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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암만에서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리며 아래와 같이 소식 드립니다.



1. 고국에서의 귀한 시간들
    지난 번 편지를 통해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의 협력교회들 중의 하나인 우림교회(담임: 최금남 목사) 선교대회(4월 3-5일)부름을 받아 귀국하였습니다(4월 2일). 2 개월 이상동안 고국에 머물며,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여 설교, 선교보고, 특강을 하였고, 세미나에 참여하여 귀한 강의와 훈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ACTS 논문 심사를 잘 마쳤습니다(6월 3일). 고국에서 귀한 시간들을 잘 보내고 선교지로 돌아 왔습니다(6월 13일).

2. 큰 아들 다훈의 고교 졸업 및 대학 수시
      만 2세 때 선교지에 나왔던 큰 아들 다훈이가 고등학교(BFA)를 졸업하였습니다(6월 10일). 저도 다시 선교지로 돌아오는 길에 먼저 독일에 들려 그의 졸업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다훈이는 한동대학교 여름 수시에 응시할 예정입니다(8월 17,18일). 수시를 앞두고 두 주간에 걸쳐 MK NEST에서 개최하는 MK(선교사 자녀) 수련회에 참석합니다(7.18-29일). 제 아내 김은숙 선교사가 다훈이의 대학 수시 기간을 맞추어 귀국하여 잠시
고국에서 머물게 될 것입니다(8월 10-23일).

3. 요르단 주재 이라크인 교회 목회
     여전히 이라크가 정상화 되지 않아, 요르단 주재 이라크인 교회 목회사역에 보다 더 전념하려고 합니다. 저와 함께 이라크인 교회를 섬겼던 리더들 중 일부는 이라크로 돌아갔고, 일부는 해외로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아직도 요르단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대부분 바뀌었습니다. 특별히 아슈라피아의 이라크인 교회를 보다 더 집중적으로 섬기고자 합니다.

4. 거주 비자 발급 시급
     93년에 처음 요르단에 입국하여, 요르단 대학 학생신분으로 비자를 발급받았습니다. 그리고 1년 후 그 비자를 갱신하는 과정에서, 추방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여행비자로 다시 입국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르단 복음주의 신학교(JETS) 교수의 신분으로 비자를 신청하였다가 거절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 또 한번은 주말 학교인 한글학교 교장 신분으로 비자를 신청하였다가 거절을 당하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이 나라 정보부로부터 어떤 이름으로도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거주가 없었음에도, 여행 비자로 6개월까지는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법이 바뀌어 여행비자 기간이 3개월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른바 비자 여행을 3개월마다 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거주 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번에는 교회 목회자 신분으로 비자를 신청하려고 합니다. 기도하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정형남, 김은숙, 다훈, 다윗, 다희 올림


추신:
아래 글은 제가 지난 6월 11일(토) 스위스 바젤공항에서
겪었던 은혜로운 일을 중심으로 적어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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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차지 U$ 750 사건과 MK들의 하나님

                                     정형남 선교사

    선교사(Missionary) 자녀(Kid)를 보통 MK라고 한다. 독일의 남부에 유명한 MK 학교가 있다. 그 학교의 이름은 검은 숲, 즉 블랙(Black) 포리스티(Forest)에 위치한 학교(Academy)라는 뜻으로 BFA이다. 나는 나의 큰 아들 다훈이가 BFA에서 3년 동안 공부하고 졸업하게 되어 처음으로 그 학교를 방문하였다. 졸업식을 마치고 요르단의 집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BFA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스위스 바젤 공항을 이용하게 되었다.
BFA에서 출발하여 바젤 공항을 거쳐 요르단 암만 공항까지 오는 일행은 모두 6명이었다. 나, 졸업식의 주인공 큰 아들 다훈, 둘째 아들 다윗, 그리고 요르단의 동료 선교사들의 자녀들 3 명, Joshua McCordic, Amber Racey, 그리고 Mitchell Hilman 이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의 짐이 오버(over)가 되어 그 차지(charge)가 무려 750 스위스 프랑크(U$와 거의 같음)가 나오는 일이 발생하였다. 한 사람당 보통 30 킬로 안팎까지는 무난하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오버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항공사 직원은 한 사람당 정확히 20 킬로로 못을 박았다. 내가 고국을 방문하고 오던 길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부쳤던 나의 짐도 꽤 많았고, 졸업한 나의 큰 아들의 짐도 많았고, 한 MK의 짐이 좀 많았던 것이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최대한 짐을 줄이기 위하여 가방을 열고 조금 무거운 것들을 모두 다 꺼내어 핸디 캐리 용 가방에 다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것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 직원이 핸디 캐리 가방의 무게마저 측량한 다음, 그것마저 크게 초과되었으니 핸디 캐리를 할 수가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직원을 인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나는 몹시 당황하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가방을 풀어헤친 가운데 허리를 굽혀 땀을 뻘뻘 흘리며, 필요 없는 짐을 줄여 보기 위하여 애를 써 보았다.

     바로 그때, 어떤 신사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BFA 학부모이시지요? 저도 BFA 학부모입니다. 제가 오버차지 비용이 얼마든지 상관하지 않고, 모두 지불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 음성의 주인공이 나와 같은 BFA 학부모라는 사실을 인하여
창피하고 당황스러워서 그 주인공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겨우 일어나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가운데, “감사합니다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작은 소리로 답을 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나에게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의 두 아들도 “아빠, 그러지 말고, 빨리 허락하세요.”라고 종용하였다. 그래도 나는 용기가 나지 않아, 입을 꼭 다물고 아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 신사는 다시 나를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저는 비즈니스맨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크게 복을 주셨는지 아신다면, 저의 제안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이 정도의 일은 저에게는 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마침내, 나는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어렵사리 답하였다.

     바젤 공항은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에 세워져 있다. 우리는 독일의 BFA를 출발하여 왔기 때문에 프랑스 카운터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버차지를 지불하는 곳은 프랑스 카운터가 아닌 스위스 카운터에 있었다. 오버차지를 지불하기 위하여서는 공항 안의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선을 넘나 들여야 하였다. 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이민성 카운터를 두 번씩이나 통과하며 그 오버차지를 다 지불해 주는 그 신사와 동행하면서,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아올랐지만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때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풀어헤쳐진 짐 보따리 속에서 성경책을 보는 순간, 당신이 BFA 학부모이며 동행하는 아이들이 모두 다 BFA 학생들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값이 얼마가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다 지불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BFA는 MK들만이 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BK들도 다니고 있다. BK라 함은 sinessman Kid, 즉 비즈니스맨 자녀이다. 그들은 MK들보다 몇 배의 학비를 지불하고
다닌다. 그 신사는 BFA가 참으로 좋은 학교이고, 모든 선생님들이 선교사들이라는 점과 BK인 자신의 자녀들이 MK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점 등에 대하여 대단히 귀히 여겼다. 우리 집의 2명의 MK들과 그들과 함께 하였던 3명의 MK들이 입을 모아 하나님께서 그 신사를 통하여 자신들을 귀히 축복하셨다고 고백하였다. 사랑하는 MK들이 바젤공항에서 오버차지 U$ 750 사건 속에서 그들의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처럼 선교사들이 되든지, 아니면 그 신사와 같이 MK들을 귀히 축복하는 비즈니스맨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