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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자녀를 위한 미디어 다루기 1 - 권장희

2011.04.27 20:35

조회 수:1503 추천:2



보는 것을 통제해야 경건한 자녀를 얻는다

권장희 소장(놀이미디어교육센터)



보는 것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 가치관과 신앙이 결정


아이들이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는 것 중의 하나가 텔레비전을 켜는 것이다. 텔레비전은 거실에 놓여 있다. 거실은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라가는 가정생활의 중심지이다. 바로 그곳에 늘 보는 것이 존재한다. 엄마가 텔레비전을 끄고 책을 보라고 하면, 재미없다고 약간은 짜증을 내면서 옮겨가는 곳은 책상이다.
그곳에서 아이는 컴퓨터를 켠다. 책상은 아이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어떤 인생을 살게 될 것인지는 지금 책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면 아는 것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바로 그 책상 위에도 보는 것이 놓여 있다. 엄마는 아이에게 컴퓨터를 끄라고 한다. 엄마의 성화에 좀 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컴퓨터를 끈 아이는 핸드폰이나 닌텐도를 손에 들고 방구석에 앉아 또 보고 있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사람의 존재가치를 생각 곧 사고할 수 있는 것에서 발견하였다. 요즘 아이들은 엄마를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만 없어요. 나만 없어요!”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남들은 다 들여다보고 있는데, 보는 것이 자기만 없다는 것이다. 손바닥 위에 보는 것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정의 거실에서, 그리고 책상 위에서, 심지어는 손바닥 위에서조차 보고 있는 것은 아이들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 보는 것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 가치관과 신앙이 결정되고 있다.

교육방송의 <다큐프라임> ‘아이의 사생활 - 도덕성’이란 프로그램에서 흥미 있는 실험을 하였다. 7세 아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눈 뒤 서로 각각 다른 영상을 보여 주었다. 한가운데 커다란 인형이 놓여있는 동일한 방에 어른 한 사람이 들어간다. 그리고 인형을 사랑하고 쓰다듬는 행동의 영상, 인형을 때리고 공격하는 행동의 영상, 그리고 인형에게는 무관심한 행동의 영상을 각각 보여주었다. 영상을 본 후에 아이들을 영상에서 본 동일한 방에 차례로 들어가도록 해 보았다.
놀랍게도 인형을 공격하는 영상을 본 아이들 9명 중 7명이 그들이 본대로 인형을 공격하는 행동을 그대로 모방했다. 반면 인형에게 친절한 행동을 한 영상을 본 아이들 중에는 단 한명도 인형을 공격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7명 중 3명은 인형을 쓰다듬고, 껴안는 등 친절한 행동을 모방했다. 마지막으로 무관심한 행동의 영상을 본 아이들도 모두 공격 행동을 보이지 않았으며, 인형에게는 무관심한 채 자신들이 본대로 방안의 책이나 다른 물건에 관심을 보였다.

왜 어떤 아이들은 공격적인 행동을 하고, 어떤 아이들은 친절한 행동을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무관심한 행동을 했을까? 아이들이 방에 들어가 행동을 하기 전에 각각 본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무엇을 보는가에 의해 그들의 생각과 태도, 행동과 가치관 심지어는 그들의 미래까지도 결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폭력적인 말을 하거나, 다른 친구들에게 거칠게 대하고, 친구들을 밀거나 때리는 등의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그들을 나무라기 전에 그들이 평소에 무엇을 보며 살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보는 것을 통제하지 않으면서 아이가 좋은 성품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혜로운 부모는 아이의 성품이 바르기를 기대할 것이고, 그렇다면 아이들의 볼거리인 미디어 통제는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보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2-23)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평균 3시간 TV 앞에 앉는다. 일 년에 한 달 반에 해당한다. 그리고 평생 10년을 TV 앞에서 보내고 있다. 여기에 아무런 의식 없이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시간과 스마트폰이나 핸드폰 게임 시간까지 포함하면 인생의 절반 이상을 미디어 기기와 함께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단지 오락일 뿐이 아니고 우리 마음에 어두움이라는 생각의 집을 짓고 있는 시간들이다.
“우리 생각이 곧 우리 존재를 만든다.” 안타깝게도 이 금쪽같은 진리의 소리를 흘려듣는 부모들이 많다. 더군다나 그들은 정신 건강에 해로운 것들을 아무 생각 없이 섭취하도록 가정에서 자녀들을 허용하고 있다.

우리의 존재를 결정하는 생각은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각이고, 둘째는 내 생각이고, 셋째는 어둠의 영인 사단으로부터 오는 생각이다. 내 생각은 분별하여 철저히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고, 사단으로부터 오는 생각은 대적하여 물리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각이 내 마음을 지배하도록 할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공중의 권세인 전파를 이용하여 TV, 인터넷, 아이폰 같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또 정크푸드(쓰레기 음식)와 같은 신문이나 잡지 등 출판물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을 오염시킨다. 세상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조차도 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부터 오는 생각이 마음에 스며들고, 젖어들고, 엄습하여 마음(생각의 영역)을 지배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 어떤 종류의 생각이 머무는가가 나의 존재를 결정한다면 대중매체로부터 오는 사단의 생각들이 아이들의 생각과 결합되어 마음을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듯이 종교적 의식에 충실함으로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며, 거리낌 없이 육신의 생각과 사단이 주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향해 예수님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듯이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다는 뜻은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지 않고, 육신의 생각과 사단이 주는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는 종교적인 신앙상태를 말한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4-5)

사람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갈망이 점점 더해야 사람은 하나님이 좌정하시는 하나님의 보좌가 된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그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할 사람이 창조의 원형을 잃고 재미와 욕망과 쾌락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재미와 욕망과 쾌락을 더 사랑하여 매스미디어 앞에서 재미와 욕망과 쾌락이라는 ‘정크푸드’를 과식하면서 그들의 마음에 사단의 견고한 진을 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배고픔, 사랑을 더 추구하여 하나님의 보좌가 마음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의 영역에 미디어를 통해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밀어 넣는 생각들을 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앗아가고 그 자리에 재미와 욕망과 쾌락을 채우려는 악한 영의 궤계를 대적하며, 마음의 영역에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심장으로 충만하게 더 채워가는 삶이다.

교회는 다니는데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타오르지 않고 있다면 나도 모르게 사단에게 내어준, 그래서 나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파 놓은 함정이 바로 나의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고 그 터널을 빠져 나와야 할 것이다.

삶을 관리하는 비결은 곧 ‘생각’을 관리하는 것

“생각은 마음가짐이며 마음가짐은 행동이 되고 행동은 습관이 되기 때문에 삶을 관리하는 비결은 곧 ‘생각’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차지하려는 사단의 도구가 바로 미디어다. 이들을 통해 우리의 생각 속에 홍수처럼 흘러들어오는 메시지를 넋 놓고 놔두었다가는 우리 영혼을 손상시킬 것이 뻔하다. 이미지, 말, 소리, 음악처럼 우리 감각이 경험하는 것은 오래도록 우리의 생각 속에 머문다. 사악하고 해로운 메시지를 수신하면 그 여파는 꽤나 파괴적이다. 따라서 우리 마음을 더럽히며 들러붙어 있는 찌끼를 성령의 도움을 받아 말끔히 몰아내고 문빗장을 닫아 막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고 건강하며 생산적인 삶, 즉 종합적으로 양질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형상(마음)을 따라 창조하셨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 땅에 보내셨다.(요 10:10) 이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생각’을 주권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전하신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우리는 잡상인이나 무례하게 우리의 사생활을 간섭하는 불청객이 임의로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벽에 걸려 있는 외눈박이 괴물(케네스헤긴 목사는 TV를 이렇게 묘사했다)을 통해 수많은 장사꾼과 광고업자들을 집안에 들어오게 함은 물론이고 온갖 허접한 부류의 가치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생각에 흘러들어와 집을 짓도록 방치하고 있다.

인도의 한 정신병원에서는 환자가 퇴원해도 될 만큼 병이 나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주 재미있는 방법을 사용한다. 환자를 수돗가로 데리고 가, 수도꼭지 밑에 큰 물동이를 놓은 뒤 거기에 물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그 환자에게 숟가락을 준 다음, “물동이를 비우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수도꼭지를 잠근 후 물동이의 물을 퍼내는 환자도 있고, 수도꼭지는 내버려 둔 채 물만 퍼내는 환자도 있다. 그러면 병원에서는 수도꼭지를 잠근 환자들은 퇴원을 시키고, 물만 퍼내고 있는 환자들은 계속 병원에서 치료를 한다. 정신질환자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주어진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자녀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부모들이 갖고 있는 태도를 설명하는데 적절한 예화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을 먹는가에 의해 아이의 신체적인 건강이 결정되듯이 아이들이 무엇을 보는가에 의해 그들의 말과 태도, 행동, 가치관뿐만 아니라 그들의 미래가 결정되고 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말 2:15상)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찾아오셔서 ‘경건한 자손, 경건한 자녀, 경건한 후손, 경건한 다음 세대’를 얻기를 기대하신다. 마치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접근하셔서 열매를 기대하시면서 구하셨던 것처럼. 유감스럽게도 무화과나무는 잎은 무성하였으나 찾으시는 열매를 보여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 말라버렸다.
오늘 우리 가정, 우리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에게 우리는 경건한 자녀, 경건한 다음 세대를 열매로 내어드려야 한다. 이를 위해 가정이나 학교에서 자녀를 사랑하고, 그들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수도꼭지와 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디어, 곧 보는 것을 통제하여 어둠의 통로를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