬 스탠다드 (Biblical Standard), 즉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시간세계와 공간세계를 창조하신 이후 하나님의 자녀에게 사랑으로 주신 주님의 기대와 요구가 있다. 주님의 뜻과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즉 대헌장이 있다. 이것이 비브리컬 스탠다드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규범을 제도적으로나 관행적으로 혹은 정치라는 단어를 쓰면서 교묘하게 깨뜨리는 데 있다. 왜 교회의 투명성이 사회의 투명성을 이끌지 못하는가? 왜 교단의 투명성이 사회의 투명성을 압도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명목상으로 내 놓은 비브리컬  스탠다드와 실제로 적용되고 통용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교단의 발전과 성숙은 비브리컬 스탠다드 확립에 있다. 돈의 논리, 지역 정파적 논리, 관행의 논리에 더 이상 목매지 말고, 비브리컬 스탠다드의 원리와 규범에 충실하면 우리 교단의 한국교회내의 장자적 위상은 자연스레 회복될 것이고 한국교회의 윤리성의 탁월성은 사회에 의하여 주목받게 될 것이다. 사회는 교회를 재평가하여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교회는 시대의 양심으로 위상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향도적 사역은 사회와 국가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날이 오기를 목말라 한다.
문제는 비브리컬 스탠다드를 채용하려할 때 저항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창조적 파괴 (Creative ) 거룩한 파괴 (Holy  Destruction)를 향한 불타는 의지가 없으면 우리는 익숙한 것의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개선과 선순환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로부터 시작될 때가 종종 있다. 안타까운 것은 필자를 포함한 우리주위에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시도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교단은 비브리컬 스탠다드를 생명처럼 여긴다고 말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즐비한데도, 세상에서도 지켜지는 글로벌 스탠다드조차도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은 난해하고 경이롭기 까지 하다.

이조 500년의 묵은 관행을 극복하고자했던 실학파는 진실을 바탕으로 이치를 밝히자는 운동 즉,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명제를 내 놓았다. 우리교단에도 성숙과 성장의 바람이 힘있게 불어오도록 영적인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갈망해 본다. 비브리컬 스탠다드가 튼실하게 자리잡기를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