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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 - 박명수

2011.08.14 14:44

조회 수:3108 추천:1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수잔나 웨슬리
우리나라의 전통 속에는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것이 있다. 여성은 일평생 세 남자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의 여성들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말이다. 여성은 누구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서는 부모에 의해, 젊어서는 남편에 의해, 늙어서는 자녀에 의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결정된다는 것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어려서 부모를 잘 만나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젊어서 결혼을 잘해서 행복한 사람이 있고, 늙어서 자식을 잘 두어 행복한 사람이 있다.

그러면 수잔나 웨슬리는 어떤 사람일까? 수잔나 웨슬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은 그의 아들 존 웨슬리 때문이다. 수잔나는 존 웨슬리를 믿음으로 키웠고, 그 결과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했으며, 오늘의 감리교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만 입이 내게 있으면”이라는 찬송을 지은 찰스 웨슬리도 수잔나의 아들이다. 사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요, 결혼을 잘하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식을 잘 교육시키는 것은 그래도 우리가 노력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수잔나의 출생과 결혼
수잔나는 원래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수잔나의 할아버지는 영국의 자작이었고 큰아버지는 귀족이었다. 수잔나의 아버지 사무엘 앤슬리가 4살 때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사무엘 앤슬리는 14세에 옥스퍼드에 입학하였고, 1644년에 안수를 받은 후 청교도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청교도란 영국국교회가 타락했다고 생각하여 새롭게 교회를 갱신하고자 하여 생긴 운동이다. 하지만 1660년 왕정복고 시대가 되어 청교도가 박해를 받을 때 사무엘은 성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 덕분에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는 대신 오히려 어려움을 겪는 많은 청교도들을 도울 수 있었다. 그 결과 사무엘은 청교도의 대부라고 불렸다. 수잔나의 외가도 철저한 청교도 가문이었다. 그의 외조부는 당시 영국교회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으로 유명했다.

수잔나는 25명의 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가 12살이었을 때에 친구의 결혼식장에 갔다가 거기서 후에 감리교의 창시자가 된 존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터 7년 후에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면 사무엘 웨슬리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무엘의 가문도 철저한 청교도 집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귀족은 아니었고 젠트리 계층이라고 불리는 신사계급이었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였고 청교도 설교자였으며,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에도 가담하였다. 하지만 왕정복고 후에는 교직에서 추방되어 돌체스터라는 곳에서 비밀리에 목회를 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사무엘이 8살 때의 일이었다.

이런 사무엘이 1682년에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청교도신앙을 버리고 영국국교회로 전향하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은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국교회 신자가 되어야 했다. 1683년 사무엘은 결국그가 원하던 옥스퍼드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사무엘은 청교도 신앙을 가지고 국교회에 들어가서 국교회를 갱신하고자 하는 열망도 있었다. 바로 그때 사무엘은 수잔나를 만나게 되었고, 수잔나를 국교회로 전향하도록 하였다. 비록 두 사람이 다 국교회 신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들에게 청교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수잔나의 부부생활
사무엘은 1688년 성직자가 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수잔나와 결혼하였다. 1697년에 이들은 엡윗교구를 담임하는 목회자가 되었다. 엡윗은 인구가 약 1,500명인 농촌으로 사무엘은 이곳에서 평생 목회하였다. 이들 부부는 21년 동안 1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에 11명은 조기에 사망하고 말았다.

수잔나의 결혼생활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였다. 엡윗교구는 사무엘에게 연봉 160파운드를 주었고, 1724년 이후에는 옆 교구의 보좌사제를 맡아 40파운드를 더 받았다. 부족한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구는 이들에게 3에이커의 땅을 주어 경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가난은 이들 부부를 항상 부채에 시달리도록 만들었다. 1705년에 사무엘은 부채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사실 채무가 엄청나게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지역의 비국교도들은 국교회 성직자를 괴롭히기 위해서 고소하였고 결국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요크의 대주교에게 이 문제를 호소해서 결국은 정부의 도움으로 채무를 갚게 되었다. 하지만 채무는 이들 부부에게 평생의 짐이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자신의 소원은 죽기 전에 빚을 다 갚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잔나 부부는 종종 의견이 갈라졌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이것이 심각한 상태로 발전할 때가 있었다. 17세기말 영국은 제임스 2세의 친 가톨릭 정책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영국이 가톨릭으로 복귀한다면 이것은 영국에서 또 다른 사회적인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위기를 의식한 국교회는 청교도들과 손을 잡고 왕을 몰아내고 제임스 1세의 딸인 메리와 그녀의 남편이자 오렌지의 공작인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추대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사무엘은 가정 기도회에서 왕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런데 아내가“아멘”을 하지 않았다. 남편은 이유를 물었다. 진정한 왕은 제임스 2세라고 생각한 아내는 윌리엄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사무엘은“그렇다면 우리는 헤어져야 해. 만약 우리에게 두 명의 왕이 있다면 우리는 두 개의 침대를 가져야 할 것이야.”라고 말하고 출장을 핑계로 런던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가까스로 사무엘이 집으로 돌아왔고 화해는 하였지만, 이 사건은 이들 부부가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존 웨슬리는 이들 부부가 다시 재결합한 다음에 출생하였다. 존 웨슬리는 부부의 화해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수잔나와 사무엘은 서로 개성이 매우 강했다. 이런 부부들 사이에는 마찰이 있게 마련이다. 수잔나는 언젠가 아들 존 웨슬리에게“네 아버지와 내가 서로 비슷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 가정의 특유한 불행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사무엘은 연구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에 능통하였고, 욥기 주석을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서는 매우 무능하였다. 이에 비해서 수잔나는 매우 실제적인 사람이었으며 남편의 부족을 자신이 채워 나갔다.

수잔나의 자녀교육
존 웨슬리는 어머니를 존경했다. 수잔나는 훌륭한 교육자였을 뿐만 아니라 좋은 조언자였고, 경건한 신자였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존 웨슬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웨슬리는 종종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했다. 1732년 웨슬리는 고아원을 만들 계획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자녀교육에 대해 자문을 구했고, 여기에 대해서 수잔나는 자신의 자녀교육 방법을 정리해서 웨슬리에게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처음 3개월 동안은 주로 잠을 잘 것이며, 그 다음에도 가능한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요람에서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재워야 한다. 한 살이 되었을 때는 매를 무서워하게 하여야 한다. 아울러서 마음대로 울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가능한 아이가 없는 집처럼 조용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느 정도 성숙한 다음에는 하루에 세 끼의 밥을 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식탁 옆에 작은 테이블을 마련하여 어른들이 식사하는 것을 보도록 해야 하며, 어느 정도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함께 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식사는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어른들이 제공하는 것만 먹도록 해야 한다. 식사 사이의 간식은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훈련을 통해서 절제를 배워야 한다.

수잔나는 청교도의 후예로서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의지이며 여기에서 모든 죄악이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신앙교육은 자기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특별히 의지를 복종하는 과정 가운데 부모에 대한 순종을 배우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어려서 아직 습관이 형성되기 전에 자기 의지를 꺾고 부모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알려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잔나는 자녀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우선 주기도문을 가르치라고 했다. 주기도문을 배우면 그 다음에 부모를 위한 기도, 교리문답, 간단한 성경구절을 차례대로 암송하도록 했다. 아울러서 안식일과 다른 날을 구분하는 법과 가족 기도시간에 조용히 앉아 있는 법, 식사 기도 하는 법을 알려 주되, 설혹 내용을 알지 못해도 사인(sign)을 통하여 기도시간임을 가르치도록 했다. 말하는 습관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자녀로 하여금 떼를 쓰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원하는 것은 예의 바르게 요청하도록 했다. 아무리 낮은 하녀에게라도 정중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는 형제, 자매라는 호칭과 함께 부르도록 했다.
수잔나는 자녀들이 벌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때로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존 웨슬리에게 자녀교육을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 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것을 약속하면 벌을 주지 말아야 한다.
둘째, 잘못된 행동을 혼내지 않고 통과되도록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셋째, 한 가지 잘못된 행실을 가지고 두 번 혼내서는 안 된다.
넷째, 순종의 좋은 행동은 반드시 칭찬을 받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자녀들이 좋은 목적으로 행동했다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칭찬받아야 한다.
여섯째, 예의 바른 행동을 가르쳐야 하며, 특별히 다른 사람의 물건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일곱째, 약속은 분명하게 지켜져야 한다.
여덟째, 여자들에게 일을 가르치기 전에 반드시 글을 읽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수잔나의 목회활동
수잔나는 자녀교육만 잘했던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존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할 때 아들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 운동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평신도 설교자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자문을 구했고, 수잔나는 평신도 설교자를 허용해도 좋을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사실 18세기만 해도 여성들이 교회 사역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기존의 교회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신앙적인 소그룹이 필요했고, 사무엘 웨슬리도 이런 그룹을 만들려고 생각했다. 특별히 사무엘은 신자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서 소그룹을 통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였다. 사무엘은 실제로 이런 모임을 만들어서 운영했고 1701년에는 20명 정도가 모였다.
이와 같은 소그룹이 수잔나에 의해서 활발해지게 되었다. 1712년 사무엘이 대주교구의 일로 장기간 교회를 비우게 되었을 때 수잔나는 주일 오후에 가정 집회를 시작하였다. 가정 집회는 주일 오후에 예배가 없을 때 가족을 위한 기도, 설교낭독, 신앙대화를 위해서 시작되었으며, 얼마 가지 않아서 200명의 교구신자들이 이 모임에 모여들었다. 특별히 경건주의자들의 서적을 읽는 것은 매우 큰 반응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런 수잔나의 활동은 당시 상황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먼저 부목사가 이것을 반대하였고 사무엘이 돌아와서 결국, 이 집회는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수잔나의 사역은 전혀 다른 곳에 영향을 미쳤다. 수잔나의 아들 존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일으킬 때 평신도 설교와 더불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여성 사역이었다. 감리교는 속회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여기에는 여성 속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속회에 남자들이 참여하게 되고 여성 속장들이 남자들까지 지도하게 되면서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과연 여자들이 남자를 지도할 수 있는가? 이것은 성서가 허용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에 대한 존 웨슬리의 대답은 특수한 경우에는 여성 사역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 감리교는 정식 교회가 아니라 일종의 특별한 신앙단체였다. 따라서 이런 특별한 경우에는 여성 사역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일반적인 경우에는 여성이 설교하는 것을 금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의 경우에는 여성 예언자가 있었고 이들은 교회에서 가르쳤다. (고전 11:5) 따라서 존 웨슬리는 여성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이것은 웨슬리안 전통에서 계속 이어져왔다. 존 웨슬리가 이렇게 여성 사역을 인정하게 된 배경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훌륭하게 사역을 감당하였기 때문이다.

한 여성에 대한 평가
우리는 여성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자녀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수잔나는 아마도 자녀나 아내로서 보다는 어머니로서 성공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잔나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를 양육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적인 유산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있다. 수잔나는 자식을 잘 두어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