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기사작성일  
원본링크  
언론사  
기자  
"제자훈련 아니었으면, 공중분해 됐을 겁니다"

대전ㆍ충청 지역 CAL-Net 팀장으로 섬기는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는 요즘 주변 사람들로부터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약 7년 간에 걸쳐 진행된 약300억 원 규모의 새로남교회 새 성전을 완공하고, 지난 6월 입당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2,000여 명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가 이렇게 웅장한 성전 건축을 해냈다는 사실을 가지고 "대단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남교회에 부임한 지 10년 만에 이처럼 엄청난 일을 이뤄낸 오정호 목사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주목한다. 그러나 새로남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지난 10년 동안 오정호 목사가 흘려야 했던 눈물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눈가가 붉어지는 오정호 목사. 교회 내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제와 사건 속에서도 그가 묵묵히 목회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목회 철학을 이해하고 묵묵히 따라와 준 평신도 동역자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10년 간의 터다지기에 성공하고, 이제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 재도약하고 있는 대전 새로남교회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공개한다.


교회는 분열되면 안 된다
오정호 목사가 처음 새로남교회를 소개받은 것은, 그가 7년 간 사랑의교회 부목사로 섬긴 사랑의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옥한흠 목사로부터였다. 당시 오 목사는 사랑의교회의 사역을 마치고, 사랑의교회의 장학금으로 시작된 2년 간의 미국 유학 과정이 끝나는 시기였다. 동시에 풀러신학대학원 박사과정 공부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국내 사역을 위해 오 목사가 당장 대전으로 와야만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미국의 모 신학교에서 강의도 하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가족들도 미국 생활에 나름대로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옥 목사를 통해 담임목사직의 권유와 함께 새로남교회를 알게 됐던 것이다. 오 목사는 "처음에는 전혀 생각지 않았으나, 옥한흠 목사님의 진지한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력서도 제출하고 면접도 봤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나 나중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새로남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라고 듣게 되었고, 오 목사가 대전으로 가는 것을 말리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정작 새로남교회를 소개했던 옥 목사도 나중에 새로남교회의 상황을 알고서는 오 목사에게 미안하다며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가지 마라"고 까지 했었다.
사실 당시 새로남교회의 상황은 심각했다. 오 목사가 부임하기까지 새로남교회는 7개월 동안이나 담임목사를 찾고 있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담임목사를 결정할 수 없었다. 장로들 사이에 패가 갈리어 한쪽이 지지하는 목사는 다른 한쪽에서 반대하는 등 담임목사 후보가 거론될 때마다 매번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좋은 목사를 모시기 원했던 청빙위원 장로들은 옥한흠 목사에게 제자훈련을 잘 할 수 있는 목회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오 목사가 사랑의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을 때, 옥한흠 목사가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교회"라며 말했던 교회가 바로 새로남교회와 같이 "장로들이 두 패로 갈려서 서로 싸우는 교회"였다고 한다. "사랑의교회에서 있을 때, 옥 목사님이 종종 '장로들끼리 싸우는 교회는 가지 마라. 다른 건 다 해결해도 장로들끼리 싸우는 건 해결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옥 목사님께서 저를 그런 교회로 보내신 셈이죠. 사실 옥 목사님께서 제게 새로남교회를 소개하실 때까지만 해도 새로남교회가 그런 교회인지를 모르셨던 거지요."
하지만 오 목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대전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목사님, 목사님이 안 오시면 저희 교회는 이제 갈라지게 됩니다." 청빙을 담당했던 장로가 던진 이 말은 대전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던 오정호 목사와 조성희 사모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들었다. '교회가 갈라지게 놔두면 안 되지' 하는 마음과 새로남교회 성도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오 목사 부부의 심령을 붙잡았던 것이다. 오 목사 부부는 "양떼가 불쌍하다면, 네가 가라"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고, 결국 모든 짐을 싸서 태평양을 건너오게 되었다.
그렇게 부임한 새로남교회의 상황은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세 패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세 패란 전임 목사를 그리워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그리고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오 목사의 눈에 비쳐진 그들은 지도자를 잃었다는 영적 박탈감과 서울로 떠나버린 담임목사에 의해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에 빠진 모습이었다. 심지어 노회조차 새로남교회를 '사고 교회'로 인식할 정도였다. 그래서 오 목사에 대한 청빙 및 위임투표에서 2/3 이상이 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노회는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다가 떠날지 모르는데 어떻게 위임을 인정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오 목사는 이듬해 위임투표를 한 번 더 실시해 더 나은 형편에서 정식으로 위임목사가 될 수 있었다.

두 번의 위기가 찾아오다
어려울 것이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쳐 본 상황은 너무나 암담한 것이었다. 오 목사 부부는 부임한 후 2, 3년 간 심적 고통의 연속이었다. 오 목사는 강대상 앞에서, 사모는 본당 뒤에서 두 부부가 눈물로 철야하며 기도하기가 여러 날이었다. 기도하지 않고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줄지어 터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 목사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새로남교회를 떠나 서울의 큰 교회로 부임해 갔던 전임 목사가 다시 대전으로, 교회를 개척하러 내려온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전임 목사는 한번은 부교역자를 내려보내는 개척방법을 썼고 나중에는 자신이 직접 내려와서 자신을 지지하던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카리스마적으로 목회하면서 새로남교회 성도들에게 많은 인정을 받았던 전임 목사의 개척에 많은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를 회고해보면, 오목사 자신도 큰 충격과 아픔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그 목회자의 움직임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겠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감정의 동요를 자제할 수 있었고, 더욱 하나님앞에 무릎 꿇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새로남교회는 이미 오정호 목사를 통해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시기였다.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들어왔고, 교회도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소박하고 털털한 오정호 목사의 성격에 새로남교회 성도들이 쉽게 적응하면서 서로 정도 많이 들었던 때였다. 그래서 전임 목사를 그리워하던 성도들조차 오 목사와 전임 목사 사이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를 놓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어떤 이들은 "가서 따지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 목사는 정반대의 방법을 택했다. 오히려 전임 목사가 개척한 교회를 위해 개척 헌금을 드리게 했다. 그리고 전임 목사가 개척한 교회에 가고 싶은 성도들은 부담 갖지 말고 가라고 했다. 성도들이 두 목사 사이에서 갈등하며 상처받는 것보다는 어느 목사 밑에서든 신앙 생활만 잘하면 그게 더 낫다는 것이 오 목사의 심정이었다. 어차피 마음이 떠난 사람은 돌이킬 수 없고, 그렇다면 축복하며 떠나보내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상황에서 따지고 든다 한들 오 목사와 새로남교회에게 유익 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오 목사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떠났다. 장로들도 두 명이나 갔다. 오 목사는 교회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오 목사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신비주의에 빠져 1년이 넘게 사사건건 오 목사에게 시비를 걸고 목회에 협조하지 않는 장로도 있었다. 그들은 주일 낮 예배를 마치면 따로 모여 자기들만의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제자훈련에 대한 비판적인 말을 쏟아냈다. 오 목사가 당회에서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자고 하면, 꼭 뒷소리를 하는 장로들도 있었다고 한다. 성도들조차 신비주의에 빠진 그 장로를 치리하지 않는 오 목사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 목사는 묵묵히 참았다. 참고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품어 주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장로가 주일 예배를 참석하지 않았다.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친척집에 갔다"고만 했다. 그런데 10일쯤 지나서 그 장로가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갑작스럽게 죽은 것이다. 주일 예배를 빠진 것은 친척집에 갔기 때문이 아니라 아파서 누워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 소식을 오 목사가 들었을 때는 이미 그 장로가 죽고 난 뒤였다. "죽은 장로가 부활할 것"이라는 신비주의자의 말을 믿고 유족들이 쉬쉬하며 죽은 사실을 알리기를 미뤘던 것이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가족들은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게 되자 급기야 교회로 연락하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성도들의 마음은 안정되어 갔다.

훈련받은 133명이 함께 사역한다
사실 오 목사는 청빙 때부터 "제자훈련 할 목사"라는 조건을 달고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언제부터 제자훈련을 할 것인가에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오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제자훈련을 시작하지 않고, 1년 동안 준비 과정을 거쳤다. 비록 교회는 제자훈련 할 목사를 청빙했지만, 그 당시 새로남교회는 제자훈련을 할 만한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각종 예배 때마다 제자훈련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성도들에게 제자훈련을 통해 변화될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 꿈꾸게 했다.
1년 간의 준비 기간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에는 제자훈련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하지만 장로들은 달랐다. 훈련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들이 제자훈련을 하는 이유는 단지 '담임목사가 하자고 하니까'라는 식이었다. 숙제도 안 해 오고 일부러 늦게 오기도 했다. 세 번 결석하면 탈락시킨다는 말에 두 번 결석하고 "한 번만 더 결석하면 탈락이죠?"라고 말하는 장로도 있었다. 오 목사가 강하게 제자훈련에 대해 압박하면, 결석해서 차라리 탈락하겠다는 일종의 경고였던 것이다.
장로들은 서로 간의 적개심도 풀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장로는 오 목사에게 "누구누구 장로가 하는 말은 절대로 믿지 마세요"라는 말까지 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변화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자훈련을 통해 자신의 신앙 인격과 삶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오 목사는 그런 장로들을 원칙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제자훈련의 원칙이 뭔지를 잘 알고 있었고, 일부러 그 원칙을 깨려고 작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오 목사는 '패가 갈리고 분열된, 찢어진 교회에 부임한 목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의 안정을 되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에 집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제자훈련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자신들에게 모든 것을 솔직히 보여 준 오정호 목사 부부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 목사 부부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주었다. 두 번의 큰 위기 가운데에도 오 목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제자훈련 잘 받은 장로와 집사들이 중심을 잡고, 오 목사의 곁에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든든한 동역자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목사가 '영적 물갈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떠난 장로들 대부분 훈련을 받지 않거나 중도하차한 사람, 제자훈련을 받긴 했지만, 제자훈련에 대해 전혀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제자훈련을 해 봤자 자신의 삶과 신앙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훈련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새로남교회의 중직자로 계속 남아 있는 한 새로남교회는 결코 새롭게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제쳐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목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셨다는 것이 오 목사의 해석이다.
장로들이 떠났다고 해서 새로남교회가 무너질 일은 없었다. 새로남교회에는 떠난 장로들을 대신해 오 목사의 힘이 되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몇 번의 큰 위기를 거치면서 8명이던 장로님들은 이민, 이사, 전임목사의 교회로 옮겨가는 등 다 떠나고 지금은 한 분만 남았습니다. 또 부임 당시에 있던 교인들은 5%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제자훈련을 할 수 있도록 자연적으로 물갈이를 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10년 동안 교회는 성인출석 2,00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장로님은 단 한 분이셨어요. 이걸 보고 어떤 사람은 '독재를 한다'는 말도 하더군요. 사실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자마자 교회 건축을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직분자를 세울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전 당회원의 숫자와 교회 성장과 성숙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제 옆에는 저와 함께 제자훈련을 통해 삶을 나눈 133명의 신실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133명의 평신도 지도자들과 매주일 함께 기도하고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논의합니다. 교회 건축이 시작된 2002년부터는 건축사역팀과 300번도 넘게 함께 모여 기도하고 의논했습니다. 결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과정의 축복도 함께 경험한 것이지요."

신뢰, 흔들리지 않는 성장을 보장한다
사실 새로남교회는 오 목사가 부임하면서부터 새롭게 변화하고 있었다. 침체된 예배가 살아나고 새신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 목사 부임 전에 교회가 가지고 있던 1억여 원의 빚도 부임 1년 만에 다 갚았고, 오히려 성도들이 점점 늘어나서 주차장 부지를 구입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뭔가 새롭게 시작해 보려는 시기에 터졌던 그 위기들은 교회가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남교회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교회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담임목사가 중심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회 밖에서는 새로남교회가 이런 여러 가지 갈등을 겪고 있는 것조차 잘 몰랐을 정도라고 한다. 오 목사는 전임목사의 교회개척으로 힘들었지만, 축복하며 격려하는 마음을 보여 줬다. 자신의 목회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오히려 사이비 신비주의에 빠진 장로에 대해서도 1년 이상 참고 사랑으로 기다려 줬다. 쉽게 생각하면 강단에서 한 번쯤 이런 상황에 대해 비판하거나 소위 '치는 설교'를 할 수도 있었건만, 오 목사는 "하나님께서 다 아시겠지"하는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초지일관하였다.
이 모든 상황을 다 지켜 본 어떤 집사는 성전입당 후,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우리 목사님과 사모님에 대해 칭찬을 하자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를 정도예요. 하지만 그 중에 최고를 고르라면, 목사님께서 처음 우리 교회에 부임하신 지 2, 3년 동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성도들에게 내색 한번 안 하시고 꿋꿋하게 참고 이겨내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감동했다는 거예요."
오 목사 부부가 성도들로부터 받은 신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게 증명된 사건이 있었다. 바로 '투서 사건'이었다.
<기독신문>에 오 목사에 대한 투서가 들어왔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독신문>에 대전 시내 모든 교회에 오 목사가 교회 공금 수 천만 원을 횡령했다는 내용의 투서를 뿌린 것이다. 사실 투서의 내용은 모두 음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투서를 받은 신문사조차 그 내용을 기사화하지 않았다. 문제는 새로남교회 성도들이었다. 만약 성도들 안에 담임목회자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이런 의혹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거나 혹은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문제를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사편에 서서 믿어 주었다.
더구나 이 사실을 먼저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은 오 목사 자신이었다. 당회에서 논의한 후에 제직회 때 온 교인들에게 투서의 내용을 스크린을 통해 보여 주었다. 그 이후 아무도 더 이상 투서의 내용을 가지고 문제삼지 않았다. 성도들의 마음에는 이미 오 목사 부부에 대한 굳은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런 투서 사건이 대전 시내 온 동네에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새신자들이 매주 물밀 듯이 밀려와 교회 등록을 했다는 점이다. 온갖 루머와 사건들 속에서도 새로남교회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그만큼 건강해졌다는 증거인 셈이다.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잡으라
새로남교회가 위치한 지역은 대덕연구단지와 대전정부청사 바로 옆의 아파트 단지이다. 이런 지역적 환경 때문에 새로남교회의 교인 중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고학력자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고학력자들이 많은 교회를 목회하는 오 목사를 부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 목사는 "고학력을 가진 성도들이 많다는 것은 잘못하면 목회에 독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고학력자들은 본질적으로 지적인 부분에 민감한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교회가 성도들의 한쪽(지성)만 키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훈련 목회를 지향하는 교회에서는 이것저것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새로남교회에도 '크로스웨이 성경대학', '큐티학교', '기독교 세미나' 등 성도들이 다양하게 배울 수 있는 여러 가지 양육과정들이 있다. 따라서 오정호 목사가 제자훈련 목회 철학을 가지고 새로남교회를 담임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힘을 쏟은 부분이 바로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잡는 일이었다. 우선 제자훈련이 지성 일변도로 흐르지 않도록 조절했다. 오 목사는 제자훈련에 있어서 지성과 영성이 균형을 잡으려면 배운 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 그것은 개인의 삶에서나 교회 공동체적으로나 동일하게 나타나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제자훈련 시간은 무언가를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무엇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가를 배우는 것도 중요했다. 그래서 삶의 문제와 교재의 내용을 균형있게 다루었다. 여자 제자반을 인도하는 조성희 사모는 이렇게 말한다.
"저 같은 경우, 평상시에 만나면 엄마처럼 언니처럼 성도들을 대합니다. 그러나 일단 제자훈련에 들어온 훈련생에 대해서는 시어머니처럼 시시콜콜 간섭을 합니다. '이것은 했느냐', '그건 왜 그렇게 했느냐', '다음엔 어떻게 할거냐' 이렇게 삶에 대해 터치해 줌으로써 삶에 대한 그들의 가치가 깨지도록 만듭니다. 남성들은 분명한 인식에서부터 변화가 비롯되는데 반해, 여성들은 가치관이 깨져야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 목사가 전 교회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기도'이다. 제자훈련을 하는 교회일수록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특히 새벽기도에 대해서는 거의 절대적이다. 오 목사 자신부터 자정이 넘도록 제자훈련을 한 다음날에도, 새벽 예배 강단은 어김없이 지키려고 힘쓴다. 사실 오 목사는 천부적으로 체력을 타고난 목회자라고 많은 성도가 말한다. 그러나 제자훈련 목회에 대한 그의 사명감이 그를 더욱 강건하게 했다. 그래서 새로남교회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도 온 힘을 다해 기도와 목회 사역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 목사는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의 고비 때마다 견딜 수 있는 은혜와 건강으로 붙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하며 눈시울을 잠시 붉히기도 했다. 겉으로 내색을 안 했을 뿐이지 오 목사 자신도 인간인지라 많이 힘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강조하는 오 목사의 목회 철학은 그가 훈련시킨 평신도 지도자들에 의해 소그룹 전체로 확산된다. 사실 새로남교회 순장들은 매우 바쁘다. 남자순장들의 경우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아서, 시간빼기가 쉽지 않은 이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일 오후 2시에 모여 대략 한시간 반에서 두 시간씩 순장훈련을 받는데, 이 시간은 소그룹에서 가르칠 내용을 배우는 것뿐 아니라 영적 재충전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이처럼 훈련된 소그룹 지도자들은 소그룹 원들에게 신앙과 삶의 모델이 됨으로써 교회와 담임목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즉, 신앙과 삶에 있어서 교회가 요구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순장들의 모습을 통해 제시하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비전과 꿈을 제시하라
2,000여명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가 지금의 새로남교회처럼 거대한 성전을 짓는다고 하면 대부분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들을 한다. 재벌 한 명 없이 성도들 대부분이 중산층인 교회에서 이렇듯 최 현대식 대형성전을 짓는 데는 가히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새로남교회가 그 무모한 일을 실제로 이루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부러움을 감추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성도들로 하여금 그 엄청난 일에 동의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한 것이다.
사실 오 목사는 성전 건축에 있어 오히려 성도들을 말리는 편에 서 있었다. 좀더 쉽게 표현한다면, 오 목사는 무리하지 말자고 하고 성도들은 오히려 더 크게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었다. 새 성전의 경우에도 원래 설계에는 6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성도들이 '기왕 짓는 거, 아예 제대로 짓자'며 10층짜리로 설계를 변경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덕분에 성전 건축과 관련해서는 새로남교회에서 오 목사가 "가장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핀잔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오 목사는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면서까지 건축을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일을 시작하게 하신 주님의 뜻대로만 하면 그 결과는 주님께서 책임지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견지하였다.
그런 이유로 성전이 완공되기까지는 7년이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땅 사는 데만 4년이 걸렸다. 그렇다고 몇 만 평씩 되는 땅을 산 것도 아니다. 전부 합해서 1,650평이었다. 땅을 사 놓고 울타리만 친 뒤 아무런 건물도 짓지 않은 채 그냥 지낸 시간도 3년이나 됐다. 지역주민들을 위하여 주차장으로 내놓는 때도 있었다. 분명히 '새로남교회 새 성전 건축터'라는 간판은 보이는데, 하도 오랫동안 건물을 짓지 않자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저 교회 망한 것 같다'는 음해성 소문도 들렸다고 한다.
건축을 완공하느라 은행에서 적지 않은 돈을 융자받았다. 오 목사는 도대체 이 엄청난 금액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걱정하지만 성도들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그 돈을 다 갚기 전에 주님이 오시면 더 좋고, 형편이 되면 천천히 갚으면 된다는 식이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얼마 안 가서 그 돈 다 갚을 테니, 두고 보라"며 자신만만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여느 교회처럼 성전을 건축한다고 집을 팔거나 은행에 저당 잡히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남교회 성도들 중에는 성전 건축 기간 중에 더 좋은 집을 사서 이사 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이 이렇게 자신감 있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해답을 한 사역훈련생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5년 전에 새로남교회에 등록했다는 강경찬 집사. 그는 한 마디로 "한창 건축 이야기가 나올 무렵"에 새로남교회에 등록한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성전 건축을 준비중이거나 진행하는 교회에는 새신자들이 등록하려 들지 않는 법인데, 강 집사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새로남교회에 등록했을까?
"직장 때문에 대전으로 내려온 뒤 대전 시내 교회만 10군데를 넘게 다녔습니다. 하지만 어떤 교회는 비전이 없고, 어떤 교회는 예배가 죽어 있고, 어떤 교회는 빚이 너무 많고…. 그러던 중 아는 분이 새로남교회를 소개해 줬습니다. 그렇게 찾은 새로남교회에서 드린 첫 예배는 그전에 다닌 교회들과는 뭔가 달랐습니다."
변리사라는 직업 때문에 시간 단위로 돈을 번다는 강 집사. 그러나 그는 교회 일에 대해서만은 결코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오히려 난생 처음으로 건축 헌금까지 작정했다. "교회에서 큰 돈을 빌린다고 했을 때, 이상하게도 '내가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때는 아직 제자훈련도 받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전 건축이 교회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에 다니던 교회의 20억 원 빚이 부담스러워 떠났던 제가, 그렇게 많은 빚을 오히려 내 일처럼 여기게 되었으니, 저도 참 신기했습니다."
그렇다면 강 집사가 새로남교회를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런 변화를 보인 것일까? "제 나이 지금 쉰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앞으로의 제 인생에 대해 꿈을 꿉니다.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새로남교회에서 오정호 목사님을 통해 얻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목회자입니다. 제자훈련을 통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꿈꾸게 하고, 앞으로 작은 예수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비전을 갖게 만듭니다. 인생의 마감을 준비해야 할 나이에 오히려 새로운 꿈과 비전을 갖게 하는 교회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감당하고 싶은 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교회가 비전을 말한다. 그러나 그 비전이 구체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목사가 제시하는 비전이 성도들의 비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강 집사의 입을 통해 목회자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목사 입으로 성전 건축을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성도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이 성도 개인의 비전이 되도록 만들어 주면 성도들은 알아서 교회의 비전을 같이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알아서 헌신한다.

중부권 제자훈련 사역에 헌신하겠다
올해 들어 새로남교회를 취재하고 싶다는 교계 언론사들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2,000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이렇듯 커다란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일 게다. 사실 그동안 소개된 신문 기사를 보면 이처럼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을 들어 오 목사를 성공한 목회자라고 소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오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외부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보이는 무엇을 가지고 그것이 제 영혼의 무게인 양, 사역의 열매인 양 생각할까 걱정됩니다. 전 새로 지은 성전이 저의 목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것들은 분명 화려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건물로서의 예배당은 본질이 아니라 껍데기입니다. 큰 규모의 예배당을 지어 놓고 마치 자기는 목회에 최선을 다한 양 생각하는 목회자가 될까 두렵습니다."
그가 평소 목회에 대해 격언처럼 여기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영적 아버지이자 멘토인 옥한흠 목사가 해 준 말이다. "깊이 있는 목회를 하면, 넓이는 자연적으로 따라온다."
지난 10년 간 새로남교회를 담임하면서 오정호 목사는 이 말을 한번도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화려하고 유행을 좇아가는 것보다 깊이 있는, 기초가 튼튼한 목회를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오정호 목사가 10년의 사역을 통해 얻은 진정한 열매는 커다란 교회 건물이 아니라, 그 일을 가능하게 한 평신도 동역자들이다. 그렇기에 오 목사 부부는 지금도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로남교회로 부르실 때 가졌던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실 때 가고, 멈추라고 하실 때 멈춘다"는 원칙이다. 교회 건축을 끝내고 나니, 남들은 이제 뭔가 거창한 일을 해 보라고 권유하지만 오 목사 부부의 마음은 복음성가의 제목대로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는 마음을 굳힐 뿐이다. 그의 호가 복주심(復主心: 주님마음으로 돌아가라)인 것 역시 목회자로서의 그의 목회관의 반영이다. 오목사는 가능하면 하나님께서 그 동안 새로남교회에 부어 주신 축복에 보답하며, 대전 지역에 예수의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길 희망하는 것이다.

"제자훈련 아니었으면 공중분해됐을 교회인데, 10년 간 하나님께서 이렇게 큰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정말 새로남교회야말로 제자훈련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영향력을 목회현장에서 실감한 교회입니다."
현재 오정호 목사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소망은 대전 충청 지역 내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새로남교회가 경험한 동일한 은혜를 공유했으면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오 목사는 제자훈련 목회를 꿈꾸는 목회자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면서 제자훈련 목회 철학을 나눌 계획이다. 그가 가진 단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그건 새로남교회가 중부권을 대표하는 제자훈련 모델 교회가 되어 다른 교회들을 섬김으로써 대전 지역의 건강한 복음화를 일궈 나가는 것이다.
올 11월이면 새로남교회에 부임한 지 만 10년이 되는 오정호 목사. 그가 받은 응답이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난 10년 간의 역사를 비추어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오 목사와 새로남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가실 일들에 대해서도 기대를 갖게 된다. 이미 오 목사와 교우들은 "새로남 비전 프로젝트 2014"를 선포하고 시행중이다. 이는 새로남교회가 미래지향적이며 사역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고 전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수많은 예수의 제자들을 대전 지역에 배출해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새로남교회의 앞날을 주목해 본다.                <박순종 목사>

<조성희 사모 인터뷰>

제자훈련 목회자 사모의 두 가지 역할

오정호 목사가 지난 10년간 갖은 풍파 속에서도 새로남교회의 담임목사로서의 위치를 굳게 지킬 수 있었던 데는 아내 조성희 사모의 힘이 컸다. 오정호 목사는 조 사모가 여자 제자훈련을 담당함으로써 "목회에 대한 공감대와 사역의 공유가 가능해졌고 결국 그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힘들었던 순간마다 남편의 짐을 함께 나누어지면서 목회의 동역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조성희 사모로부터 '제자훈련 목회자 사모의 역할'에 대해 들어보았다.

"사모는 목사의 제 1 야당이 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교회의 상황에서 사모는 남편인 담임목사의 편에서 서 있고, 또 서 있어야 한다. 사실 그런 관계는 비단 사모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성도들은 담임목사를 지지하고 협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조성희 사모의 이 말은 좀 의외다. 무슨 뜻일까?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쓰는 본질적인 사명이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삶을 공유하는 관계성을 배제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목회는 종합예술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요. 많은 성도들의 다양한 필요를 파악하고, 함께 세워나가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연약함과 부족함을 안고 있는 목회자이기에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죠.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성향이 달라서나 경험이 달라서 그리고 서로를 제대로 몰라서 오해하거나, 상함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모는 일방적으로 목사 편에서만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인 목회자의 부족한 부분이 목회의 걸림이 되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하며, 동시에 교인들의 마음을 잘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이것은 사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목회자뿐만 아니라 사모 역시 교회가 점점 성장하면서 교회 밖에서 해야 할 일들이 밀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연합과 나눔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도 있지만, 자칫 목회자의 힘을 본질에 쏟기보다는 교회 밖으로 분산시켜, 정작 목양지는 메말라 가는 현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성도들은 공허해 하며, 마음에 쌓인 것들이 어는 순간에는 집을 허무는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사모가 바로 이때 제1 야당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목회자가 바쁜 가운데서도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남편인 목회자에게 진실을 말해 주는 사람은 사모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조 사모는 뒤에서 오 목사가 시선을 항상 교회와 양들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조언하는 제1 야당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언제나 오 목사와 교회를 위해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조언하는 역할을 잊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회정책에 나서서 관여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설 자리를 분명하게 아는 조 사모는 상처받은 교인들과 교회의 앞날에 유익이 되는 일에만 야당지기 역할을 자처할 뿐이다. 그렇기에 새로남교회가 10년을 거치는 동안 그 많은 문제들이 터져도 든든히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모도 은사대로 사역하는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사모에게 교회 앞에 나서지 않고 베일 뒤에 숨어서 기도로 동역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조성희 사모는 현대 목회에서 더 이상 사모가 베일 뒤에 숨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오늘날 전문적인 은사를 가진 사모들이 참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왠만한 목회자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경우도 많죠. 그런데 전통적인 한국교회에서는 그런 사모의 은사는 그대로 사장됩니다. 이것은 교회로 볼 때 엄청난 인적 자원의 낭비이지요. 특히 제자훈련하는 교회일수록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역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제자훈련에 있어서 사모는 여자 성도들을 훈련하는데 어쩌면 남자인 목사보다 훨씬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목회자 스스로 사모들의 그런 은사를 인정하려는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조성희 사모는 오정호 목사와 함께 사랑의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한 경험을 갖고 있다. 아마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남편과 아내가 한 교회의 부교역자로 섬긴 경우일 것이다. 조 사모가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하던 모습을 잘 아는 사랑의교회 부교역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조 사모는 가르치는데 은사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조 사모는 이런 은사를 가지고 새로남교회에서는 1기부터 제자훈련을 실시했다. 제자훈련을 인도하면서 조 사모는 오 목사가 감당하고 있는 목회적 부담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조 사모는 이렇게 말한다.
"목회자들이 사모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잘되고 목회철학이 공유되면 한마디로 천군만마를 얻는 격입니다. 그런데 목사님들 스스로 이 기회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사모님들이 가장 많이 걸리는 질병 가운데 하나가 우울증이라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이죠."
조성희 사모에게서 우리는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누구에게나 조 사모가 했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모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동역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모를 동역자로 만드느냐, 아니면 아내로만 있게 하느냐 그것은 목회자의 판단에 달린 일이다.

(박순종 목사 / 국제제자훈련원)

로그인 없이 좋아요 추천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