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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설립의 사명자, 홍대실 권사

 

 

박창훈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항일의 역사 속에 나타난 예정의 섭리

한반도에 서구 열강의 간섭과 일본의 침략 의도가 노골화되던 1901년 10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금곡면에서 홍대실은 태어났다. 전통적으로 완고한 유교 집안이었지만, 아버지 홍석필은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었고, 어머니 정건백은 어진 분으로 홍대실은 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 가운데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대실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매사가 분명했으며 부지런하여 부모님을 잘 도왔다. 또한 영특하고 남을 돕는 의협심이 강해서 마을 어른들로부터 늘 칭찬을 들었다. 특히 어려운 형편에 있는 이들에 대해 늘 너그러운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동네 어른들의 소소한 일들뿐만 아니라 노인들의 밤길을 안내하는 일도 즐겨하였다.

대실이 청년으로 성장한 때는 바로 3·1운동이 발발한 시기였다. 일본의 강점에 의해서 조국의 모든 것을 빼앗긴 백성들이 비통한 삶을 살고 있을 때 그녀가 살던 지역에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3일, 평남 용강과 가까운 강서 사천에서 일제에 의한 학살사건이 일어났고, 그다음 날과 4월 2일은 정주에서 학살과 방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으며, 의주에서는 교회당이 불타는 등 피해가 계속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특히 교회가 앞장서는 것을 보면서 홍대실은 기독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졌으며, 고마운 마음을 갖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그녀는 “그 당시 3·1운동과 항일의 역사 속에서 점차 커가는 생의 귀착점에의 갈구는 끝내 나를 교회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섭리의 역사에 집행과정이었던 모양입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물질적 소망이 아닌 정신적 소망의 갈망

대실의 아버지는 같은 군에 살고 있던 장학섭이란 청년에게 대실을 결혼시켰는데, 이는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철저히 중매에 의한 만남이었다. 그는 늘 말이 없이 성실하였으며, 장래가 촉망받는 유능한 청년이었다. 대실은 남편과 함께하는 생업을 위해 기술을 배우고, 가게를 열었다. 대실 부부의 성실함은 그들이 하는 일마다 경제적 풍요의 결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물질적인 여유와 풍요를 누리기 시작하면서, 대실은 자신의 마음 한구석이 크게 비어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업이 인생 전부일 수 없다는 생각도 점점 커지게 되었다. 당시의 심리적인 상태를 대실은 이렇게 말한다. “육신을 위한 생업은 구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육신은 편했을지 모르나… 세상의 모든 일이 소망적인 것 같으나 실의와 허탈감에 빠지게 하여 자신을 괴롭히게 할 때 물질의 소망은 없고, 물질에서 오는 육신의 안위는 극히 적게 확신할 수 있었으니, 정신의 소망, 위로, 안일은 느껴볼 수 없었습니다.”

대실은 이러한 정신적인 소망과 위로를 찾는 과정에서 영원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교회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일었을 때 남편은 의외로 선뜻 허락해 주었고 대실이 25세가 되던 해, 입석장로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기에 대실은 교회에 출석을 하면서부터 놀라운 신앙의 성장을 이루었다. 예배에 적극 참여하여 말씀을 듣고, 성경공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게 되면서 그녀는 27살 때 세례를 받게 되었다. 세례를 받고 난 후, 대실은 더욱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생활에 박차를 가했다.

 

교회 설립 사명과 남편 전도

대실이 서른 살이 되던 1931년, 마가복음 16장 15절의 말씀인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깨닫고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교회 설립을 지원하였는데, 그 교회가 바로 성결교회(용강군 지운면 진지리)였다. 입석교회가 너무 멀기도 하였거니와 남편을 전도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대실의 교회 설립의 사명은 사랑하는 남편의 동의와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사실 남편을 전도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은혜롭지 않은 것이었다. 대실의 간절한 기도와 간구로 남편은 대실의 인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더군다나 200원의 헌금으로 40평의 교회를 건축하려는 아내의 뜻에 동의했다. 남편의 교회 출석과 함께 대실은 집사의 직분을 맡아 더욱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으며, 자신의 생업의 기반도 점점 견실해졌다.

 

신사참배 반대, 그리스도의 흔적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신사참배를 문화적인 행사로 치부하며 타협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홍대실 집사가 다니는 교회는 신사참배를 계속 반대하였고, 결국 1943년 5월 24일 폐쇄되면서 이에 따르지 않는 성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있었다. 이때 홍대실 집사도 검거되어 옥고와 고문을 당하였는데, 홍대실 집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떠올리며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에 참여한다는 생각으로 기꺼이 고문을 감당하였다.

옥고를 겪으면서 지켜낸 신앙의 인물인 홍대실 집사가 맞이한 1945년 해방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죽여야 하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6·25와 함께 홍대실 집사의 가족은 남하하여 부산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부산에서 홍대실 집사는 서울신학교(현재의 서울신학대학교)가 피난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임시로 세운 동래온천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회 회장을 맡았다. 이 교회에서 홍대실 집사는 전쟁 중의 온갖 어려운 일들을 맡아 솔선수범하며 봉사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교회개척과 목회자 교육을 위한 아낌없는 헌신

전쟁이 끝나자 홍대실 집사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다. 성결교회의 모교회인 중앙성결교회에 출석하면서 계속해서 봉사를 하였고, 1959년에 부인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홍대실 집사는 부인회를 통해 미자립 농촌교회,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성락원, 서울신학교 등을 지원하면서 성결교단 전체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고, 신생부인회 전국연합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성결교단은 연합단체에 대한 참여문제로 인하여 분열의 아픔을 겪게 되었는데, 홍대실 집사는 이때 중앙성결교회 담임목사였던 황성택 목사를 따라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참여에 동참하였다. 홍대실 집사는 교단의 목회자를 교육할 학교 부지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기꺼운 마음으로 종로구 행촌동(현재의 예성총회 본부건물)에 3층 교사 건축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감당하였고, 이후 교사 증축도 계속해서 도왔다.

1964년 중앙성결교회(당시 예성측)는 홍대실 집사를 초대 권사로 추대하였는데, 홍대실 집사는 부족한 자신을 권사로 세우신 하나님께 뜨거운 눈물을 쏟으면서 남은 생애를 주님의 영광과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살기로 다짐했다. 성결교신학교는 발전을 거듭하여 수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성장하여 새로운 학교 부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홍대실 권사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안양시 안양동의 땅을 학교 교지로 기증하여, 성결교신학교(현재의 성결대학교)가 현재의 캠퍼스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홍대실 권사는 성결교신학교의 첫 여성 이사장으로 임무를 맡으면서 목회자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일에 말년의 봉사를 집중하였다.

학교뿐만 아니라, 성결교단에서 강릉교회, 온양교회, 묵호교회, 속초교회, 백은교회, 고길리교회, 대전성결교회 등을 개척할 때 재정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헌신은 남편의 전적인 동의와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홍대실 권사는 그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교회 공동체가 주님께서 원하신 일이며, 이를 위해 목회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이 두 가지 일을 위해 평생 최선을 다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한 진정한 헌신

홍대실 권사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폭넓은 헌신과 기부를,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항상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철저한 내핍과 인색한 모습을 보여서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일에는 너그럽고 관대하게 자신의 것을 내놓았던 그녀의 모습은 성결교회의 큰 모범으로 남아 있다. 홍대실 권사는 일 년 내내 같은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검소하였다. 매해 봄이 되면 병아리 200~300여 마리를 사서 키우면서 닭이 되어 알을 낳으면 이 달걀을 가까운 목회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때로 지방의 목회자들을 만나면 닭을 판 돈으로 식사와 교통비를 제공하며, 늘 기도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주님의 지상명령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아낌없는 헌신의 모습을 생각할 때, 쓰고 남은 것에도 인색한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홍대실 권사는 진정한 헌신이란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다. 늘 한결같이 회색 저고리에 밤색 치마를 입고, 신던 고무신도 꿰매어 신을 정도로 자신에게는 혹독하게 냉정했던 그녀가 보여준 헌신적 삶은 희생, 내려놓음, 포기, 양보라는 말이 퇴색해 가는 요즈음 더욱 눈부신 삶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글/박창훈 교수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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