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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회를 초토화시킨 박관준

 

 

    정성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항일운동과 애국운동의 지도자들이 많았다. 예컨대 사람들의 기억에는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이봉창 등을 비롯해서 기독교적 인물 중에는 순교자 주기철, 손양원, 이기선, 한상동 등을 기억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박관준은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박관준은 일본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선 애국자이며 순교자이다.

 

 

나는 박관준의 일본 중의원 잠입과 삐라 투척사건의 과정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박관준이 일본 중의원에 잠입하고 뒤집어엎은 사건은 박관준과 함께 했던 그의 아들인 박영창(당시 20)목사와 당시 신사참배를 생명 걸고 반대했던 일본어 통역관 안의숙 선생을 잘 알기 때문이다. 순교자 박관준의 그 역사적 사건은 현장에서 함께 했던 박영창 목사가 쓴 정의가 나를 부를 때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박영창 목사님을 아버님처럼 모시었다. 내가 총신대 교수 겸 총신대학교회를 섬길 때 박영창 목사님이 미국에서 한국에 올 때마다 꼭 강단을 맡기고 설교하도록 하였고 애국 강연도 주선하였다. 나는 총신대 총장시절(1980년대 초에는 학장으로 불렀다.) 박관준 장로의 순교기념비를 사당동 총신대 동산 중앙에 세워드렸다. (당시 나는 기독교 순교자 유족회 고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박영창 목사님은 1993년 우리 집을 방문해서 선친 박관준 장로가 순교하기 전에 죽을 12자를 넣어서 쓴 한 시를 써 주시고 내 아호를 賢岩이라고 지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박관준 장로의 손자 박영남은 나와 56년 전에 박윤선 목사님이 세운 동산교회에서 나는 중고등부 전도사, 그는 교사로 일을 함께 했다. 그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했고,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의를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했던 분이다. 그는 후일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L.A에서 일했다. 또 나는 박관준과 함께 일본 중의원 회의에 잠입하고 폭탄선언을 하는 사건에 동행했던 안의숙선생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쓴 책 죽으면 죽으리다의 육필 원고도 현재 내가 소장하고 있고, 나는 L.A 에서 안의숙을 만나 당시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그날의 사건을 좀 더 상세히 말해 보려 한다.

 

 

박관준은 의사였다. 그는 젊은 날 방탕자였으나 복음을 깨달아 철저한 신앙의 용장이 되었고, 교회를 세운 장로였다. 그는 애국자요, 신앙의 사람인데다 용감하고 정의감이 투철한데다 배짱이 두둑한 강골이었다. 그는 1935<우가키> 총독에게 일본이 신사참배를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탄원서를 보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또다시 1938년 미나미 총독에게 신사참배를 철회하지 않으면 대일본제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당차게 경고했다. 그러나 미나미 총독은 이를 무시했다. 이에 격분한 박관준은 19392월 아예 직접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 국회인 중의원 회의에 잠입하기로 결심하고, 같은 뜻을 가진 동역자 안의숙과 당시 동경신학교 학생인 박영창을 대동하고, 모두 귀족들이나 입는 연미복을 빌려 입고 중의원에 방청객인 것처럼 가장해서 잠입했다.

 

 

1939324일 제 74회 일본제국 국회에는 약 400여명의 중의원 의원들이 종교법을 의결하려 했다. 의장이 개회선언을 하고 막 회의시작을 할 무렵, 2층 방청석 가운데 앞줄에 있던 박관준은 좌우에 각각 안의숙과 박영창을 끼고 회의장을 향하여 벼락 치듯 고함쳤다. 여호와의 대명이다. 대일본제국은 반드시 패망하리라고 외치고 또다시 안의숙의 쩌렁쩌렁한 일본어로 통역하는 순간 2층에서 준비한 현수막 두루마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준비한 삐라를 회의장 가운데로 뿌렸다.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의원들은 삐라를 줍느라고 우왕좌왕했고 회의는 쑥대밭이 되었다. 그 순간 일본 경호경찰이 그 셋을 모두 덮쳤다. 그리고 박관준은 체포되어 6년 동안 갖은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순교했다. 죽음을 예견했던 박관준 장로는 하나님의 열혈군사로 한국의 엘리야였다.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예비 검속에 풀려난 박관준은 한시(유시)를 남겼다. 이 시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동지였던 이인재 전도사(목사)에게 써 준 것이다(나는 51년 전 이인재 목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사람은 한 번 죽을 때가 있나니, 어찌 죽을 때 죽지 않으리 그대 홀로 죽을 때 죽으면, 길이 죽어도 죽지 않으리 때가 와 죽을 때 죽지 않으면, 살아서 즐김이 죽음만 못하리라, 예수 나를 위해 죽었으니, 나도 예수 위해 죽으리다라는 시를 남겼다.

 

오늘처럼 한일 무역 전쟁이 심각한 이 때 애국자요, 순교자인 한국의 엘리야 박관준의 신앙과 용기, 담대함, 배짱을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일본과 무역 전쟁 중이다. 이는 21세기형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전쟁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무역전쟁은 한일 간의 영적 전쟁이기도 하다. 일본은 우상의 나라로서 신사를 만들어 천황을 받들고 찬양하며 태양신을 섬기는 우상의 나라이다. 오늘도 복음을 들고 일본인의 영혼을 사랑하며 선교하는 한국의 영적 전사들이 거기 있다. 모두 그들은 박관준의 후예들이다.

 

 

                                                                                                        - 정성구 목사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