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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작성일 2022-03-29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7938 
언론사 국민일보 
기자  
내수동교회 라브리공동체.jpg
오정호(앞줄 왼쪽 세 번째) 대전 새로남교회 목사가 1980년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 시절 마련했던 신앙훈련 생활공동체 라브리 1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옥한흠 목사님이 사랑의교회를 담임하실 때 부교역자 생활을 했다. 제자양육의 열매가 왕성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미국 유학의 청운까지 품게 됐다. 그 원동력은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인 ‘증인들’에 있다.

청년 시절 형님(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과 함께 제자양육의 실제를 경험했다는 것은 평생의 축복이다. 그것은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갔다. 형님과 나는 단순히 혈육의 형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영적 동지이기도 했다.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하신다. 성경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를 볼 때, 같은 형제지간이라도 쓰임 받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깨닫는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도 형제 사이면서 복음의 영광을 깊이 체험한 동역자였다.

총신대생으로 자취와 기숙사 생활을 청산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라브리’ 공동체였다. 1979년 부친께서 서울의 허름한 아파트 한쪽을 힘겹게 마련해주셨는데, 우리는 그곳을 라브리(L’abri)라고 명명했다. 당시는 한국교회에 라브리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라브리란 이름은 피난처(shelter)라고도 불렀다. 프랜시스 쉐퍼 박사의 라브리 운동에서 따온 것이었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회원들은 교회 아래쪽에 있는 생명의말씀사를 자주 드나들면서 쉐퍼 박사의 저서를 읽으며 안목을 키웠다.

특히 쉐퍼 박사의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와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등을 탐독했다. 라브리 공동체를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라브리는 말이 아파트였지 실제론 서민 아파트 7층 꼭대기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승강기도 없는 서민 아파트에 7명 남짓의 형제들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땀을 흘리며 오르락내리락하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라브리는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공동생활의 현장으로 식사 준비와 빨래, 청소 등 모든 살림을 분담했다. 그곳에서 정규선(한양대) 이상진(국방대) 교수, 이성주 박성규(부산 부전교회) 화종부(남서울교회) 목사 등과 지냈다.

라브리에는 많은 이들이 자주 들렀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송태근 서울 삼일교회 목사다. “형님들, 제가 왔습니다.” “어서 와. 태근아.” ‘복음과상황’ 편집장을 지낸 서재석, 황원선(백석대) 조현직(연변과기대) 유건호(경희대) 조창현(중앙대) 교수, 홍종일 내수동교회 장로 등도 라브리를 찾았다.

우리가 얼마나 그 공동체를 사랑했는지 역사학자로서 쉐퍼 박사의 라브리를 직접 경험했던 홍치모 교수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까지 했다.

라브리를 시작한 그해 내수동교회 대학부 회장으로 섬길 차례가 됐다. “제가 회장이 되면 우선 회장이라는 이름부터 내려놓겠습니다. 대신 ‘행정국장’으로 여러분을 철저하게 섬기겠습니다.” 아마도 한국교회 내 젊은이 부서에서 ‘행정국장’이란 타이틀은 최초였을 것이다.

사역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위해 행정국과 더불어 ‘5국 1사(행정국 서무국 재무국 선교국 은혜국 주보사) 체제를 확립했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사역에도 적용한 것이다. 서로 격려하며 동역자 의식을 고취했다.

흥미로운 점은 내수동교회 대학부 출신 목회자들이 자신의 목회 현장에서 하나같이 젊은이 부흥을 기대하며 열정적으로 사역에 임했다는 것이다. 나도 옥 목사님이 담임하시던 사랑의교회에서도 대학부의 기초를 놓았다. 훗날 새로남교회에 부임하던 시기에도 기성세대와의 갈등으로 사분오열되었던 대학생들을 다시 교회로 이끌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그 결과 지금은 2개의 대학부서와 4개의 청년부서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이것은 단순히 구호가 아닌 실전이었다. “여러분, 젊은 날에 은혜를 받으면 평생 지속되는 남다른 축복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제가 내수동교회에서 직접 경험했던 영적 원리입니다.”

대학부를 이끌면서 대학생 선교단체 리더들을 자연스럽게 만났다. 그리고 대학생 선교 운동, 선교 자원화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교회와 선교단체는 반드시 동지적 자세로 서로를 도와야 한다.’

민족 복음화를 주도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영성과 지성의 균형을 추구한 한국기독학생회(IVF), 철저한 제자도의 실천과 성경 암송으로 소문난 네비게이토, 복음의 영광과 기쁨을 추구한 죠이선교회, 젊은이에게 선교적 마인드를 심어준 예수전도단(YWAM), 그리고 교단 젊은이 운동의 중심이었던 학생신앙운동(SFC) 등 목회 현장에서 다양한 선교단체 출신 대학생과 함께하며 사역의 지경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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