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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따라간 눈물의 발자국

- 김혜선 사모(진도 동구교회)



2009년 9월, 한 선교회를 통하여 농어촌교회 사모님들이 미국 서부 쪽으로 여행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나님의 은혜로 난생처음 외국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국행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내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야 말았다. 힘들고 아팠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보상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느낌이랄까?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저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사랑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울고 웃고 하는 모든 것들이 과연 천국에 갈 때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내가 아버지 앞에 가서 내놓을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잘난 나도 못난 나도 다 아버지의 것이며 내 모든 삶의 여정 또한 그분의 손길이자 작품인 것을 믿지 않는다면, 때론 교만할 것이고 아니면 좌절감 속에서 헤매며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라는 욥기 23장 10절의 말씀을 되새겨보며 나를 만지시고, 고치시고, 회복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리라 다짐한다.

믿음의 시작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동네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한창 재미있게 교회생활에 적응해갈 즈음 성가대 오디션을 보았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맘에 상처가 되어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지만, 주님은 사랑의 손길로 미션스쿨인 중학교에 입학하게 하셨다. 나는 학교에서 성경을 읽고 맘껏 찬양 부르며 예배드릴 수 있어서 좋았다. 고등학교 때는 당고모부님께서 목회하시는 서대문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교회를 다녔는데, 믿음보다는 언니 오빠들이 잘해주는 것이 좋았고 무엇보다 성가대를 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그 후로 의정부의 한 개척교회에 반주자로 초빙받아 가게 되었는데 그곳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모른다. 처음엔 책임감으로 반주했던 마음도 차츰 목사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녹아내려 신앙이 성장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평일에는 피아노 출장 레슨을 하고 주일과 수요일, 토요일에는 주일학교 교사와 반주자로 섬기다보니 교회와 집이 가까우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결국 교회에서 가장 가깝게 사는 ‘사모’가 되었으니 생각해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친정 가족들도 모두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되어 천사 같은 성품의 친정어머니는 명예 권사님이 되셨고, 남동생도 목사가 되어 목회를 잘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내려주신 것 같아 너무 감사할 뿐이다.

섬으로의 부르심
7년 동안 반주자로 봉사하다가 친구가 사모로 있는 교회에 ‘가족 찬송가 경연대회’ 심사를 하러 갔다. 그때 함께 심사를 했던 전도사님과 인연이 되어 88년 10월에 결혼을 했다. 연년생으로 아들 둘을 낳고, 결혼 3년 만에 낙도 선교를 하겠다는 남편 말에 순종하여 91년 12월, 완도의 한 섬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우리가 섬으로 간다고 하자 부모님과 형제들, 또 전도사로 있던 교회 담임 목사님과 성도들 모두 충격을 받았고 만류하는 분도 많았다. “섬은 귀양 가던 곳이다. 감상에 빠져 사느냐? 현실을 모른다!”, “어떤 목사는 섬에서 사역하다가 병원이 없어 자식이 죽었다더라” 등등의 이야기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 두 돌 지난 큰아이와 6개월 된 작은 아이를 데리고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배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도시를 떠나 사는 것에 두려운 맘이 들었지만 ‘그래도 3년 정도는 견딜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깨끗한 섬이 우리 때문에 오염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빨랫비누 한 상자 와 아이들 먹일 장기보관용 우유, 각종 의약품을 잔뜩 사서 내려갔던 일이 엊그제만 같다.

배에서 내려 한참 들어가야 하는 그 마을은 참 아름다웠다. 작은 조약돌이 여러 가지 예쁜 색을 내고 있던 바닷가, 또 그곳의 아이들은 얼마나 예쁜지… 너무나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아이들 모습 그대로였다. 피아노를 생전 처음 봤다는 아이들에게 피아노와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카레라이스나 샐러드를 해주면 먹어보지 않던 거라 “이딴 걸 어떻게 먹는담?” 하며 뱉어내기도 했다. 사투리는 얼마나 심한지 사실 처음엔 대화가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몇 번을 되묻다가 미안해서 그냥 대충 알아들은 것처럼 아는 척을 한 적도 많았기에  어려운 사투리를 노트에 적어 연습하기도 했다.
또 섬에는 왜 그리 커다란 지네가 많던지, 처음엔 동네 아이들이 우리를 서울 사람이라 놀리려고 “지네에 물리면 죽는다” 해서 얼마나 겁을 먹고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정말 물리기도 했었는데 죽지는 않고 많이 아팠다. 하루는 잠을 자다 목사님이 물렸는데 어찌나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는지 깜짝 놀라 일어난 나는 “주님, 제가 안 물려서 감사합니다” 기도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성도 중에는 결핵환자들도 있었지만, 기도하며 어린 아들을 데리고 심방을 가거나, 목포 결핵병원에 입원시켜 드리고 약을 타다 드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 건강검진을 받던 중, 결핵을 앓았던 흔적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이 결핵에 걸린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알지 못하는 중에도 하나님께서 눈동자 같이 지켜주신 것이 너무 감사할 뿐이다.

새로운 곳을 향해
섬에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그곳에 간 지 3년쯤 되어 지하수를 파게 되었는데 여러 번 시도 끝에 기적같이 많은 양의 물이 나왔다. 그래서 살만하다고 했더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으셨는지 “살만하냐?” 하시며 새로운 임지로 우리를 옮기시고야 말았다.
섬 끝, 배 닿는 섬 앞쪽에 있는 그 교회는 전임자가 92년 10월 28일에 휴거한다고 물의를 일으켜 섬 전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일이 있던 교회였다. 그래서 다른 목회자가 가도 다 똑같은 사람이라며 고개를 돌리는 교회였다. 하지만 기도하며 마을 사람들과 만나고 애경사가 있으면 함께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기도하니, 서서히 아이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고 장애우, 노인, 학생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점차 부흥하게 되었다. 나는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며 그 돈으로 교회 공사도 하고, 아이들 양육과 목사님 학업 뒷바라지 등을 할 수 있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너무 감사했다.
배타고 육지에 나가는 일은 어쩌다 한 번이고, 서울 부모님을 뵈러 가는 일로 1, 2년에 한  번 정도 나갈 뿐이다. 맏딸이고 맏며느리지만 지금까지 명절에 한 번도 가족과 함께 한 적이 없고, 늘 교회를 지키며 명절에 고향 교회를 찾는 이들을 맞이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명절만 되면 “엄마, 왜 우리 집엔 친척들 안 와?”라는 질문을 참 많이 했었다. 어린 맘에도 마을이 시끌시끌하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게 무척이나 부러웠었나 보다. 주의 종이라고 묵묵히 기도로 뒷바라지해 주시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다.

교회가 어느 정도 부흥하게 되어 2층에 증축을 하기로 하였다. 힘든 중에도 건축헌금을 작정하고 성도들이 맘을 합하여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밤낮 쉼 없이 일하고, 기도하고, 공사인부들 밥해주며 어느 정도 공정이 진행되었을 때이다. 벽돌 다 쌓고 지붕공사하고 내부 미장 공사를 하는데 느닷없이 한 집사가 전화를 걸어 “누구 맘대로 미장을 하느냐?”라고 따진다. “성전 높이가 너무 낮네, 어쩌네!” 밑도 끝도 없이 말을 뱉어내고는 화를 내는 바람에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성도들을 선동하여 함께 불만을 토로하며 예배를 방해하고, 목사님 편에서 이야기하는 이들에게는 미혹의 영이 씌었다고 억지를 부리며 횡포를 부렸다. 건축업자를 세울 때도 “모 집사님의 남편을 전도할 겸 시키자” 해서 그리했는데도 “업자가 도둑놈이네, 어쩌네!” 하면서 난동을 부리니 견딜 수가 없었다.
난동을 부리던 사람들은 몇 년 전에 교회에 와서 “목사님, 장로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하며 교회에 들어온 집사 부부였다. 휴거로 얼룩지고 상처받았던 교회가 회복되고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녹아져서 열매 맺기 직전인데, 그렇게 사탄은 교묘히 사람 속에 들어와 주의 교회를 무섭게 시험하며 흔들었다. 아무리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몸부림을 쳐봐도 해결되지 않고 더욱더 혼돈 속에 빠져갔다. 너무 괴로워 “아버지, 살려 주세요” 울부짖으며 기도했다가 나중에는 “아버지 차라리 죽여주세요. 이곳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나갈 수는 없습니다” 하며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선배 목사에게 어려움을 내놓고 해결할 방법을 구하니 오히려 선배 목사는 성도들과 만나면서 우리를 몰아내고 자기가 교회로 들어와 해결하겠다고 했다.

모진 고통의 시간 속에서
결국, 우리가 10년 동안 눈물과 기도로 일궈온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오히려 우릴 위로해주고 눈물 흘리며 봉투를 놓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우릴 못 나가게 하려고 탄원서를 써서 마을 사람들이 다 도장을 찍어 총회에 올리려 해도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다. 같은 목회자에게도 상처를 받으니 그 상처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정말 방 하나 얻을 돈만 있다면 무엇을 해서라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 학교문제만 아니어도 기도원에 들어가 살고 싶을 정도로 육체와 영혼이 쇠잔했다. 하지만 교회를 나와 처음 내려갔던 교회로 가게 되었다. 차로 근 30분 정도의 거리였는데 아이들이 따라오고 학생과 청년들, 젊은 성도들도 그 교회에서 견딜 수 없어 우리를 따라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를 몰아내고 교회에 들어간 목사님조차 더 상황이 악화되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고, 우리는 8개월 만에 다시 그 교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욱더 악해져서 사람의 이성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였다. 이삿짐차가 들어가지 못하게 경운기로 길을 막고, 도끼를 들고 난동을 부리며 지하수 파이프들을 다 잘라버렸다. 교회 문을 경운기로 막고 가스통까지 올려놓고 위협하기도 하였다. 전화를 하거나 사택에 와서 욕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저들과 저들의 자녀들을 위해 그토록 기도해주었건만 어찌 이리 무섭게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그 와중에 사춘기였던 두 아들이 많은 상처를 받았고, 나도 우울증과 공황장애 증상이 생겨 고통을 받았다. 결국 육체적, 영적, 물질적 손해와 상처를 입고서 우리는 교회로 되돌아간 지 한 달여 만, 섬에 들어간 지 14년 만에 그 섬에서 나오게 되었다.
처음 낙도 선교를 시작할 때 다짐했던 마음과는 반대로 이렇게 철저히 실패하니 교회와 성도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마저 들어 정말 맘이 찢어지는 듯했다. 지금 이곳, 진도로 온 지 5년이 지났다. 처음엔 살 수 없을 것처럼 의욕도 없이 멍한 상태로 있으면서 떠나온 곳을 생각하면 가슴이 절절이 아프기만 했다. 그리고 문득문득 아직도 생각이 난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그렇게 심하게 교회를 흔들었던 사람들은 법정에서 재판까지 하더니 결국 이기지 못하고 나가게 되었고, 그때 한마음으로 움직였던 사람들도 다 흩어졌다. 우리 대신 부임했던 목회자도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회오리 같은 폭풍을 지난 것 같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연단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주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 교회는 여러 목회자를 거치며 차츰 안정을 찾고, 어려움을 함께했던 성도들도 각자 맡겨진 곳에서 충성되게 신앙생활하며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고 시편 기자가 이야기했듯이 고난이 당시에는 고통스럽고 끝나지 않을 두려움으로 다가왔지만, 그 일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고난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체험케 하신 것 같아 감사할 수밖에 없다. ‘행복해서 드리는 감사’가 아니고 ‘감사할 수 있으니 행복’이라는 말이 실감이 된다.
이곳에 오니 너무 열악한 환경이지만, 새 은혜 주시고 기적 같은 역사로 다시 살리시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남편은 복지 쪽으로 공부하여 앞으로의 사역을 준비하고 있고, 노인과 장애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나 역시 여러 활동을 하며 어르신들을 섬기고 달란트를 사용하여 봉사도 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

때와 기한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의 뜻 가운데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두며 하루하루 감사와 기쁨과 찬양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돌이켜보면 나만큼 주님께 사랑 많이 받고 주의 종들에게 사랑받은 자가 있나 할 정도로 큰 은혜를 받았다. 잠시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었지만, 언젠가 주님 부르실 그날에 “딸아,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보고 있었단다” 하시며 내 눈에서 눈물 닦아주실 그날이 올 거라는 걸 확실히 믿는다.
하늘 영광 버리시고 낮고 낮은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어려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심이 감사하다. 더욱 감사한 것은 두 아들이 잘 성장해 주었고, 작은아들은 그 어려움을 다 보고 상처를 받았지만 신학을 하여 목회자가 되기를 서원하였다. 아무리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고 막는 세력이 있어도 당신께서 택한 자는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실족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아버지이시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그분,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 소망을 주신 그분께서 가장 미천하고 부족한 나를 사모로 불러주셔서 귀한 자리에 있게 하시니 내 평생 감사로 그분을 찬송하리라 다짐한다.

글/김혜선 사모
김혜선 사모는 남편 박철수 목사(진도 동구교회 담임)와 함께 20년 동안 낙도 선교에 헌신하고 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며 피아노와 오카리나, 장구 등의 달란트를 사용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사모하며 사역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