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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싸라기 선교사, 도자인(Jane Day)

 

박창훈 교수(서울신학대학교)

 

교회 밖에 머물던 발길

제인 데이(Jane Day) 선교사는 1921318일 미국 캔자스(Kansas)주 농촌에서 제이 마거라이트 데이(J.C. Marguerite Day)의 두 딸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장을 경영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받는 견실한 분이었고 어머니는 인자함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교사였다. 자매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제인이 23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했다.

제인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제인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가 교회에 갈 때마다 운전하여 모셔다 드리긴 했어도 자신은 교회 밖에서 예배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오는 정도였다. 어머니로부터 여러 차례 전도를 받았어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정도로 고집이 세었다. 1938년 알렌(Allen) 고등학교 졸업, 1940년 데이그 비즈니스대학(Dague Business College) 졸업 후, 제인은 1942년부터 비치비행기 회사(Beechcraft)에서 경리사무원으로 근무했다.

 

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다

1947, 어머니가 다니는 갈보리 감리교회(Calvary Methodist Church)에서 부흥회가 있었다. 성도들은 부흥회를 준비하면서 한 달 동안 전도대상자를 위한 특별기도를 하였는데, 이때 어머니는 제인의 이름을 전도대상자로 기록하고 여러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집회를 며칠 앞두고 이번 부흥회에 꼭 참석하자는 어머니의 말씀에 제인은 자신도 모르게 라고 대답하였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흥회에 참석한 제인은 강사로 오신 여자 목사님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며 감동을 받게 되었다.

제인은 그날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교회와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신 이후로 그녀의 모든 생각은 변하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자기의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크신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제인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 더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노스웨스트 나사렛대학(Northwest Nazarene College)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 채플시간에 기도하던 제인은 수많은 동양인들이 모여 있는 환상과 함께 저곳이 너의 일터니라라는 음성을 듣는 체험을 하였다. 이 특별한 체험은 제인이 동양선교사역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그녀는 동양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그동안 저축한 돈을 아프리카 선교사에게 모두 보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전도훈련을 하기 위해 교회가 없는 캔자스 산악지대를 찾아 시골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그곳 교실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2년 반 만에 아름다운 교회로 정착시켰다.

 

한국인을 사랑하고 품다

제인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 현재는 One Mission Society, 이하 OMS)의 회원이 된 어머니는 기도그룹을 만들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제인은 OMS 잡지인 <아웃리치>(Outreach)를 읽던 중, 우연히 한국에 경리를 담당할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기사를 발견하였는데, 경리를 전공하며 동양선교를 마음에 두고 있던 그녀는 바로 그 일이 자신이 맡아야 할 일임을 알았다. 제인은 곧바로 한국선교사로 자원하였고 심사를 거쳐 1955년 선교사로 선발되었다. 한국이 큰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많은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는 말을 듣고 1년 동안 자신의 한국선교를 지원할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다. OMS는 선교 경비를 지원할 후원자를 선교사가 직접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기도의 응답으로 선교 후원자들이 생기면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구나!”를 확신하게 되었다.

한 달 동안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569월이었다. 제인은 서울 OMS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경리책임자로 일을 시작했다. 주일에는 지방 교회를 다니면서 설교를 통해 성도들을 위로하는 사역을 병행하였고, 전쟁 후 비참한 생활을 하던 지방 교회에 후원자들이 보내주는 구호품을 나눠주며 주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하였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도자인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바꾸어 한국인들과 더 가까워지기를 소망한 그녀는 금싸라기 선교사라는 별명도 함께 얻었다. 도자인 선교사의 설교는 매번 10분 정도로 짧았지만 짧은 설교 가운데서도 한 마디 버릴 것 없는 은혜로운 말씀이었기에 여전도사들 사이에서 금싸라기 선교사라고 불렸다.

도자인 선교사는 1963년 남미 에콰도르, 콜롬비아, 브라질 OMS에서 회계와 사무를 담당하다가 1964년 위노나 신학교(Winona Seminary)에서 공부하고 그해 9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대전 주재 OMS 책임자로 일을 맡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한 달에 절반은 지방 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 사역에 매진하였다.

벽지의 교회를 방문하면 마룻바닥이나 차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기도 하였는데, 그런 교회를 방문한 후에는 반드시 교회에 마루를 놓아 주고 오르간을 기증해주었다. 또 여전도회가 없는 곳에는 여전도회를 조직하여 여성도들의 신앙의식을 고양하며 헌신적인 활동을 격려하였다. 오지의 교회를 방문할 때는 교인들이 내오는 낯선 토속음식을 기쁨으로 맛있게 먹고 재래식 화장실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사용하는 소탈한 성격이었으나, 전남 신안군의 섬들을 순회할 때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 주저하는 동료들에게는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약속을 지켜야한다고 꾸짖으며 앞장서는 불같은 구령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헬몬수양관과 성락원

1969년 도자인 선교사는 대전의 헬몬수양관 건축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한국과 미국의 여성도들의 헌금을 모아 헬몬수양관을 짓기 시작하였다. 해마다 여전도회나 여교역자들이 회의와 성경공부, 수양을 목적으로 수련회나 친교 모임을 도모할 일정한 장소가 없어 여성회관을 짓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배지를 만들어 판매하며 달고 다니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완성된 시설은 미국식 침실, 식당, 목욕시설을 갖추었으며 봉헌할 때 마태복음 17:1-8에 따라 헬몬수양관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모든 여성도들이 이곳에 와서 마음의 변화를 받는다는 취지였다. 1971년 완공하여 봉헌한 헬몬수양관은 대전지역 여성들의 쉼터이며 여성교육원으로 사용되었다(이후 2010년 신축하여 봉헌하였다).

헬몬수양관 건축 중에 도자인 선교사는 대전의 동명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당시 교회 개척을 시작한 동명교회 김우식 목사(원로목사)를 위해 도자인 선교사가 직접 성탄절 아침 식사와 선물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김우식 목사는 그날 자신이 대접받은 식사가 큰 기대(?)와는 다르게 단출한 호박죽이었는데 그 소박함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또 도자인 선교사가 설교 중에 청중들의 결단을 촉구하며 예수 믿기로 걱정(결정)하라!”고 말을 해서 많은 청중에게 웃음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78년부터 도자인 선교사는 성락원 건축위원장으로 선임되어 OMS 주한 선교부로부터 대지 500평을 매입하고 기본 설계도를 직접 작성하는 섬세하고 세밀한 일을 담당하였다. 이 성락원은 서울 상도동에 있던 은퇴 무의탁 여교역자들을 위한 시설이었는데 대전으로 옮긴 새로운 성락원 건물은 11실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다. 은퇴 무의탁 여교역자들의 편의를 위한 도자인 선교사의 마음 씀씀이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1983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126:3)라는 말씀을 머리말로 하여 성락원이 완공된 후, 도자인 선교사는 운영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은퇴 여교역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계속하였다. 성락원의 직원들에게도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은퇴교역자들에게 절대로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지 않도록 누누이 당부하며 이해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울 것을 강조하였다. 도자인 선교사는 식사준비, 시설관리, 건강점검 등에 솔선수범하여 어머니같이, 효성 많은 친딸같이 그녀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였다. 남성 위주의 한국사회와 가부장적인 한국 교회 안에서 평생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만을 위해 헌신하였던 여교역자들의 한숨과 눈물 섞인 사연과 기도를 잘 알았던 도자인 선교사는 바로 그 여성들의 대모였다.

은퇴하는 날까지 오전 5시 새벽기도회를 시작으로 사무를 보고 틈틈이 대전신학교와 여러 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대전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조용히 헌신하였던 도자인 선교사는 1986년 미국 OMS 선교부로 돌아가 선교사들을 후원하며 기도를 멈추지 않다가 고향 캔자스주에서 20062월에 85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국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해 무엇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한국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게 하셨다고 보았다. 그리고 주님 오실 날까지 계속해서 기도와 전도를 멈추지 말고 교회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당부하였다. 특히 한국 교회 여성들이 이 일에 앞장설 것을 눈을 감는 순간까지 간절히 기대하였다.

  

  

/박창훈 교수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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