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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월호 월간목회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

예수 믿지 않는 조리사가 자신의 혀의 “절대미각”을 유지하기 위하여 담배는 물론 음주를 절제한다는 자기 고백을 읽은 적이 있다. 이렇듯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은 보통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자기 절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영적 세계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목회자치고 자기관리의 원칙이 없는 이가 누가 있을까? 최근 세간의 여론을 이끄는 이슈중의 하나가 학력위조논란이다. 실체적 진실과 온라인, 오프라인상에 올려있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언론의 준엄한 비판은 물론 검찰의 수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 관리에는 정성을 쏟았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투명성을 깨뜨리는 모습은 모두에게 반면교사로 우뚝 서 있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에 목적이 분명한 자기경영 곧 탁월한 관리가 필요하다. 실상 필자 스스로 관리의 마에스트로 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배워야 할 것, 따라야 할 것, 훈련해야 할 것이 태산처럼 앞에 쌓여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배우는 열정을 유지한다.

필자가 속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에는 교회와 교단의 갱신과 인재양성 및 사회에 대한 복음적 방향제시를 목적으로 창립된 교회갱신협의회(Council of Pastors for Church Renewal)가 12년전에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름에 열리는 전체 수련회에 매년마다 부교역자들과 함께 참여한다.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필자는 거의 제일 앞쪽에 자리 잡는다. 어차피 일정 시간동안 참여해야 한다면 훌륭한 강사들의 간증과 메시지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강사의 얼굴을 비추어 주는 커다란 스크린이 장치되어 있기에 앞쪽에 위치하나 뒤쪽에 위치하나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앞자리와 뒷자리는 공간의 문제이기 이전에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새로남교회 담임목사로서 성도들에게 예배시간 앞자리를 사모할 것을 이야기하곤 한다.
예배시간 앞자리에 앉은 교인의 헤어스타일만 감상하다가 돌아서는 것은 결코 예배자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담임목사가 앞자리에 앉으니 자연스레 여러 부교역자들도 앞자리를 선호하게 되었다. 신행일치, 언행일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가슴속에 주님과 진리의 말씀을 향한 거룩한 불이 활활 타오르는 사역자들이 경험하는 인격과 삶의 축복이다. 모든 목회자가 그러하겠지만 주님께서는 필자에게 배우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을 허락하셨다. 말씀으로부터 배울 뿐 아니라 역사와 환경 그리고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의 거룩한 삶의 흔적을 통하여 배우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다.
일전에 독일의 비텐베르크를 방문한 적이 있다. 1517년 개혁자 마틴루터가 95개조의 항의문을 게시한 비텐베르크 예배당 안에는 놋으로 만들어진 그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필자는 그가 설교했던 설교단과 그의 무덤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싶었다. 그의 설교단에 섰을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던 쏠라 피데(Sola Fide), 쏠라 그라티아(Sola Gratia), 쏠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쏠루스 크리스투스(Solus Cristus), 쏠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를 외쳤다. 유럽 여러나라의 방문자들이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 자리를 떠나기 전 루터의 작은 놋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으로 감싸 안으며 개혁정신이 필자에게 계승되도록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필자를 인도했던 베를린에서 오랫동안 목회하고 있는 동역자가 “여러 차례 가이드로서 비텐베르크를 방문하였지만 오목사님 같은 사람 처음 본다”고 말을 해 주었다. 필자의 가슴속에는 교육학의 대명제가 자리 잡고 있다. “배우기를 중단하면 가르치기를 중단하라!” 독자 여러분께서 필자의 생활경험을 바탕한 예를 드는 것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리라 믿는다. 개척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나서 오늘까지 배우고자하는 마음의 불이 한시라도 꺼진 적이 없도록 역사하신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건강한 구조를 추구한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생활상의 잡다한 질병의 70% 이상은 외출에서 돌아온 이후에 “손 씻기”가 얼마나 몸에 철저하게 배어있는가에 따라 예방된다고 보고 하였다.
손씻기를 우습게 아는 만큼 질병에 노출된다는 사실이다. 생각의 구조와 삶의 구조를 어떻게 조정하는가에 따라 건강성이 담보된다는 원리이다. 이런면에서 필자는 평신도를 깨우는 목회철학을 바탕으로 한 제자훈련사역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 자신은 물론 온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목회현장인 새로남교회가 주님의 은혜중에 오늘에 이르게 된 요인을 꼽으라면 우리교회 평신도 지도자로 섬기는 순장(구역장)들은 이구동성으로 소그룹을 통한 제자훈련을 첫째 손가락으로 꼽을 것이다. 그 이유는 제자훈련은 단순한 성경공부나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에 결코 머무르지 않고 담임목회자의 정신과 삶의 구조뿐 아니라 목회의 방향과 사업계획까지 결정하는  DNA이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은 목회자로 하여금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구조적으로 결정해 준다. 시간사용의 우선순위를 매기게 한다. 대신관계를 결정할 뿐 아니라 교회 밖의 활동은 물론 대인관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제자훈련에 집중하다 보면 여가라는 것이 거의 없다. 진액을 제자훈련생들에게 쏟아 부으면 잉여 에너지가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비본질적인 활동에 손을 댈래야 댈 수 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선호되는 비둘기가 유럽에서는 해를 끼치는 새로 각인되어 있다. 온갖 병균을 옮겨놓는 매개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역사적 건물이나 관광객에게 비둘기는 불청객이다. 비둘기의 배설물은 혐오대상이다. 유럽의 관광청에서는 비둘기들이 앉거나 배설하지 못하도록 건물마다 뾰족한 침들을 설치해 놓고 있다. 비둘기 예방을 위한 고육지책의 결과물이다. 필자에게 제자훈련이라는 목회 구조가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 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감사요,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의 마음이다.
생각의 건강한 구조는 건강한 삶의 설계도이며 목회의 건강한 구조는 열매 있는 목회현장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당대의 훌륭한 목회자였던 디모데에게 이렇게 간절하게 명령 겸 당부를 하였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2)

목회자의 인간관계 즉 동역자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감지한 사도 바울의 애정어린 권면이다. 사도 바울 역시 인간사의 쓰고 단 맛을 다 경험해 보았기에 이런 권면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요새말로 하면 인간관계의 승리하는 구조는 목회자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전공필수사항이라는 의미이겠다.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추구한다.

한국 사람의 매우 큰 장점은 정적(情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인격을 지(知), 정(情), 의(意)의 총합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우리들의 특징중의 하나가 정, 의, 지로 순서 매김을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정에 죽고 정에 산다”는 명제가 따라 다니는가 보다. 목회현장에서도 정의 파워, 감정의 능력을 경험한다. 목회자에게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경적인 원리로 비추어 본다면 정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밑바탕에는 한국사람들이 가지는 정의 정서가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성과 영성의 계발을 위하여, 월간목회, 기독교사상, 목회와 신학, 빛과 소금, Disciple(국제제자훈련원), 복음과 상황, 뉴스앤죠이, Beautiful Leaders, New Wine, 주간조선등을 정기적으로 구독한다. 이러한 잡지들 가운데서는 필자와 견해가 다른 편에 서 있는 글들이 종종 눈에 띤다. 때로는 구독을 중단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지만 꾹 참고 있는 것은 다른 편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고자 하는 고민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은 본능에 속한 일이다. 그러나 타인의 소리에 마음을 두는 것은 훈련과 교양의 결과이다.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에 붙잡히지 않는 자기관리는 고도의 통찰력과 절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바탕을 견지할 수 있도록 영향을 준 이들이 적지 않다. 개혁자들의 불붙는 논리와 복음주의자들의 인격의 개방성, 제자훈련 목회자들의 치열한 자기 훈련 정신, 내수동교회 박희천 목사님의 말씀 사랑, 옥한흠 목사님의 시대를 통찰하는 선구자적 발자취가 필자의 인격과 사역속에 녹아 내려 있다.
좌우로 치우치기 쉬운 때를 맞이하여 중심을 잡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도 과거에 은사주의 치유를 중심으로 한 목회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말씀 중심에 사역하니 생명력이 오래 갈 것임을 깨닫고 목회 본질에 집중하게 되었다. 사역과 환경에 대한 심각한 통찰이 없이는 끌려 다니는 사역을 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의 은혜가운데 이끄는 사역의 현장을 이루기 위하여 균형감각을 늘 새롭게 하기를 소원해 본다.

사역의 다이나믹스를 위한 육체 인프라 강화한다.

주위에서 목회의 탈진을 경험하거나 갑자기 쓰러지는 경우를 보면서 육체의 강인함이 얼마나 건강한 사역의 자산이 되는지 늘 도전을 받는다. 필자의 경우 주님의 은혜로 남다른 체력을 타고 났다고 말을 듣곤 한다. 성도들은 늘 목회자의 역동적인 모습을 기대한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강단사역은 물론 대인관계도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주위에서는 골프로 몸을 단련하라고 권유를 하지만 아직까지 가벼운 맨손체조와 속보에 관심을 둘 뿐이다. 재테크의 열풍과 체테크의 광풍이 한반도를 몰아치고 있는 때에 목회자인들 예외가 될 수가 있겠는가.
우리 고장에서는 마라톤 매니아 되는 이가 마라톤 경기중에 세상을 떠난 사건도 있었다.
체력강화를 위하여 갖가지 기법이나 원리들이 난무하는 때에 신앙의 선조들이 가졌던 단순한 삶(Simple Life Style)을 추구하고자 한다. 필자 역시도 교회 부임한 이후 심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식사를 하다가 숟가락을 든 채 졸았던 일도 있었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 한계상황을 극복하게 하셨다. 체력은 관리의 대상이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영역임을 진솔하게 말하고 싶다.

건강한 목회를 이루기 위하여 꼭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일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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