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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작성일 2022-03-15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cp=du 
언론사 국민일보 
기자  

내수동교회 대학부 ‘증인들’ 만남 통해 역동적 믿음 생활 재발견

 

| 오정호 목사의 진국 목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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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7월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가 옥한흠(가운데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 착용) 목사를 초청해 경기도 송추에서

개최한 하기수련회 기념 사진. 오정현(맨 앞줄 왼쪽) 사랑의교회 목사, 오정호(맨 앞줄 오른쪽 메가폰 잡은 이)

로남교회 목사 등 대학부 회원들이 참석했다.
 

 

1976년 봄바람이 불 때 서울 총신대학의 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그 배지가 결코 예비 목회자로서 소명을 불타오르게 하지는 못했다. 장학생 선발시험으로 입학한 것은 은혜였지만, 자동으로 신앙 성숙의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이러한 갈등은 진로에 대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휴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다른 데 있었다. 신학교 교육과정 연단과는 별개로 공동체를 예비하신 것이다. 그 공동체가 바로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 ‘증인들’이었다. 증인들과의 만남은 믿음 생활의 즐거움과 역동성을 재발견하게 했다.

당시 형님(오정현 서울 사랑의교회 목사)과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 서울 종로구 내자동 꼭대기에 허름한 방을 얻어 자취했다. 형님이 연탄불에 밥을 지으면 나는 풍로에 국을 끓였다. 자취 생활을 통해 반찬을 만들고 상을 차리는 눈썰미가 생겼다.

77년 봄학기에 복학하고 기숙사 배정이 되면서 형님과 따로 떨어져 생활하게 됐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신학도의 허약한 몸을 보충한다는 핑계로 이웃 방 선후배를 끌어들여 통닭 내기 카드놀이를 했다.

어느 순간 양심의 소리가 왔다. ‘이것은 결코 제자의 모습이 아니다.’ 결단을 하고 신학교 기숙사 앞마당에서 카드 화형식을 했다. 모르긴 몰라도 기숙사 선배들은 ‘정호가 커서 뭐가 될꼬’하며 속으로 장탄식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목회하는 동안 교우의 한때 모습만을 가지고 절대 평가하지 않는 계기가 됐다.

내 인생의 ‘AD’와 ‘BC’를 가져온 때는 77년 5월 24일 늦봄이었다. 아지랑이가 극성을 부릴 때 나는 홀로 총신대학의 뒷동산을 거닐며 주님과 대화를 나눴다.

“사랑의 주님, 저의 열 손가락 가운데 아홉 손가락은 주님을 향하여 미련 없이 폈습니다. 이제 애지중지하는 마지막 손가락 하나를 폅니다. 지금부터 주님께서 저의 인생의 핸들을 붙잡으시고 친히 인도하옵소서. 저는 오직 주님과 복음만 따르는 주의 종으로 쓰임 받고 싶습니다.”

이렇게 나를 향하신 주님의 마스터 플랜을 신뢰하며 자기 부인을 하는데, 순간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도 그 순간은 잊을 수 없다. 동산의 수많은 나무는 잎을 흔들며 나를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감미로운 봄바람은 영혼의 먼지를 털어내 주었다. 하늘의 태양은 영혼의 어두운 구석을 저 멀리 쫓아내 주었다. 그때 느낀 것이 영혼의 참 자유였다.

마지막 접고 있던 고집스러운 자아의 손가락을 펼 때 누리는 심신의 자유함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하는 신비한 것이었다.

쉽지 않은 학문 연구, 불편한 교육 환경, 학비까지 걱정해야 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내수동교회는 전통적인 대학 청년부의 모습을 탈피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겨우내 매화가 봄을 맞을 채비를 하듯 청년 부흥을 향한 영적 분위기가 싹트던 때였다. 마치 누군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일이 터져버릴 것 같은 상황이 전개됐다. 바로 그 기회가 두 번의 수련회였다.

77년 강원도 황지 예수원 분원에서 여름 수련회를 열었다. 이듬해인 78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주제로 경기도 송추에서 열린 여름수련회는 내수동교회 대학부 부흥의 계기가 됐다. 강사는 서울 성도교회에서 대학생 부흥을 견인하다가 미국 칼빈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3년간 평신도 신학을 연구하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옥한흠 목사님이었다.

옥 목사님을 초청한 분은 내수동교회 담임목사님이셨던 박희천 목사님이었다. 박 목사님은 60년대 웨스트민스터에서 유학하신 학교 선배였다. 송추 수련회에선 성령의 불이 떨어졌다. 청년들은 감격 속에 ‘빈들에 마른 풀 같이’를 불렸다. “빈 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이 약속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그때부터 대학부 안에 새 생명의 은총이 충만했다. 마음속에 생명이 꿈틀대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은혜를 받자 대학생 전도 집회인 ‘생명 교제 기쁨의 날’을 준비했다. 캠퍼스의 젊은 영혼을 강력하게 흔들어 주님께로 사로잡아오는 초청 잔치였다.

참다운 영성은 내 영혼이 살고 다른 영혼에 대한 애타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총신대 신학도이면서 내수동교회 대학부 멤버라는 사실은 형언할 수 없는 감사의 제목이었다. 나뿐 아니다. 그 당시 함께했던 오정현 김남준(열린교회) 화종부(남서울교회) 박성규(부전교회) 목사 등은 예외 없이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대학부 집회의 마무리는 항상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땅끝까지, 이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 “오직 한 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하리라.” 내 인생의 반려자를 만난 것은 내수동교회의 부흥을 경험하고 감격하고 있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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