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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의 눈에서 감동의 눈물을 흐르게하는 장로가 그립다.



아름다운 희생의 대명사 장로
  경부선 열차나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을 본다. 그 가운데 서 있는 아담한 교회와 솟아오른 십자가는 보는 이에게 정겨움과 평화로움을 전해준다. 그러나 보이는 평화로운 모습이면에는 성도들 특히 이름 모를 영적지도자들의 치열한 주님사랑이 배어있다. 그렇다, 평신도 지도자인 장로는 아름다운 희생과 성숙한 인격의 대명사였다. 적어도 한세대 전에는 교회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이의를 다는 이는 없었다.
오늘의 장로상(長老像)은 과연 무엇이 채우고 있는지 궁금하다. 누가 뭐래도 한국교회의 큰 이미지는 목회자와 장로의 합작품임에 틀림없다. 장로의 인격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하는 말이 결코 과장된 이야기는 아닐 성싶다. 장로의 직분 자체는 성경에서 증거하는대로 존귀한 직분이다. 누가 장로의 직분자체에 대하여 폄하한다면 덕스럽지 못한일 일 것이다. 그러나 장로직분을 수행하는 당사자 역시 인격에 있어서나 사역에 있어서 공사중, 수리중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을까.

장로됨이 섬김의 출발점인가, 종착역인가?
  장로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하거나 더럽히는 것은 장로의 속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이 낙동강 1300리의 발원지인 것처럼 장로의 영혼의 지성소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섬김의 종착역인가, 출발역인가가 결정된다. 이상하게도 한국교회에서 내려오는 말 가운데 없어져야 당연하지만 갈수록 힘을 얻는 이야기는 "그 사람 장로 되더니 사람 버렸다"는 류의 말들이다. 장로직의 생명은 그 순전성(Integrity)에 있다.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한 몸드려 섬기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주님의 영광과 교회의 성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에 반하여 장로직을 통하여 얻는 유형, 무형의 보너스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면 자신과 장로직의 추락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장로됨이 섬김과 희생의 출발이라고 인식할 때와, 존경받고, 다스리는 직분이라고 인식할 때 나타나는 양상이 같을 수 있겠는가?

도장찍는 재미보다, 도장 찍히는 재미를 추구하라.
  장로교회 시무장로는 당회원으로서 각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목사와 같은 권한으로 각 항의 사무를 처리하는 권한을 가진다. 직분수행을 하다보면 자연히 많은 서류를 접하게 되고 도장찍는 재미에 푹 빠질 수 있다. 도장찍는 재미가 체질화되면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것으로부터 무게중심이 옮겨진다. 나중에는 도장찍고 일처리 하는 것 자체가 목적으로 등장한다. 무릇 장로의 직분을 받은 이는 주님께 인정과 신뢰의 도장을 받아야 한다. 성도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저 장로님처럼 교회생활하고 싶다" "저 장로님 가정처럼 살고 싶다"는 빗발치는(?)여론이 형성된다면 역할모범의 본래적 사명은 이룬 것이다. 장로의 직분은 서류에 도장찍음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삶에서 품겨 나오는 향기로 말해야 한다.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내 철학을 버리고 담임목사의 목회철학을 꽃피우게 하라.
  만약 장로가 반석 같은 목회철학이 있다면 이는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쉽게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장로에게는 섬김과 충성의 철학만이 있을 뿐이다. 담임목회자의 목회철학에 동역하여 건강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의지가 불탈 뿐이다. 참다운 목회의 동역은 내 철학을 버리고 담임목사의 목회방향과 철학을 온전히 수용할 때 조화롭게 이루어진다. 왜 수많은 교회에서 담임목회자를 청빙하여 잔치집처럼 출발했다가 마치 초상집처럼 갈라서는가?
그 이유는 철학과 철학, 이론과 이론, 권위와 권위가 맞부딪혔기 때문이다. 마치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형국과도 비슷하다. 철저하게 점검하여 청빙하든지, 아니면 아예 청빙하지를 말든지 하면되지 청빙한 후에 소신껏 목회를 감당하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으로 목회를 흔들고, 교회를 어지럽게 할 일은 무엇인가? 장로가 철옹성 같은 목회철학을 소유하는 한 목회현장에 은혜의 봄바람이 불기는 어려워진다. 이상하게도 여러 가지 장로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빈도가 높을수록 목회에 대한 규제도 심해진다고 느끼는 것은 목회자들만의 느낌인가 자문해 볼 일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함께 동역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에 대하여 감동을 담아 후세에 전한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이러한 목회자와 동역하는 이들간의 가슴 뭉클한 순애보(純愛譜)는 과거의 일로만 기억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시대의 장로와 목회자의 결단이 필요하리라.

돈을 좋아하지 말고, 경건의 본을 보이라.
  왜 일반시민들이 장로와 돈을 오버랩시킬까. 개발논리에 따라 "잘 살아 보세"의 함성이 전국을 뒤흔들었을 때, 교회만이라도 "올바로 살아보세"의 원리를 붙잡고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교회는 국민들의 마음속에 화려한 이미지는 아니더라도 깨끗한 이미지로 자리잡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장로는 돈을 좋아하지 말고 도(道, 말씀)를 좋아해야 한다. 교회건축과정에 이권개입 하다 망신당한 장로가 어디 한 두 사람인가. 온 몸을 통째로 드리다시피 헌신하는 품격 있는 장로가 있는가 하면, 온 몸으로 뛰어 돈 되는 일에 몰두하는 장로도 있다. 건축중인 어느 목회자가 이미 건축이 끝난 이웃 목회자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던 중 제일성으로 들은 말이 "목사님, 절대 장로를 믿지 마십시오."였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장로는 경건의 능력으로 돈을 다스리는 모습을 교우들에게 실제로 보여주는 역할모범의 선두주자이며, 향도적인 사명을 가진 자이다. 세상 만 사람이 돈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하더라도 장로만은 돈에 대하여 높은 표준을 가지고 자신을 다스리기를 교우들은 기대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기에 장로들의 삶으로부터 희망의 불씨를 보기 원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돈 냄새나는 장로가 아니라 예수냄새 나는 장로에 목말라 하고 있다.

간증이 많은 장로로 서라.
  장로는 선견자가 되어야 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교회가 되려면 먼저보고(先見), 바로 보는(正見) 지도자가 필요하다. 먼저보고, 바로 본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통찰력과 고상한 인격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자칫 오해하면 자기주장이 많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이는 아니다. 오히려 매사에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이끌어주신 간증이 많다는 의미이다. 자기주장은 교우들에게 부담을 준다. 교우들을 억압 할 수 있다. 그러나 간증은 교우들에게 기쁨을 준다. 교우들의 마음에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한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그를 도우신 일"에 대한 다양한 체험이 있었다. 은혜 받은 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간증이 많은 장로가 여러 명 있을 때 그 교회는 예외 없이 장애물을 정면 돌파 할 수 있는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태산이 평지가 되는 은혜로운 역사도 체험한다. 이에 반하여 자기 주장이 많은 장로가 있는 교회는 될 일도 되지 않는다. 역사의 진보는커녕 현상유지도 힘들다.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들의 안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간증이 충만한 평신도지도자들이 포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학력지수나, 경제지수도 좋지만 은혜지수(恩惠指數)가 장로의 대명사가 되어야 당사자도 살고 교회도 살린다. 교우들을 인도하려고 소매를 걷어올리기 전,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려고 무릎을 꿇는 이 시대의 장로는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교제를 통하여 반드시 많은 간증을 추수할 것이다. 교회의 보물 같은 장로는 은혜지수가 높아 성도의 신앙지수를 상향조정하는 장로이다.

예배기도는 짧게 하고, 개인기도는 오래하라.
  초신자에 대한 배려는 교회 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배려가 목사의 메시지와 장로의 예배기도이다. 목사의 메시지가 교우들에 대한 따뜻함이 배어 있지 않으면 교우들은 영적 영양실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동일하게 장로의 기도가 교우들을 민감하게 배려하지 않으면 교우들은 기도생활에 대한 참신한 맛을 보기도전에 기도에 식상할 것이다. 회중의 눈을 뜨게 해놓고 주제 없는 메시지를 펼치는 것과 회중의 눈을 강제로 감게 해 놓고 중심 없는 기도를 강요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설교자에 대한 차원 높은 배려로서 예배실 뒷면에는 반드시 큰 회중 시계나 디지털시계가 자리잡고 있다. 설교시간과 예배시간에 대한 무언의 또 다른 메시지인 셈이다.
그런데 장로가 담당하는 공적 예배중의 기도는 모두 눈을 감고 하니 개인적 제어장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주관적인 감각의 시계만 기도자의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주관적이라고 다 나쁠 수는 없다. 문제는 기도자가 영적으로 둔감해지면 회중 모두가 눈을 감은채로 함께 미로를 헤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육신적인 나이가 들어갈수록 속사람은 새로운 경우도 많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목회자의 설교가 기다려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동일선상에서 장로의 기도가 기다려지는 교회가 되는 것도 축복이라 생각한다. 장로들의 기도시간이 마치 자신이 고문을 당하는 시간처럼 지레 겁을 먹은 교우들도 있다. 진정 주님과 회중을 사랑한다면 개인기도시간의 깊고, 오랜 기도를 통하여 예배기도가 생수 터지듯 해야하지 않을까. 예배기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업그레이드 시켜야 할 때가 이미 되었다.

장례 집례하는 목사의 눈에서 감동의 눈물을 흐르게 하라
  장례 집례하는 목사가 큰 감동을 체험할 수 있는 때가 바로 장로장례식 집례때이다.
충성된 장로, 온 교회의 사랑을 받던 장로의 죽음은 말이 장례식이지 실상은 온 교회의 영적 갱신이 일어나는 또 다른 잔치라 할 만하다. 조객들과 집례자의 눈에 맺히는 눈물은 고인에 대한 감사와 그의 믿음의 행적이 보여주는 감동에 대한 거룩한 답례이다. 이런 장례식은 교회에 힘을 준다. 비록 이별의 아픔이 있지만, 만남의 소망도 크기에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선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장례식이 집례자에게 가장 곤혹스럽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집례자와 조객 심지어 성경본문과 찬송, 순서도 동일하지만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바로 죽은 당사자 즉 고인이 된 장로의 살아생전의 믿음의 삶 여부 때문이다.
명목상의 장로였는지, 실제로 장로처럼 살았는지는 주님은 물론 사람도 안다.
대놓고 말만 안 할 뿐이지 온 교회 회중이 다 안다. 인생의 결론이 예수 닮은 장로인가? 세상 닮은 장로인가? 자신을 위하여 교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가?

  어떤 태도로 살아온 장로인가가 실상 인생의 결론이다. 우리 모두는 인생최후의 순간에, 집례목사의 눈에서 감동의 뜨거운 눈물을 흐르게 하는 장로가 그리운 시대를 살고 있다.

아! 이 시대의 아론과 훌은 어디에 있는가!
아! 그리운 오늘의 남강(南岡) 이승훈과 고당(古堂) 조만식 장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