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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사도 바울의 위대성은 그의 학문성과 영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지역교회를 존중했다는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실상 사도 바울은 지역교회와의 관계에서 치외법권을 주장할 수 있는 충분한 위치에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런데 오히려 바울은 지역교회와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쏟은 흔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먼저 그는 지역교회인 안디옥교회에서 파송받았다. 영적 질서를 무시하거나, 지역교회의 지도자들과의 갈등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성령님의 자연스럽고도, 은혜로운 인도함을 따라 한걸음씩 옮겨 놓았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바울은 선교현장으로 파송되기까지 지역교회의 충실한 사역자로서 동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던 성실한 일꾼이었다. 먼저 부름받은 동료들과의 전인격적인 교제와 상호 순복의 결과물이었다. 얼마나 갈등을 빚을 요소가 많았을까? 또한 지역교회를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선교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동일하게 지역교회를 이끄시는 영이기도 하시다. 불협화음이나, 편벽됨이 없다. 미세한 갈등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선교사들을 대하면서 지역교회에서의 성실한 훈련과정을 소홀히 하는 듯한 태도를 때때로 느끼곤 한다. 내 교회가 없는 국적 불명의 선교사가 내 선교지역에 충성한다는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선교는 유행이 아니다. 선교는 배낭여행이나 해외문화체험은 더더구나 아니다. 선교는 영혼을 살리는 전쟁터에 투입되는 것이다. 선교는 타인을 살리기 위하여 바울처럼 나를 죽이는 영적 작업이다. 이런 의미에서 취미 삼아 선교에 뛰어드는 것은 선교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요, 도전이다. 소명 없이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본 사례가 어디 한두건인가? 선교에 대한 열정은 복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함께 간다. 선교에 대한 초지일관의 태도는 지역교회에서의 훈련의 강도와 무관하지 않다. 지역교회에서 체험하는 인격적, 사역적 관계형성의 훈련은 선교현지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진다. 그러므로 선교는 지역교회 사랑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


 사도 바울은 동족구원에 대한 눈물의 간증을 가슴 한 복판에 지녔던 위대한 선교사였다. 담임목사를 비롯한 교역자들에게 선교가 부차적인 사역이 아닌 것처럼, 선교사들에게도 지역교회는 부차적인 존재가 아니다. 지역교회 사랑과 헌신이 단순한 통과의례라면, 왜 선교지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온통 목을 매야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리라.
사도 바울은 선교지를 순회하면서 그를 격려하고, 도와주었던 여러 후원교회들과 더욱 든든한 유대관계를 맺는 일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지역교회 또한 선교사를 사역의 동역자로 따뜻하게 예우했기에 이러한 축복된 만남속에서 선교사역의 상생의 축복이 꽃피워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한다.
여러분에게 지역교회는 과연 무엇인가?


 새봄이 아름다운 이유중의 하나는 여러 이름 모를 들꽃들이 어우러져 봄동산을 이룬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역교회와 선교단체가 어우러지고, 목회자와 선교사가 어깨동무를 할 때 복음의 역동성은 배가한다.
선교의 봄바람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의 종들에게 임한다. 그리고 그 인도하심은 지역교회와 선교회의 상호존중의 시너지 효과를 통하여 극대화 될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지역교회는 단순한 파송교회와 협력교회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선교를 가슴에 품고있는 귀하에게 지역교회는 과연 무엇인가?

오정호목사(대전새로남교회 담임/대전지부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