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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남지 2월호


  지난해 연말 한학기 동안 강의했던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신학도들의 연구 보고서를 채점한 일이 있습니다. 같은 주제하에 작성된 보고서를 일괄적으로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났습니다. 수많은 문장과 문단으로 구성된 보고서에는 절박함이 묻어나는 보고서와 의례적인 보고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절박함이 묻어있다는 의미는 신학도로서의 학문에 대한 치열함과 소명에 대한 열정, 그리고 맡겨진 영혼들에 대한 목회현장의 확신이 담겨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의례적이라는 의미는 과정을 끝내야 하니까, 점수를 받아야 하니까, 교수가 지시하였으니까 따른다는 마음이 표출되었습니다. 어떤 학생이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는 더 물어볼 것이 없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절박함이 우리 자신을 살리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시편의 기자가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편 42:1)” 사냥꾼이나 맹수에게 쫓겨서 죽기 살기로 내달렸던 사슴이 정신을 차리고 목이 말라 헐떡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한 모금의 생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 역시도 육군훈련소 27연대 9중대에서 훈련받을 때 황하 교장에서 고지점령훈련을 할 때 목말라본 경험이 있습니다. 수십년만의 더위가 몰려와 모든 병사가 생수 한 모금에 대하여 갈급해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포악하고 밉게 보이던 조교가 훈련을 마친 이 후 훈련병 한 사람씩 돌려가며 물을 떠 주던 손길은 마치 천사의 손길 같았습니다. 목말라 본 사람만이 갈급함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생활의 안일함은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절박함을 사라지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절박함은 더 이상 치열하게 부르짖을 이유를 막아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데 절박함이 사라지면 더 이상 온 몸 던져 순종할 명령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기도생활에서 절박함이 사라지면 더 이상 부르짖을 언어가 없어집니다. 부르짖음의 절박함이 없는곳에 응답의 은총이 임할 리가 있겠습니까?
소위 배부르고 등 따뜻한 그리스도인들이 양산되는 때에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가치는 절박함, 치열함, 분투, 눈물, 꿇은 무릎입니다.


벌써 새해를 맞이하여 2번째 달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지난 한 달을 돌아보면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살펴봅니다. 분명한 것은 절박함으로 살아낸 시간은 의미 있고 유용하고 열매를 맺었다는 흔적입니다. 그러나 안일함으로 건성 건성 살아간 삶에서는 가치 있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기자는 절박함의 정점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자신에게만 절박하면 위험해 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향하여서 아무리 절박해진다 할지라도 얻을 것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과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에 더욱 간절한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