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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無情)

글쓴이 | 황영준 목사 (광주동산교회 원로)



나와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그의 깊은 생각을 잘 모른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 그대로다.
목회자인 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섬기며 세워주어야 하는 위치였지만, 되돌아보면 허물과 실수가 허다했다.
내게는 교인만 아니라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까지도 예수 안에서 거듭 날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으로 보였다. 속마음이나 과거가 어떻든 좋은 만남들이었다. 눈을 맞추고 이해하려 했고, 어려움을 안타까워하며 격려했고, 출산과 돌뿐만 아니라 장례식도 돌보았다. 섭섭하지 않도록 정성을 들였다. 어쩌다가 오해가 생기면 인내했고, 음식도 나누고 여행도 했다. 좋은 것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고, 함께 의논하고 일하며 기도했다. 변화된 삶, 행복한 가정, 자원하는 교회생활, 보람된 성공을 기대했다. 만났던 세월만큼이나 정이 들어, 보면 반갑고 못 보면 궁금해서 안부를 물었다. 교제가 끊어지고 떠나간 사람이 많은데 서로가 무정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광수 소설 <무정 無情> 이야기다.
주인공 형식은 4년이나 몸담았던 학교를 물러난다. 월급으로 학생들을 도우며 가르치는 일에 진력했던 그는 이성 문제로 오해를 받게 되었는데도 해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학생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그들도 자기를 사랑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한바탕 꿈이었다.

“4,5년에 형식을 따르는 학생도 없지는 아니하였으나, 가장 따르는 듯하던 이희경에게도 형식은 결코 중요한, 사랑하는 자가 아니었었다. 형식은 이런 줄을 모르고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전심전력을 다하여 사랑하여 오던 자가, 또는 자기를 전심전력을 다하여 사랑하거니 하던 자가, 일조에 자기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줄을 깨달을 때에 그 슬픔이 얼마나 할까. 아마도 인생의 모든 슬픔 중에 ‘사랑의 실망’에서 더한 슬픔은 없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그러나 무정함을 탓하는 형식 선생도 무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려웠을 때 도움을 주었던 어르신의 딸 박영채를 만난다. 그녀는 투옥된 부친과 오라비를 구할 돈을 구하려다 기생이 되었다. 그래도 형식을 그리며 굳게 살다가 어려움을 겪고 자살하려 했다. 그녀를 찾아 나섰지만,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채 돌아온 형식은 자신이 무정(無情)한 인간임을 후회하며 후에 부잣집 딸 선형과 약혼한다.
한편, 대동강으로 가던 영채는 평양 가는 기차에서 동경 유학생 신여성인 김병욱을 만난다. 언니같이 다정한 병욱으로 인해 신문화에 눈을 뜨면서 삼종지도(三從之道) 멍에를 벗은 영채는 병욱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을 전공하고 사명자가 되어 귀국한다.

작가는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운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有情)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감열케 하고, 굳세게 할 것이다.”라며 끝을 맺는다. 무정(無情)한 세상에도 유정(有情)한 사람이 있어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남을 믿는다.

무정한 사람들이 주인공 형식의 교육현장뿐이며 나의 목회현장 뿐이랴.
부부도, 일가친척도 그리고 평생을 함께 갈 것 같았던 친구라도 이해관계 따라 쉽게 갈라지고 돌아서는 인심이다. 냄비같이 금방 좋았다가 한순간에 미묘하게 꼬여서 냉랭하게 되고 원수도 된다.
‘사랑의 실망’은 큰 아픔이다. 그래도 눈물을 닦아주는 따뜻한 사람, 이해하고 안아주는 사람, 은밀하게 도우며 기다려주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런 역할을 조금이라도 했는지 되돌아본다.

예수님 말씀을 묵상한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마귀가 마음에 들어앉은 사람, 자신을 은 삼십에 팔려는 파렴치한 제자 유다까지도 사랑했던 것이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말씀이 따르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도전이요, 교훈이다.
사랑 장(고린도전서 13장)을 암송해본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