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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원저명: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의 저자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는 역사이래로 자신을 극대화하여 효과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압축하여 연구하여 그 첫번째 습관을 주도적이 되라(Be Proactive)고 간파했다. 이어서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에 옮기라(Begin with the End in Mind)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Put First things First)고 주문했다.
목회와 관계없는 사람도 이정도로 인간과 사역을 꿰뚫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일에 수종드는 사역자들은 얼마나 사역에 헌신해야 할까?


세상 사람들은 성공의 개념정의가 더 많은 부의 창출과 명예의 증진이라면 우리 사역자들은 영혼 얻음(Winning the soul)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인정받음일 것이다.
사역자의 역할 모범으로 제시된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을 영광스럽게 맺으면서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많은 경우 이 성경구절이 장례식때 고인의 생애를 회고하는데 사용된다.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은 사역의 현장에서 늘 확인되고 점검되어야 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의 영광스런 고백을 동일하게 내 입술로 고백할 수 있을까?


사도바울의 고백을 가능하게 한 원리는 현대 경영학에서도 주장하는 선택과 집중의 원리이다. 사도 바울은 회심시에 “주여 뉘시니이까?”라는 질문과 이어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질문을 하였다. 그의 인생의 주군이 누군가 하는 의미를 담은 근본적인 질문과 그의 주군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사역에 대한 질문이다.
사역은 사람들과 더불어 하되, 궁극적으로 주님 앞에서(Coram Deo) 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불변의 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었기에 그는 전심전력할 수 있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자신이 붙잡은 일을 위하여 목숨까지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이며 동시에 축복된 일인가? 목양사역은 취미활동의 한 부분이 아니다. 적어도 사도바울은 생명보다 소중한 일로 여겼다. 이 열정에 의하여 사역의 범위와 깊이 그리고 품격이 결정된다. 외형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는 반드시 그 결과를 창출한 내면 즉 사역의 보이지 않는 구조를 점검해야 하리라.


최근, 한국교회 교우들을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계속 국민들에 의하여 제기되어져 왔다. 이 말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는 ‘한국교회 영적지도자 곧 목회자들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로 취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의 안목과 영성이 성도의 영혼의 상태를 결정한다. 그리고 영혼의 상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삶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성도의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은 교회생활의 반영이다. 성도들은 보고 들은 대로 삶으로 옮겨놓는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진다 하더라도 영적지도자가 결코 놓아서는 안 되는 사역의 원리가 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자 되라.”(고전 11:1)고 자신을 바라보는 회중에게 강력하게 도전하며 요청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의 사역이 너무나도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만약 우리의 모습가운데서 예수님과 무관한 부분이 많다면 그것은 응당 사역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의 목회 현장과 한국교회가 진실로 이웃으로부터 인정받고, 환영받고, 영적흡인력 있는 공동체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더욱 예수님의 모습이 성도들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심화, 확대, 재생산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으로 다가오셔서 우리를 영생으로 사로잡으신 것처럼 교회는 이웃에게 격의 없이 다가가 교회만이 가진 생명의 능력으로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3) 사역의 넓이는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깊이의 부족함을 불러온다. 우선 더딘것 같이 보여도 사역의 깊이에 집중하면 사역의 넓이도 자연스레 보완되지 않겠는가? 사역의 본질은 복음전파와 생명구원 그리고 생명의 성장과 재생산에 있다. 본질이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 일찍이 한국교회의 현실을 아픈 가슴으로 진단했던 필자의 멘토이신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삼허 현상을 본질에 충실함으로 극복하자고 역설하였다.


삼허(三虛)란 허세(虛勢) 허수(虛數) 허상(虛像)이다. 이제는 삼허를 과감하게 탈피하여 삼실(三實)로 나아가야 한다. 삼실은 실세(實勢) 실수(實數) 실상(實像)이다. 목회자의 본질에 대한 충성은 삼실로 확증될 것이다. 삼실이 목회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질때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 소망의 빛을 비추는 우리 시대의 등대로 견고하게 서게 될 것이다.
올해 연말에 우리 국민은 대통령을 선출하는 중요한 일에 참여할 것이다. 선거의 결과에 따라 향후 수년동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향을 받을 것이다.


우리 목회자와 교우들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사역의 주인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다.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충성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가? 성경에서 보여 준 시대를 초월한 사역의 원리를 적용하면 신실하신 주님께서 사역의 열매도 책임져 주시리라 믿는다.
선택과 집중은 재력을 창출해 내는 목적을 가진 기업에서만 통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영혼을 얻어 구원하기를 원하는 생명의 사역의 원리로서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