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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연습

2005.05.06 13:27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이별은

또 다른 축복된 만남을

약속한다"

  목회자에게 성도와의 이별은 언제나 낯설다. 주일 2부 예배후 계단을 내려오는 신실한 여집사님의 얼굴에 예사롭지 않은 수심이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사연을 들어보니 반 어머니 역할을 하던 서울 살던 언니가 짧지 않은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단다. 선 채로 함께 아파하며 위로의 기도를 드렸다. 언니와의 이별을 가슴아파하는 여집사님의 마음이 전달되어왔다.
 3부 예배후 대덕연구단지 연구소에서 착실하게 근무하던 젊은 집사 가족이 목양실을 찾아왔다. 서울로 전근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방에서 목회 하는 목사는 교우들 가운데서 서울로 직장발령이 나면 무조건(?) 보내야 한다. 현실적으로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아이의 이름까지 불러 기도하면서 유쾌하지 않은 이별을 하였다.
 저녁예배후에 교회주차위원으로 수년간을 충성스럽게 섬기면서 온 교우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남자집사 한 분이 내키지 않은 미소를 얼굴에 띤 채 찾아왔다. 캘리포니아 사촌 누님이 사는 곳으로 이민을 떠나야겠단다. 이미 그 가정의 계획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떠난다고 하니 괜스레 마음이 섭섭했다.


 함께 지난 세월이 강물처럼 서로의 가슴에 흘렀다. “아브라함이 이사 가는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것처럼, 집사님! 직장중심, 사업중심으로 살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 중심, 교회중심으로 사시면 반드시 주님께서 집사님의 가정을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익히 아는 말씀을 최후의 메시지로 권면하였다. 마음속으로는 “꼭 이렇게 떠나야만 하나?” 하는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별의식의 마지막은 기념촬영이다. 실상 기념촬영은 교우한사람 한 가족을 그냥 보내지 못해서 시도하는 목회자의 교인을 향한 최후의 통과 의례적 성격이 짙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이별사진을 어디에 쓸 것인가? 사진을 몇 장 더 뽑아 떠나간 교우에게 우편으로 부쳐 준들 사진을 받아든 교우가 눈에 잘 띠는 곳에 두고 몸의 이별과 따로 노는 마음의 이별을 더욱 자극하는 애물단지로 변할 것이 아닌가?

 지방에서 목회 하는 목회자의 불문율은 공무원, 연구원, 기업체직원, 교수등 서울로 가겠다는 교우들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라는 현실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난 새학기가 시작될 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담대하게(?) 서울로 진학한 우리 아이들 수십명을 떠나 보내야 했다. 떠나는 아이들은 그들대로, 남아있는 아이들 역시 남아있는 대로 적지 않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대학생 부서와 청년부서가 가장 많이 모이고 역동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우리교회 조차 고등부 주축이었던 아이들이 휑 하니 떠난 자리를 메꾸는 일이 수월한 일이겠는가? 다른 교회 형편은 어떨까 짐작이 가지 않는 바가 아니다.
 어떤 교역자는 떠나온 교회와의 관계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계속 경계지역을 넘나들다가 담임목회자와 교우들에게 의도하지 않았던 상처를 주는 일이 발생했단다. 교역자의 미숙한 이별 때문에 목회현장에서 발생하는 소모적인 일이 어디 한 두가지 이겠는가?
어떤 부교역자는 자기가 데리고 제자훈련하던 그룹원들과 필요이상의 가까운 관계가 되어 구설수에 올랐다는 소리도 들린다.


우리교회에서는 친형제 자매이상으로 정이 들었기에 한 달에 한 번씩 올드 멤버 모임을 하던 같은 제자훈련반 출신 집사들의 모임에 대하여 단안을 내렸다. 현재 이사가서 다른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교우들에게 친교모임에 참석하지 말도록 하였다. 나이 들어 복음안에서 만난 순수한 만남이 얼마나 푸근하고 좋을까를 모르는 바가 아니나, 언제 까지 그렇게 모일 수 있으랴?
일시적으로 섭섭하고 가슴아픈 일이겠지만 평신도가 치루어야 할 이별도 있으리라. 현재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목회자와 교우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하루 속히 그 교회에 잘 정착하는 것이 상호 축복이 되리라.

이러나 저러나 교우들과의 이별은 언제나 낯설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이별은 또 다른 축복된 만남을 약속한다고 믿기에 이별에 익숙해지려고 애를 써 본다.
어차피 인생과 목회는 만남과 이별로 채워져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