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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밝힌 신여성 하란사(Ha Nancy)

 

박창훈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숨겨진 민족 운동가 하란사라는 여인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방면에서 3·1운동을 기념하고, 오늘날 그 정신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 이야기 가운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 여인이 있다. 바로 그해 고국에서 독립운동과 만세운동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조국의 안타까운 소식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하려다가 북경에서 숨을 거둔 하란사라는 여인이다.

1875년 김해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고만 알려진 하란사. 지금까지 그녀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최근 친정 가족들에 의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1872(고종 9)에 평양에서 전주 김씨 김병훈과 이씨 부인 사이에서 1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양에서 서울로 이주해 평동 32번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부모님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아버지의 무역업을 도우며 자랐다는 사실이다. 한때 기생 출신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는다. 하란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1890년대 인천 감리 벼슬을 살았던 하상기라는 사람과 후처로 결혼하여 13녀를 키우게 되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서양 문화의 만남과 이화학당 입학

남편이 근무하던 지역이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되었던 인천이라 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되면서, 이들을 통해 서양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서양 문화와의 만남은 하란사로 하여금 조국의 정치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여건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하였다. 남편은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기에, 하란사가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서울 정동에 있었던 이화학당에 입학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화학당은 설립자였던 매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부인이 남대문의 상동교회로 사역을 옮기면서, 룰루 프라이(Lulu E. Frey) 선교사가 교장을 맡고 있었다. 이화학당은 1890년대부터 늘어나는 학생들로 인해 기혼자를 받지 않기로 정했고, 때마침 공부에 대한 목적이 아니라 남편의 출세에 대한 야망으로 입학했던 한 후처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일이 있었다.

하란사가 밤에 등불을 들고 안내하는 하인과 함께 프라이 교장을 찾아가 입학을 부탁하였을 때가 바로 프라이 교장이 기혼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이 더욱 강경하던 때였기에, 하란사의 입학은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실제로 프라이 교장은 하란사가 입학 허가를 계속 간청하자 규칙을 앞세워 입학이 불가하다고 말하면서,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강경하게 지시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란사는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꺼버렸다. 순식간에 어둠과 함께 정적이 찾아오자, 하란사는 프라이 교장에게 우리의 형편이 이렇게 등불이 꺼진 것과 같으니, 학문의 빛을 비춰줄 수 없겠습니까?”라고 간절히 애원했고, 이는 프라이 교장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켰다. 그녀의 단호한 마음에 감동한 프라이 교장의 허락으로 하란사는 결국 이화학당에서 자신보다 한참 어린 학생들과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학업의 열정에서 비롯된 한국 여성 개혁의 사명감

이화학당에서 영어와 서양문화를 배우는 사이, 하란사의 마음에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란사는 선교사들에게 들은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였다. 세례를 받으면서 낸시(Nancy)라는 세례명을 얻게 되어 한자로 표기하여 그녀의 이름이 란사(蘭史)가 된 것이다.

늦게 그리고 어렵게 시작한 공부여서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로도 더 공부하고픈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00년에 일본 동경의 게이오의숙으로 유학 가 1년간 공부를 하였다. 외국에서 유학생의 경험을 하게 되자 하란사는 더 멀고 더 큰 나라인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꿈을 갖게 되었다. 아내의 학업에 대한 열정을 이해한 하상기는 같이 미국으로 가서 그녀의 학업을 뒷바라지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때부터 미국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랐고, 이 이름이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 남편의 헌신과 재산으로 인해 하란사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는데, 그녀가 유학한 학교는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안 대학이었다. 그녀가 웨슬리안 대학에서 1906년 문학사(Bachelor of Literature)를 취득하였을 때, 이 일은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국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경사가 되었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하란사는 떠날 때의 한복과 머리 모양이 아니었다. 짧은 머리에 검은 모자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신여성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의 복장과 머리 모양처럼, 하란사는 더 이상 봉건 시대의 굴레와 권위에 복종하는 여인이 아니었다. 커다란 세상 그리고 발전하는 세상을 목격한 하란사는 자신이 변한 것처럼 한국의 여성들이 변해야 하며, 자신은 바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부인성경학교 사역과 여성 계몽 활동

한국에서 하란사는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턴 부인을 도와 부인영어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영어학교는 기혼 여성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성경과 교리를 가르쳐서 복음을 전할 전도부인(Bible Woman)으로 세우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다시 말해, 이화학당처럼 좋은 집안의 소녀를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과부, 기생 등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여성들을 위한 학교였다.

앨버슨(M.M. Albertson) 선교사가 연로한 스크랜턴 부인을 이어 학교를 관리하면서 하란사와 함께 본격적인 부인성경학교로 전환하여 19111회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후에 감리교협성여자신학교가 되었다. 이후 남자 협성신학교와 통합하여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교가 되었다. 실제로 이 학교는 지방으로 나가 전도를 했으며, 가정 방문을 통해 전도의 열매를 맺었다. 전도부인들이 가가호호 전도할 때, 각 가정에서는 부담 없이 가정을 개방하여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도를 받을 수 있었다.

1910년 이화학당에 고등교육 과정인 대학과가 생기면서, 하란사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으며, 교감 직책과 사감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1911년부터는 서울의 여러 여학교, 즉 서대문여학교, 애오개여학교, 종로여학교, 동대문여학교, 동막여학교, 서강여학교, 왕십리여학교, 요머리(용두리)여학교, 한강여학교 등에서 가르쳤는데, 학생들만이 아니라, 학부모들을 위한 자모회를 만들어 육아와 가정의학을 가르치며 여성 계몽 활동을 병행하였다.

여학교에 근무하면서 자신의 복장이 변한 것처럼 학생들의 복장이 변할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전통적인 댕기머리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기라도 하면, 직접 가위를 가지고 다니며 머리카락을 잘라서 학생들에게는 전위적인 여성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행동을 제대로 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특히 험한 말을 거침없이 뱉어서, “욕쟁이 선생님,”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예뻐도 욕, 미워도 욕, 욕설을 잘하기로 유명해서, 당시 이화학당 졸업생으로 하란사에게 욕을 안 들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기에, 학생들은 하란사의 접근만으로 크게 긴장을 하였다.

한 번은 동일하게 미국에서 신교육을 받은 윤치호 선생이 영문 잡지인 <The Korea Mission Field>에 여학교의 교육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1) 요리하는 법을 모르고, 2) 바느질을 모르며, 3) 옷감을 자르고 빨고 다리미질하는 법도 모르며, 4) 때로 시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5) 그렇게 살림하는 법을 모르면서, 6)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하는 힘든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즉 여성들에게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교육이 아니라 의식교육만을 시키기에 가사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이 글에 대해 하란사는 같은 영문 잡지에 항의문이란 이름으로 반박문을 썼는데, 여성교육에 대한 윤치호의 정보가 틀리며,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즉 어느 누구도 윤치호가 지적한 일로 비난받은 것이 없으며, 여성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기능적인 가사를 잘하고자 함이 아니라, 슬기로운 어머니, 신실한 아내, 계몽된 주부를 배출하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조국 독립을 향한 강한 신념과 안타까운 죽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던 하란사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는데, 이화고등보통학교의 졸업반이었던 딸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그 시련도 하란사의 사명을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하란사는 바로 다음 해인 1916년 미국감리교회 총회에 한국감리교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총회 이후에 미주 교포들에게 강연을 하면서 그때 모은 헌금으로 정동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할 수 있었다.

자신이 경험하고 배운 학문을 통해 여성교육을 해온 하란사는 민족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한 운동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이화학당에서 세계정세와 민족의 현실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깨우치던 이문회’(以文會)라는 모임에는 유관순이 참여하여 하란사의 지도를 받았다. 하란사는 특히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과 미국 유학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6월에 열리는 파리강화회담 소식을 듣고 민족주의자들은 한국민의 독립 의지를 밝힐 기회라고 여기고 있었다. 고종황제, 의친왕 그리고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은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원문을 찾아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상황을 상의할 비밀계획을 세웠던 것이고, 하란사도 이 일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나 갑작스런 고종의 승하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파리강화회담 참석과 의친왕 망명을 추진하던 당시의 민족운동 진영에 가까웠던 하란사도 중국 북경으로 망명했는데, 일제의 철통같은 방어망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 심양을 통해 북경에 도착한 하란사는 410일 급작스런 병으로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녀의 사인을 그 당시는 유행성 독감이라고 밝혔으나, 교포들의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이나 국경에서 만난 동료로 인한 음해, 일본의 밀정에 의한 독살 등을 의심하게 만드는 정황이 알려져 의문사로 남았다.

그녀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신여성으로서 자신의 선도적인 배움으로 후학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며 민족의 지도자로 키우고자 한 고귀한 뜻을 기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의 신앙심은 민족의 문제 앞에 결코 침묵할 수 없었기에, 타향에서 숨을 거두면서까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것이다.

 

/박창훈 교수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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