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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하나님 - 오대희

2011.04.27 20:55

조회 수:1871



낮은 자의 하나님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했던 아픈 내 마음도 다 감찰하시고 계시는 하나님



[성경속의 여성 - 하갈]

오대희 목사(칼럼니스트)

보조 출연자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고 영화가 시작된다. 가장 어려움을 많이 당하지만 반드시 극복해내는 사람이 있다. 웬만한 총알도 그들을 맞추지 못하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으며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다 해결하고 승리하는 영화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주인공이라고 부른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으며 모든 역경을 이겨내며 모든 영광을 받게 되며 마지막을 멋있게 장식하는 주인공이 있다. 아브라함, 사라,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들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들 뒤에 지나가는 보조 출연자3 정도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역사에 등장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었다.

애굽에서 태어나 가나안의 한 여인의 몸종으로 그녀는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하갈이 어떻게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왔으며, 왜 이 가정에 몸종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않는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으며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한 인격체로서 그녀의 삶은 기구했다. 애굽은 가나안과는 비교되지 않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마치 미국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 동양의 한 작은 나라 어떤 집에 가정부로 살아가고 있다면 거기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어떤 분들은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왕으로부터 선물을 받아 올라올 때 선물의 일부로 딸려온 여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녀가 왕궁의 궁녀로 있다가 선물의 일부로 딸려온 여종이었다면 그녀의 인생은 이전보다 더 못해진 것이 사실이며, 만일 다른 이유로 가나안까지 와서 안주인의 몸종이 되었다면 참 많은 사연이 있는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 여인이 살든 죽든, 집을 나가든, 들어오든, 매를 맞든 그렇지 않든 기억될 만한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어느 날, 여주인인 사라가 아브라함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며칠 고심하더니 여주인이 말했다.  “하갈, 오늘 너는 내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해야 한다. 그리고 너는 아기를 낳아야 한다.” 간단한 명령이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하갈에게는 그리 간단치 않은 명령이었다. 성(性)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배제된 명령이었다. 어쩌면 아들을 낳으면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의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보는 것처럼,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인의 삶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갈에게는 자기 삶에 일어나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갈은 여주인의 명령으로 주인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아기를 가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주인의 학대가 시작되었다. 여주인의 눈에는 아기를 가진 하갈의 행동이 거만하게 비춰졌기 때문이다. 여주인은 아기를 가진 하갈의 행동이 자기를 멸시한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전의 몸종으로 살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몸이 좀 둔해지고, 좀 더 편안함을 추구하고자 했던 여종의 모습은 여주인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으며, 곧바로 학대라는 응징으로 다가왔다.

여주인의 학대는 날로 심해졌다. 학대를 견디다 못한 하갈은 그 집을 떠나 가데스까지 도망을 쳤다. ‘악 악’ 목이 쉬도록 울었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생각하면 자신이 너무나 불쌍하고 초라해서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한 평생 태어나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몸종으로서의 삶, 그리고 주인의 대를 잇기 위한 주인과 잠자리, 임신, 그리고 학대 모두가 자기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학대를 견디다 못해 나온 가출뿐이었다.
당시 목축과 농경이 중심인 사회에서 여성이 홀로된다는 것은 머지않아 굶어 죽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과도 같다. 특히 임신한 몸으로 주인의 집에서 도망 나온 미혼모를 돌봐줄 여유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하갈은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이 여인의 얽매인 삶에 대해 관심 가져 주지 않는다. 어느 길거리에서 울다가 죽어 버리면 지나는 사람들은 어느 족장 집에서 도망나온 이름 없는 하녀의 죽음이라고 치부하고 말 것이다.


낮은 자의 하나님

“하갈, 하갈”
얼마나 울었을까? 울다 지쳐 잠이 들려고 하는 미혼모의 귓가에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온유하고 신비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힘들지? 내가 다 보고 있었단다. 그리고 내가 네 마음 다 안다. 내가 널 도와줄게”
하나님이셨다. 하갈의 몸은 순간 그 위엄과 영광에 눌려 몸이 굳는 듯 했다. 아니, 그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자기를 찾아 오셔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높으신 하나님께서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나를 알고 계신단 말인가? 어떻게 높으신 하나님께서 초라한 나에게 말씀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하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동안에도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황홀감 자체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미혼모 하갈에게 앞으로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힘들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 주인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학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갈은 돌아갈 용기와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힘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인의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나의 삶의 깊은 부분을 보시고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과 같이 높고 귀하신 분들만 보살펴 주시는 줄 알았는데, 나를 찾아 오셨다. 내게 말씀해 주셨다. 아, 하나님, 이제는 내 주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날, 하갈은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하갈은 ‘엘 로이’, ‘나를 감찰 하시는 하나님’, ‘낮은 나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우리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여종의 삶을 친히 살펴보시고 깊이 관여하시며 인생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날마다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하갈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찾아오신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고, 지금도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신다. 나의 하나님은 내 형편을 돌아보신다. 그러나 내 느낌만으로 볼 때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다. 교회가 작기 때문에, 사역이 작기 때문에, 내 능력이 작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 때문에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여겨진다.

승승장구 부흥의 가두를 달리는 목사님들의 하나님, 열심히 능력을 나타내는 사모님들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그저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듯 느껴지는 것은 연약한 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날 하갈을 찾아가신 하나님께서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내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내 깊은 마음속까지 다녀가시며,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했던 아픈 내 마음도 다 감찰하시고 계신다. 그분이 아신다. 하나님이 내 형편을 아신다는 것은 내 삶에 깊이 관여하셔서 반드시 잘 되게 해 주신다는 말씀과도 같다.

하갈이 만난 하나님, 감찰하시는 하나님, 낮은 자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골방에서 나를 만나 주시는 내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