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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목회 2014. 6월호

모든 것을 드러내는 예배


필자는 1994년 11월 6일 첫째주일에 새로남교회 부임하였다.
공식적으로 담임목사로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사역을 시작하기전 10월 마지막주에 장로님댁에 머물면서 대전지역의 대표적 교회의 예배에 참여한 일이었다.
새벽기도로부터 출발하여 저녁예배까지 참여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전입신고이며 동시에 교회의 형편을 알아보고자함이었다. 어느 교회든지 예배에 참석하면 그 교회의 모든 사항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각 교회를 방문하면서 축복되었던 점을 기록하여 필자의 목회현장에 적용하였다.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필자에게 주신 여러 가지 은사중 다른 목사님들의 목회와 교회역사로부터 배우기를 힘쓴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배우는데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부임이후 첫 주에 한 일이 강대상 위에서 종을 치우는 일이었다. 강대상 예배종은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자유함을 제한하는 상징일수도 있다.
전통이 주는 무게와 축복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지만, 전통에 얽매여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은 오히려 전통에 찌들려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다음에 한일이 장년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있던 중고등부를 자체적으로 독립시켜 청소년들에게 적합한 예배 형식을 갖추게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장년부는 장년부대로 청소년부는 청소년부대로 예배의 자유와 안정감을 가지게 되었다. 
필자는 사랑의교회 부교역자 시절부터 예배 안내나 행정을 처리하다가 자신의 예배를 소홀히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고 목회자 자신이 성도들 앞서 예배자로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지금도 매 예배 드리기전에 기도를 인도하시는 장로님들과 손을 잡고 기도한다. 현재의 위치로 예배당을 이전하기 전에는 예배실 앞자리에서 예배시작 전에 장로님과 함께 기도했다. 그러나 지금은 매 예배시간 15분전에 기도인도자 장로님께서 목양실로 오셔서 함께 기도드린다. 이러한 일은 장로님숫자와 관계없이 마음으로부터 친근감을 우러나게 할 뿐 아니라 장로님 스스로 기도자로서 확신과 담대함과 겸손을 회복하게 한다. 
필자의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찬송을 더 하는 편이다.


찬송시간이 의례적으로 배분되어 통과의례식으로 진행되어서는 도무지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일상이 얼마나 바쁘게 진행되는가. 찬송 한 두장을 무미건조하게 부르면 마음이 열리기는커녕 피곤함만 증가한다. 찬송은 이성을 사용하여 가사의 내용을 숙지하고, 자신의 고백으로 올려드려야 하는 요소 뿐 아니라 때로는 눈물과 아픔과 탄식을 담아내는 감정이입이 있어야 한다. 특히 찬송앞쪽에 위치하는 영광송을 부를 때는 삶의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영안을 열어 영광의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주보에서 보듯 새로남교회에서는 다른 교회보다 적어도 한 두곡 이상 찬송을 드린다. 많은 경우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회복하는 은혜를 경험하기도 한다. 
또한 매 주마다 ‘한 마음 한 입술 기도’를 넣어 통성으로 기도드린다. 어떤 이들은 장로교회답지 않게 기도한다고 알 듯 모를 듯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필자의 교회가 위치한 곳은 대덕연구단지와 제3정부종합청사가 있는 곳이다. 연구원을 비롯한 전문직종 종사자들과 공무원들의 특징은 자기 속에 있는 감정을 드러내기를 극히 꺼려하는 성향이다. 이들이 실험실이나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소리 내어 기도할 수 있겠는가.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돌아보는 시간일 뿐 아니라 공통된 기도제목에 힘을 실어 영광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이다. 예배는 머리가 열리고 가슴이 열려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하심과 말씀에 민감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생이 경험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소통의 시간이다.
그런데 많은 예배시간에 불통을 경험한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합심기도이후 기도 담당자가 기도를 인도한다. 시간은 3분미만으로 약속이 되어 있다. 공적예배이니만큼 사적인 부분은 제거하고 꼭 필요한 부분을 기록하여 집에서 철저하게 연습한 이후에 강단에 서도록 한다. 어떤 이들은 기록하여 기도하면 성령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지만, 시행해 보니 부정적인면보다 긍정적인면이 훨씬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필자가 부임한 이후에 주일저녁예배와 수요일 예배는 춘하추동 저녁 7시30분에 드린다. 한국교회가 어느때부터인지 저녁예배를 오후예배로 바꾼 이후 저녁예배 약화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걱정한 것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왜 오후 예배로 돌리자는 요청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지금까지는 초지일관 저녁예배를 견지해 왔다. 낮예배를 대예배라고 부르지 않는다. 만약 낮예배를 대예배라고 하면 저녁예배는 소예배가 될 것인가? 우리국민 의식 속에는 대소와 강약의 구분이 심한만큼 남녀와 지방에 대한 각각의 견해가 자리 잡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의 가치가 거침없이 교회로 들어오면 어떻게 교회가 본질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새로남교회는 어른 예배와 주일학교 예배를 차별두지 않는다. 실상 아이들이 예배자로서 훈련받아 자라나 어른이 되어서도 축복된 예배를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것이다. 부임초기부터 주일학교 예배의 정상화를 위하여 적지 않은 재정을 투자하여 좋은 사역자를 모시려고 하였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자라나 장년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보면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된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예배의 본질은 나이가 들어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좋은 예배자가 좋은 예배를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좋은 예배는 좋은 예배자를 세워줄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 선순환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 은혜를 심화하여 영적 시온성으로 가꾸어가게 한다.
감사하게도 새로남교회는 제자훈련과 사역훈련 그리고 교우들을 위한 성장프로그램과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의 진보를 위하여 매진할 수 있는 기회를 붙잡을 수 있다. 필자는 훈련 없이 좋은 예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상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도 참된 예배자, 일상의 예배자, 일터의 예배자를 세우는 일이라 믿는다. 좋은 예배에 대한 목마름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아니 점점 더 커져나갈 것이다. 문제는 담임목사로서 또한 예배인도자로서 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때 늘 주님앞에 송구스러운 마음이 앞선다는 사실이다. 언제쯤 예배자다운 예배자가 될 수 있을까? 이것 역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임을 알기에 필자는 강단에 오를때마다 
“주여 종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의 종의 허물을 십자가의 보혈로 덮어 주시옵소서” “주여 종을 성령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새로남교우들이 참된 예배자로 온 몸과 마음이 주의 거룩한 제단에 드려지게 하옵소서” 엎드려 기도할 뿐이다.
새로남교회의 미래는 담임목회자의 주님의 은혜에 대한 얼마나 실존적인 깨달음과 실천에 달려있는가를 알기에 은혜감각지수를 높여 주시기를 간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