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제3차 각성 운동과 드와이트 무디의 활동 - 이상규 교수(백석대학교 석좌교수)
2025.11.27 14:22
미국에서 제3차 각성 운동은 키드 하드먼(Keith Hardman)의 지적처럼 19세기 중엽 직접적으로 감리교적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감리교는 잉글랜드에서의 1795년보다 11년 앞선 1784년 12월 조직되었는데, 이 당시 미국 감리교도는 15,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 후에는 57,630명으로, 19세기 중엽에는 132만 4천 명, 1855년에는 159만 3천794명의 신도를 거느린 가장 큰 개신교회로 성장했다. 이 성장은 애즈베리 감독(Francis Asbury, 1745~1816) 재임기부터였으며, 감리교회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순회 전도자들의 활동과 수많은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였다. 무엇보다도 19세기의 각성 운동이 감리교의 수적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제3차 각성 운동의 교파적 거점이었고, 지역적으로는 미국 뉴욕과 캐나다 온타리오주 해밀턴은 각성 운동의 중심 지역이었다. 당시 뉴욕은 복음주의적 개신교회가 압도적으로 많은 도시였다. 그 후에는 뉴잉글랜드 지역, 펜실베니아주, 시카고 등지로 확산되었다.
당시 미국의 유명한 부흥 운동가로는 제이콥 냅(Jacob Knapp) 목사, 야베스 스완(Jabez S.Swan), 에드워드 커크(Edward Norris Kirk), 제임스 코헤이(James Caughey), 그리고 월터 팔머(Walter Palmer) 박사와 부인 피비 팔머(Phoebe Palmer) 등이 있었다. 팔머 부부는 1850년 이후 매년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부흥집회를 인도했고, 여러 저술을 통해 각성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세기 후반의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는 제3차 각성 운동의 중심인물로 지칭되고 있는
데, 이 글에서는 무디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무디의 출생과 신앙 배경
무디는 1837년 2월 5일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의 이스트 노스필드(East Northfield)에서 석공으로 일하는 에드윈 무디와 베시 홀튼의 여섯 번째 자녀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무디가 4살 때인 1841년 5월 28일 사망했다. 당시 장남은 13살이었고, 아버지가 죽은 지 한 달 후에 어머니는 쌍둥이 동생을 출산했다. 가장이 사망했으므로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했고, 무디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8살이 되던 해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의 농장 일을 하며 성장했다. 무디의 어머니는 유니테리안교회 신자였는데, 무디도 유니테리안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이 교회로부터 신학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열일곱살 때인 1854년 무디는 보스톤으로 가서 삼촌의 구둣가게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 무렵 무디는 영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내가 회심했던 그날 아침, 밖으로 나가서 사랑스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세상을 비추는 밝은 태양이 그처럼 아름답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 소리도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한 이후 오스티아 항구에서 고백했던 바와 같은 것이었다.
무디는 에드워드 커크 박사의 강연과 설교를 들으면서 복음 사역에 관심을 두게 된다. 보스톤에서 2년을 보낸 무디는 1856년 9월 시카고로 이사하였고 사업을 시작했다. 1858년 5월 21일 자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에서의 사업은 이름 그대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장래는 더욱 밝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제가 더욱 건강하고 또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신다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성공을 이곳 시카고에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사업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영혼 구원을 위한 그의 열정도 깊어졌다는 점이다. 그는 시카고에서 플리머스회중교회에 출석했는데 이때부터 주일학교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주일학교를 위해 긴 의자 넷을 준비하고 주일 아침마다 거리에서 혹은 자신의 집에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얼마 못되어 더 큰 집회소(North Market Hall)로 옮겨갔다. 그의 집회에 1,500명이 모여들었다.
부흥 운동의 절정기를 맞은 전도자 무디
1861년에는 생업을 버리고 전적으로 전도자의 길로 나섰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무디는 시카고 YMCA 총무로 일하면서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그의 전도 운동은 성황을 이루었고, 설교는 감화를 주어 1864에는 일리노이 스트리트교회(Illinois Street Church)로 발전했다. 무디는 시카고를 비롯하여 북미뿐만이 아니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전역을 순회하며 영적 부흥을 일으켰다.
1870년 인디에나폴리스 집회 때부터 찬송 사역자 생키(Ira Sankey, 1840~1908)와 전도팀을 만들었고 함께 일하게 된다. 1873~1875년에는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285회의 대전도 집회를 인도했다. 생키는 찬송을 통해 무디의 부흥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무디와 생키에 의해 1873년 출판된 찬송가는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인세로 얻은 후원금이 미국에서만 100만 달러가 넘었다. 이 수익금은 무디의 고향 노스필드에 학교 설립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1875년 미국으로 돌아온 무디는 11월의 미국 뉴욕주 브루클린(Brooklyn)에서의 집회 이후 필라델피아, 뉴욕, 시카고, 보스톤 등 여러 도시에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런 지역 집회에서 회집 인원은 통상 1만 명에 달했다. 1873년부터 1878년까지 5년간이 무디 부흥 운동의 절정기였다.
무디의 설교는 단순하고 소박하였고, 미국의 낙관주의와 복음주의적인 아르미니안주의 요소를 띤 것이었다. 성경을 높이 쳐들고 영생은 당신의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믿는 자는 앞으로 걸어 나오라고 초청하였다. 그리고는 어느 교회든 출석하라고 권유하였다. 믿기로 작정한 자에게 강단으로 나오게 하는(altar call) 등 의사표시를 하게 한 것은 찰스 피니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런 방식은 빌리 그래함 집회에서도 그대로 전수 되었다. 무디는 회개를 촉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했다.
그밖에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삶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개인이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디 스스로 자신의 설교 주제를 ‘3가지 R’(three R’s), 곧 Ruin by Sin(죄로 인한 파멸), Redemption by Christ(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Regeneration by Holy Spirit(성령에 의한 중생)로 요약했다.
무디의 설교는 끊임없는 성경 묵상에서 얻은 영감에 기초하였고, 일상의 삶에서 체득한 자연스런 설교였다. 그의 설교는 간결하고 선명했다. 애매한 것이 없었고, 간절한 기도 운동과 많은 인원으로 구성된 찬양대가 영적 분위기를 이끌었다. 동시대의 영국 침례교 목사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은 6천 권의 청교도 관련 서적을 포함하여 2만5천 권의 장서를 가진 유식한 설교자였으나, 무디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의 수학이 교육의 전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어둠에서 일어나 ‘위선의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사람’(God’s man for the Gilded Age)으로 세워 주셨다. 그래서 그는 19세기 영미권의 위대한 부흥사가 되어 미국의 제3차 각성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하나님은 왜 무디를 쓰셨는가
무디는 1892년 공식적으로 은퇴했으나 그를 한가하게 살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여러 곳에서 그를 초청하였다. 수만 명이 운집한 1899년 11월의 캔자스시티 집회를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에 하차한 이후 무디는 약 한 달간의 투병 끝에 1899년 12월 22일 새벽, 62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무디가 1892년 은퇴한 이후에 채프만(John Wilbur Chapman, 1859~1918), 토레이(Reuben A. Torrey, 1856~1928) 같은 이들이 부흥사로 활동했으나 무디의 영향력에 미치지 못했다. 윌리엄 선데이(William Ashley Sunday, 1862~1935)는 야구 선수 출신이었는데,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야구계를 떠나 1891년 시카고 YMCA의 부총무가 되었고, 2년 후에는 채프만의 부흥팀에 가담했다. 다시 2년 후 채프만이 은퇴하면서 그의후계자가 되어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생시에 무디와 교제했던 R. A. 토레이는 《하나님은 왜 무디를 쓰셨는가》(Why God used D. L. Moody)라는 짧은 책을 썼다. 이 책에서 토레이는 그 이유를 일곱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무디는 절대 순종의 사람이었다. 둘째,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셋째, 깊이 있고 실제적인 성경 연구가였다. 넷째, 겸손한 사람이었다. 다섯째, 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섯째,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는 열정의 사람이었다. 일곱째,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충만을 받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런 특성이 평신도 설교자 무디를 위대한 부흥 운동가로 쓰신 것이다.
미국 제3차 각성 운동의 중심이 된 무디의 영향력
무디의 부흥 혹은 각성 운동과 관련하여 두 가지 역사적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집회였다. 1882년 케임브리지대학의 기독학생연합회(CICCU)는 무디를 초청하였다. 케임브리지대학 채플에서 무디를 초청한다는 것은 권위와 명예를 자랑으로 여기는 영국대학의 전통으로 볼 때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 일
은 당시 기독학생연합회 회장이자 대학 크리켓팀의 주장 선수이기도 했던 스터드(J. E. Kynaston Studd, 1858~1944)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러나 무디는 학자도 아니며,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무학자라는 이유에서 교수와 학생들은 무디 집회를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스터드는 이는 부당한 이유라고 여기고 이 일을 추진하여 결국 집회를 성사시켰다. 1882년 11월에 집회가 시작됐을 때 많은 이들이 마음을 열지 않고 집회를 비웃었다. 그러나 마지막 날 강퍅했던 지성인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교만을 통회하는 등 전대미문의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이 집회에서 많은 이들이 회심하거나 변화된 삶을 경험했지만, 특히 ‘케임브리지의 7인’(The Cambridge Seven)으로 알려진 일곱 학생이 자신의 전 생애를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작정한 일은 충격적이었다. 이 일곱 사람은 보챔(Montagu Beauchamp), 카슬(William W. Cassels), 호스트(Dixon Edward Hoste), 폴힐 터너(A. T. Polhill-Turner), 폴힐 터너(C. H. Polhill-Turner), 스미스(Stanley P. Smith), 그리고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였다. 이들은 모두 우수한 학생들이었고 부유한 가문의 자식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보장과 미래를 포기하고 중국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미국에서 일어난 학생 자원 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1886년 여름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 있는 헬몬산 수양관에서 개최된 헬몬산 집회(1886)는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 자원 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이 운동의 발전 과정에는 프린스톤대학 졸업생이었던 로버트 와일더(Robert P. Wilder)의 선교 비전, 코넬대학 학생이었던 존모트(John R. Mott)의 조직력과 함께 위대한 전도자 무디의 영적 감화력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때 100여 명의 학생들이 “본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합니다”(I purpose, God willing, to become a foreign missionary)라는 이른바 ‘프린스턴 서약’(Princeton Pledge)에 서
명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미국에서 학생 선교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집회는 4주간 계속되었는데, 하루 3차례의 공식적인 모임을 가졌다. 아침 8시부터 시작하는 토론회, 아침 10시부터의 말씀 집회, 그 후에는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주로 무디가 이 시간을 이끌어 갔다. 이 수련회에서 무디는 큰 영향을 끼쳤고, 결국 “우리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이라는 구호로 시작된 학생 자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미국 전역과 캐나다, 호주 등 세계 각국의 선교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운동을 통해 그 이후 50여 년간 10만여 명의 선교 헌신자를 배출했고, 2만 5백여 명의 학생들이 해외 선교지로 파송되었다.
정리하면, 미국에서의 3차 각성 운동의 결과로 교회는 생명력과 열정을, 그리고 회심자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부흥 운동 연구가인 에드윈 오르(J. Edwin Orr)는 3차 각성 운동을 통해 약 1백만 명의 회심자를 얻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