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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작성일 2022-02-22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cp=nv 
언론사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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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학생 시절 고물 주워 건축헌금… ‘교회 사랑’ 몸으로 익혀

 

| 오정호 목사의 진국 목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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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호(왼쪽) 대전 새로남교회 목사가 1974년 부산 가야제일교회 종탑 앞에서 중고등부 학생들과 사진을 촬영했다.

 


아버지가 1961년 전도사로 부임한 부산 가야제일교회는 초라하게 시작된 개척교회였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해서 68년 매입한 198㎡(59평) 부지에 예배당을 건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목회자 가정인 우리 집에서 예배당 건축에 발 벗고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합판으로 헌금통을 만드셨다. 전면에 우리 4형제 이름을 기록했다. 때때로 어른들이 사택을 방문하고 과자 사 먹으라고 건네준 용돈이 건축헌금 1순위가 됐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함께 고철을 주워 고물상에 팔아 건축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액수는 적었지만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을 몸으로 익힌 것이다.

주일 저녁이나 수요일 저녁 예배 후에는 아래쪽 도롯가에 있는 모래와 자갈, 벽돌을 들고 지고 직접 옮겼다. 그때는 우리 교회, 우리 예배당 짓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학교 다녀와서 시간이 날 때마다 고철을 줍고 건축 자재를 몸으로 옮겼다.

67년 부산 가야초등학교 4학년일 때 큰 형(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은 6학년이었다. 우리 형제는 둘 다 학교에서 반장으로 뽑혔다. 형제 반장은 드문 일이었다. 그 당시 북부산교회에서 발행되는 ‘어린양’이라는 미니 잡지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가을 운동회를 앞두고 어느 날 선생님이 부르셨다. “오정호, 어서 와라. 이번 일요일에 매스 게임을 연습해야 한다. 반장인 네가 아이들을 잘 이끌어 주면 좋겠다.” 나는 순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왜냐하면, 다른 일은 몰라도 주일 성수는 생명과 같았다. ‘주일을 범하는 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만약 부모님으로부터 예배 중심의 삶, 우선순위가 먼저 세워져 있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의 지시를 어떻게 거역할 수 있었을까. 나는 정중하게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의 신앙 양심으로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 때문에 운동회가 방해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못마땅해 하셨다. 하지만 내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후일 생각하니 신앙 양심이나 원칙을 양보하면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우습게 된다는 사실을 덤으로 깨닫게 됐다.

지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주일학교 예배시간에 꼼짝않고 정숙하게 예배드린 아이에게 지급된 쿠폰이다. 쿠폰엔 가야제일교회의 이름이 한 글자씩 쓰여 있었다. 여섯 글자가 모두 모이면 공책이나 연필, 크레파스를 상품으로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교회 바닥은 마룻바닥이나 시멘트 바닥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으면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온몸이 저렸다. 부활절이 되면 권사님이나 여집사님들이 흰옷을 입고 새벽에 나와 예배드렸던 기억도 난다. 교회 아래 방치된 묘가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 부활절 찬양을 불렀던 기억도 있다.

69년 섣달그믐 송구영신예배 때 일이었던 것 같다. 주일학교 아이들까지 제법 참여했다. 예배가 진행되고 한 해를 반성하는 기도가 시작되었다. 자정을 넘어 이어지는 기도를 하다 보니 많은 이들이 비몽사몽 상태가 됐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회개와 결단의 기도를 했다. 비록 어리지만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것과 주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모습을 탄식했다.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소리 높여 간절하게 기도드렸다. 이후 교회 어른들은 지나가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다.

교회에서 은혜의 맛을 경험하고 중학교 졸업을 앞둔 72년 겨울이었다. 당시 그 지역에서 소문난 경남 김해 무척산기도원을 친구와 함께 올랐다. 저녁 집회에 참석하기 전 숙소에 장작을 많이 넣어 군불을 땠다.

집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연기가 자욱했다. “큰일 났다.” 아랫목이 식지 않도록 덮어 놓았던 캐시밀론 이불이 열에 녹아 장판에 떡하니 달라붙었다. 이불과 장판은 아예 못쓰게 됐다. 어떻게 수습할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기도원 원장님께 사실대로 말했다. “중학생들이 기도하러 온 게 대견스럽구나. 책임은 묻지 않겠다. 앞으로도 기도 열심히 하거라.” 그렇게 청소년 시기를 지나면서 무척산 기도원을 자주 찾아갔다. 어릴 때 은혜를 사모하는 경험은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나는 확신한다. 나이가 들면 자동으로 철이 드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받아야 철이 든다. 은혜에 대한 각성이 인생을 견고하게 세운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내 목회의 많은 부분은 어릴 때 형성된 성경관, 교회관을 바탕으로 한다. 신앙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모양과 적용은 가변적이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는 아날로그를 건너뛴 채 디지털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정호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2568&code=23111211&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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