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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작성일 2022-02-15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1541 
언론사 국민일보 
기자  

4대 이은 믿음의 가정서 신앙 단련… 어릴 적엔 교회 청소 도맡아

오정호 목사의 진국 목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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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가야초등학교에 다니던 오정호(가운데) 목사와 형 오정현(왼쪽) 목사, 동생 오정일 집사 형제.

 

수년 전 남미 페루를 방문해 잉카문명의 현장인 마추픽추를 등정했다. 난생처음 해발 3000m 위에 있는 호텔에서 1박을 했다. 다음 날 습관대로 새벽에 눈을 떴는데 그날이 마침 생일이었다.

나의 지나온 삶을 회상했다. 주님께서 내려주신 복을 헤아려보니 12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믿음의 부모를 만나 4대째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난 복이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 가운데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경과 교회, 신앙생활을 중시하며 성경적인 가치로 교육·훈련받고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귀한 부모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걸 생각하니 감사와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나는 1957년 5월 24일 경북 의성에서 부친 오상진 목사님과 모친 최명순 사모님 밑에서 네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기독교 신앙의 4대째였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증조모님으로부터 시작된 신앙의 세대 계승은 조부님과 부모님을 이어 내게도 임했다. 단순히 세대 계승이 된 것이 아니라 나의 아들 대까지 목회자가 나왔기 때문에 3대 목사 가문의 복을 이루게 됐다. 족보에 올려진 내 이름은 국희(國熙)였다. 태어났을 때 부친은 총회신학원 57회로 신학교를 다니고 계셨다.

교회는 경북 의성 삼분교회였다. 1905년 설립된 오래된 교회였다. 의성은 안동 근처였기에 유교와 불교의 영향력이 컸다. 동네는 도로포장이 안 돼 먼지가 펄펄 날리곤 했다. 어린 시절 꽃과 새들, 숲을 보며 뛰어놀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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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앞줄 오른쪽 번째), 오정호(앞줄 오른쪽 번째) 목사 형제가 1967 5 부산중앙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부산노회 주일학교연합회 성경고시대회에서 수상자들과 함께했다.

 

부친은 내가 6살 때 신학교 동기들과 부산 가야제일교회를 개척했다. 첫째 형(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과 부친이 먼저 부산으로 향했다. 뒤늦게 그곳에 가보니 미신이 난무하는 달동네였다. 화장실이 없어서 6세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그런 곳이었다. 동네 아래쪽에 철길이 있었는데, 화물 열차가 지나가면 시루떡처럼 보였다. “야, 저기 시루떡 열차가 지나간다.”

몇 년 후 부친은 주도적으로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다. 교회 재정이 부족하다 보니 아버지는 혜광고등학교 교목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사택은 교회 옆에 있었다. 우리 4형제는 서로 부딪히며 그 좁은 방에서 살았다. 얼마나 추웠는지 한겨울 내복 바람으로 얼른 밖에 나갔다가 다시 이불에 들어가면 한기가 상대적으로 덜했던 기억이 난다.

형님과 나는 번갈아 가며 수요일 저녁 예배와 주일 예배, 저녁 예배 종을 쳤다. 철필로 주보를 쓰고 가리방(등사판)으로 인쇄했다. 교회 청소는 4형제의 몫이었다. 아침부터 교회 앞마당을 쓸고 예배당 내부를 청소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교회는 양철 지붕이었다. 동네 장난꾸러기들이 교회에 돌을 던지면 ‘또르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예배를 드릴 때 여름엔 무척 덥고 겨울엔 무척 추웠던 기억이 난다.

남들은 형님과 나의 체구를 보고 가정 형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친이 키가 컸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것이지 쌀이 없어 죽을 쒀먹기 일쑤였다. 하루는 가야초등학교 선생님이 “죽 먹고 온 사람 손들어”라고 하는데 나 혼자 손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 조금이라도 생계를 돕기 위해 스웨터를 떴다. 동네 아줌마들이 일감을 가져오면 몇 벌을 맡아서 얼마를 받곤 했다.

우리 형제가 행복했던 것은 가정에서 물질적 가치보다 영적 유산, 믿음의 가치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부친은 성경 읽기를 강조했다. 매일 성경 3장을 읽고 주일은 5장을 읽었다.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때 어르신들은 사람을 찾으러 꼭 교회를 찾곤 했다. 낯선 손님이 찾아와 동네 사람을 찾을 때는 나의 태도가 아버지 목회에 직결된다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친절하게 안내했다. “거참, 그 목사님 집 둘째 아들은 친절하고 싹싹하네.”
 

우리 4형제는 형제 우애를 강조했던 부모님 말씀에 따라 남다른 형제애를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혹시라도 다투는 날이면 회초리를 드셨다. 부친의 신앙교육 중 독특한 점이 있다면 주말마다 반성문을 쓰게 했다는 것이다.

반성문에는 잘못된 점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일주일 삶을 반성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썼다. 지금 와서 보니 시간을 뒤돌아보고 앞으로 주님 안에서 거룩함으로 한 주를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끔 지도하는 탁월한 교육 방법이었다.

그때의 글쓰기 습관은 훗날 설교문이나 목회 칼럼을 쓰는 기초 실력이 됐다. 반복되는 반성문 쓰기를 통해 나는 신전사상(神前思想), 즉 코람데오(Coram Deo)의 정신을 소유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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