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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생명의 피입니다

 

조성희 사모(행복연구원장)



미얀마(옛 국명 버마)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아웅산 수치 여사의 삶을 다룬 영화를 보았다. 아내며 엄마인 여성
이 군부 독재와 맞서서 민주화운동을 했다. 수치 여사는 미얀마 건국의 아버지이자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았
던 아웅산 장군의 딸이다. 수치가 3세 때 아버지는 민주 정권을 수립하려다가 정적에게 살해당했다. 15세 때
인도의 대사로 부임하게 된 어머니를 따라 외국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영국 사람과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고
평범하게 살았다. 1988년 쓰러진 어머니의 간병을 위하여 미얀마로 들어갔다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
는 사건이 일어난다.
수치 여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자유와 인권을 외치며 행진하던 청년 시위대가 군부의 무자비한 총격을
받아 쓰러지고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그해 8월 미얀마는 8888 민주화운동을 준비하면서 수치 여사에게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주기를 요청했다. 그녀는 암울하고 비참한 국민들의 모습을 보았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선택한 민주화운동의 여정은 험난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수시로 가택 연금을 당하여 14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녀는 단식 투쟁을 하고 국제적인 청원도 하였지만, 군부 독재의 총칼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991년 수치 여사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다. 시상식에는 남편과 두 아들이 참여했다. 미얀
마 정부는 가족들의 미얀마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가족이 있는 영국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얀마를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거절했다. 그녀에게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평생토록 그녀를 지지해 주었던 남편이 암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한 것이다. 그녀는 끝내 남편을 만나지 못했고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다. 가슴을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그녀의 모습은 값을 치르는 삶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30년을 투쟁해 온 그녀의 삶은 국민들에게 생명의 불꽃이었다. 마침내 미얀마는 2015년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 자신의 인생을 희생시키며 살게 하였을까? 조국을 살리기 위해 미얀마의 민주화를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미얀마의 민주화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전해진

생명의 복음 이야기

 

생명을 살리는 귀한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복된 소식을 만들 수 있다.
복된 소식은 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환자에게 치료하는 신약이 개발되었다는 축복의 소식과 같다. 이것이
곧 복음이다. 우리에게도 복된 소식이 있다. 죄인이었던 우리를 살리려고 성자 예수님의 생명을 버리신 하나
님의 사랑 이야기다. 죄로 인해 죽어 가는 우리의 혈관에 십자가의 보혈로 수혈해 주시고 거룩하다고 선언해

주셨다. 하나님은 로마서 3장에 기록된 것처럼 영적으로 무지하고 파렴치하고 거룩함의 갈망도 없는 인간에
게 복된 소식을 선포하셨다.
이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도록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는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의 터 위에 세워졌
고 예수님은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3b). 바울의 고백처럼
초대교회에서 시작된 복음으로 인해 우리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되어 증인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모이면 복음의 이야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흩어지면 복음을 전한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 복음의 노래를 멈출 수 없다.




복음은 하나님의 비전이며

사역의 목적이다


사도행전 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머무
시면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고 다스리
는 나라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부와 권력과 민족의 해방을 꿈꾸었던 제자들은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
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날, 그들은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나는 꿈을 넌지시 비추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지금인지요?” 그들의 마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다시
한번 공고히 하셨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고, 그 비전이 제자들에게 위임된 사명이며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고 권능도 약속해 주셨다. 성령의 감동이 임하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송받은 사도가 되어 복음의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사도들은 자신들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무리 앞에서도 복음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핍박받는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목적을 향해 걸었다. 사도들에게 주어진 복음은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었고 이유였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우리에게도 계승되었다. 사도들이 전해준 교훈, 정신, 사명도 함께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사역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고 생명 살리는 일이다. 복음전파를 단순히 교회 부흥의 방편으로 삼거나, 사람을 만족케 하는 프로그램 정도로 인식하면 안 된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복음의 우선순위가 바뀌어도 안 된다. 온 교회가 하나 되어서 생명 살리는 일에 몰두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명의 역사가 가득하면 다른 모든 좋은 것들도 더하여진다.



사람을 살리는 교회는

복음으로 충만하다


교회의 외적인 모습은 비슷하지만 생명을 살아나게 하는 역동성은 공동체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교회는 복음
의 온기가 남아 있지만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 반대로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는
생명의 복음을 따라 순종하고 생명을 낳기 위해 부산하다. 복음으로 충만한 교회는 무엇으로 세워질까?


교회를 세워 나가는 설계도면이 복음이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가면 유명한 ‘성 가족’ 성당을 비롯하여 훌륭한 건축물이 많이 있다. 온 도시를 경이롭
게 만든 건축물의 설계자는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이다. 그의 건축물은 남다른 창의성
과 디자인 때문에 오늘날에도 사랑을 받는다. 건축물은 설계가 매우 중요하다. 건축물의 목적에 맞는 구조와
용도, 디자인과 자재까지 모두 설계도면에서 그려진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드려 최초의 교회를 설계하셨
다. 주님이 지으신 교회의 설계도면은 복음이다. 복음의 설계도면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고 회복시키며 제
자로 자라게 하는 원리가 제시되어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서 1:17).
교회는 어떤 방법이나 이론을 추구하기 전에,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기 전에, 주님이 주신 설계도를 연구하고
따라야 한다. 주님의 설계도를 따라 사도들이 세운 교회는 처음과 나중이 모두 복음이었다. 복음을 중심으로
담대한 선포가 있었고, 생명을 살리는 기적과 능력이 나타났다. 교회의 부흥과 복음의 확장성, 영적인 공격,

인간의 연약성, 영적 지도자의 역할까지 모든 원리와 해답이 복음 안에 제시되어 있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 역
동적인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설계된 교회다.


교회를 튼튼히 받쳐 주는 기둥이 복음이다
건물의 중심은 기둥이다. 기둥은 건물의 하중에 따라 콘크리트의 분량과 그 사이에 들어가는 철근의 굵기, 수
량, 두께가 다르다. 무너진 기둥을 살펴보면 설계한 자재를 쓰지 않았거나 용량을 축소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눈에 가려진 것뿐이다. 교회의 건강을 지탱하게 만드는 기둥의 요
소가 무엇일까?
성령강림을 경험한 베드로의 메시지 속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
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이며 영혼의 구세
주로 선언해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마땅히 주님과 주의 복음으로 기둥을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교회 안에는 복음의 기둥 대신에 사람이 기둥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자기의 욕심을 따라 교회를 이끄는
사역자를 비롯하여 돈으로 선심을 많이 쓰는 사람, 대를 이어 교회를 지켜온 가문의 사람, 학식이 많거나 사회에
서 유력한 사람,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 등이다. 특정인의 입김이 복음보다 앞서서 교회를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을 일으킨 후,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들에게 황급히 외쳤
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예수) 그 이름이 너희
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행 3:12,16).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세우고 자신을 십
자가 뒤로 숨겼다. 오직 복음만을 드러내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교회의 참된 기둥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복음의 능력이

빛을 잃을 때

 

가로등은 어두운 밤거리에서 빛을 밝힐 때 그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만약 가로등이 빛을 잃어버리면 존
재 가치가 없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를 구원의 길,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는 빛이 되셨다. 그 빛 안에 거하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복음 때문에 우리도 세상을 밝게 비추는 사명을 받았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복음은 그 순수성과 영향력과 능력 면에서 당당하고 멋있는 복음의 빛을 발하였다. 그
러나 오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때때로 세상에서 복음의 빛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복음 스스로의 능력이나 복음 자체가 약화된 것이 아니
라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복음의 빛을 잃게 만들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외치고 많은 일을 하는데

정작 세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신의 반응을 보인다.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아 복음의 능력이 다시 빛나
기를 소망한다.


전도자의 우물이 메마른 웅덩이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우물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유목민인 그들에게 샘솟는 우물은 번영의 상징이고

살아 있는 것들을 모으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우물 때문에 다투고 우물을 중심으로 정착하는 것을 보여 준다.

만약 우물이 메말라서 생수를 얻을 수 없으면 사람들은 떠나고 우물은 황폐하게 버려질 것이다. 우물에서

마땅히 길어야 할 물이 없다는 것은 비극이며 곧 죽음을 의미한다.
전도자의 영혼에도 샘솟는 우물같이 생수가 솟아나야 한다.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 양들을 먹이고,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것이 마땅하다. 영혼의 생수가 솟아나서 적극적이며 의욕이 넘치는 사역을 하고 있는지,

사역에 대한 중압감으로 우울과 번민에 자주 사로잡히는지 정직하게 살펴보자. 메마른 사막을 걷는 것처럼

영혼이 고갈 상태에 빠지는 것은 영혼의 우물이 메마른 탓이다. 많은 사역에 매진하다가 복음의 우물이

마르는 것을 방치했으니 자신의 책임이 크다. 기계를 연속으로 가동시키면 열을 받아 망가지는 것처럼

전도자도 일에 쫓긴 열을 식히고 생수로 목을 축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더 이상 길어낼 생수가 없으면

사람들은 강퍅해지고 다툼이 잦아진다. 생명의 일도 시들해진다. 어떤 사역보다 먼저 영혼의 우물을 파고

생수를 가득 채우는 작업이 급선무가 되어야 하리라.


복음 속에 숨겨진 불순물을 걸러 내야 한다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발효 식품이 있다. 발효 식품은 발효시키는 과정이 중요하다. 장독 안에 담그고 꼭꼭
밀봉하였는데도 어쩌다 불순물이 섞인다. 발효 과정에서 이물질이 들어가면 금방 벌레가 꼬여 오랫동안 공들
인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우리의 복음전파에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다. “오늘은 한국을, 내일은 세계를” 외
치며 선교에 열정을 다하여 선교 한국이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가끔 복음의 이면에 불순물을 섞어
서 ‘선교’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어떤 목회자들이 있음을 본다. 개인의 목적을 위해 선교를 이용하고 복음으
로 이득을 추구하는 선교다.
어떤 목회자는 선교지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정성스럽게 지원했다. 알고 보니 자신의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은밀한 거래였다. 어떤 목회자는 은퇴를 앞두고 선교지를 방문하여 자신의 비전을 나열했다. 돈이 없어 꿈꾸
던 사역을 이어 가지 못했던 선교사에게 희망을 주었다. “내가 은퇴하면~ 이 사역을 위해 헌신하겠네.” 많은

재정도 약속하고 돌아갔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선교 기관의 명의를 이전하라고 요청했다. 그것이

쉽게 이행되지 않자 이전에 바쳤던 선교헌금을 돌려 달라고 주문했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사역지 곁에서 경쟁하며 사역을 펼친다. 또 어떤 이는 많은 선교비를 들고 와서 돈을 펑펑 쓰며 사람을 모은다.

십수 년간 헌신한 선교사가 옆에서 그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자괴감이 생길까.
이런 유형의 모습을 복음전파의 순수한 동기라고 말하기 어렵다. 복음의 진정성은 사라지고 진실함 대신에

욕심으로 가득한 왜곡된 복음전파다. 식품에도 불순물을 허락하지 않는데 주님의 지상 명령에 얄팍한 인간의

욕심을 섞어 놓으면 주님의 눈을 가릴 수 있겠는가. 이기심과 욕망을 복음으로 포장하고 주님의 사역이라고

우기면 주님을 두 번 욕되게 하는 것이리라.


신실함을 잃어버린 전도자가 복음의 걸림돌이 된다
대다수의 전도자들이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신실하게 충성을 다한다. 그러나 가끔
사역지에서 믿음과 인격과 사역이 신실하지 못하여 복음의 빛을 가리고 퇴색시키는 전도자도 있다.
물론 외적인 자격과 학벌로 모양새를 갖추긴 했지만, 내면 깊숙이 복음으로 연단받은 흔적이 없는 것이
다. 복음 전도자는 지역 교회나 해외 선교지, 어디에 머물러도 복음을 위한 신실함이 한결같아야 하거늘 조금
손해 보고 힘들면 견디지 못한다. 복음보다는 자아가 더 강하고 자신의 유익이 더 앞서는 사역자다. 그나마 지
역 교회는 교단의 조직이 울타리가 되기도 하지만, 해외 사역지에서는 자유로운 사역의 특징으로 인해 문제를
더 키우는 경향도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살피면서 최선을 다하는 복음 전도자들께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몇 가지 안타까운 상황을 나누려고 한다.
어떤 전도자는 해외 사역을 지망하면서 기본적인 언어와 전략을 준비하지 않아 언어 공부만 하면서 시간을 보
내고,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려 철새처럼 이동하며 세월을 보낸다. 인격적인 미숙함으로 현지 선교사들과의 마
찰에 에너지를 다 쏟고, 성실함의 부재로 파송 교회와 갈등에 휩싸인다. 교육과 문화를 외치며 많은 돈을 들여
야심 차게 출발했지만 뒷감당을 못 한다. 선교비로 학위를 받고 전문인의 자격을 따자 임의로 제 갈 길을 가버
린다. 본국에서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선교사의 이름으로 다 얻게 되자, 선교를 마치고 귀국하거나 다른 일을
하는 사례들도 있다.
물론 사역지의 상황 때문에 부득이한 선택도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파송받은 사역자가 복음과 사명
에 대한 신실함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이런 모습의 전도자 이야기는 국내외에서 심심
치 않게 듣는다. 사역으로 출발하기 전, 전도자의 외면과 내면에 균형 잡힌 신실함의 훈련이 철저하게 이루어
져야 함을 느낀다. 자신으로 인해 복음의 영광과 능력의 빛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자신을 점검하는 정직함도 잊
지 않아야 한다. 삶의 신실함이 결여된 전도자는 불 꺼진 가로등과 같아서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다시 복음의 능력으로

충만하려면

 

우리의 삶에서 복음으로 인한 체험과 능력이 경험되어질 때 복음이 진정한 복음이 된다. 이미 헌신된 모든 사
역자들은 복음의 능력을 충분히 경험하였다. 다만 이 능력이 꺾은선 그래프처럼 고저가 없이 늘 충만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많이 보여 주셨다. 병든 자, 죄에 눌
린 자, 심지어 귀신들마저 예수 이름 앞에 떨고 복종하니 이보다 더 큰 능력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능력은 오
늘 우리 사역의 현장에도 역사한다. 특히 어두움에 사로잡힌 자에게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묶음을 풀고
떠나가라” 선포하면 성경 속의 장면이 그대로 재현되니 참으로 놀랍다. 2000년 전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도
능력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이미 허락된 예수 이름의
능력을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하게 맛보는 사역이 될까.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덧입는다

성경은 전도자의 중요성을 거듭 말씀하셨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
후 4:2a). 성령은 복음전파의 명령에 순종하는 전도자와 함께하시고 복음의 능력을 덧입혀 주신다. 언제 어디
서나 복음 전하길 힘쓰는 사람은 복음의 능력을 가장 크고 확실하게 경험한다. 갖가지 사연들 속에서 다양한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복음의 역사를 날마다 맛보는 사람이 복음의 능
력을 덧입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사역자가 불신자에게 복음 전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데 있
다. 하지만 그것도 핑계에 불과하다. 적극적인 분들은 때와 시를 초월하여 복음을 전한다. 목욕탕에서, 거리에
서, 심지어 승려에게도 담대히 복음을 전한다. 나에게는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다.
모든 것이 세련되지 않았던 1970년대 주일학교는 교사들이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노방전도를 나갔다. 약장수

같이 커다란 북을 치고 무거운 메가폰을 들고 찬양하며 골목을 돌아다녔다. 나는 선생님을 따라 시장 거리에서

전도하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동화도 곧잘 했다. 그러한 경험은 내가 주일학교 교사가 되자 똑같은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다. 신학교 1학년 시절, 청량리역 근처 좋지 않은 동네에 살았다. 그 동네에 복음을 전하

려고 교회가 세워진 연고다. 밑바닥 인생으로 사는 가정의 아이들을 데리고 주일학교를 했다. 욕설과 싸움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던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일마다 거리전도에 데리고 나갔다. 여전히 무거운

메가폰을 들고(지금은 많이 가벼워졌지만) 전농동 골목을 누비며 목이 아프도록 찬양을 불렀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어느 날, 역 광장에서 천막을 치고 구두 닦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아가씨,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일요일마다 아이들 데리고 노래 부르며

돌아다닐 때 맨정신으로 하는 거요? 술 한 잔 먹고 하는 거요?” 아마 그들의 눈으로 볼 때는 어린 아가씨의
모습이 황당하게 보였나 보다.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이야기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 이후에도 나의 삶 속에

살아 있는 복음이 되어 많은 은혜를 맛보게 해주었다.
복음 전하는 교회가 되려면 먼저 사역자의 가슴에서 뜨거운 열정이 일어나야 온 교회를 움직일 수 있다. 교회
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전도훈련 프로그램이 잘 준비되면 좋겠다. 사람을 이해하는 교육과 전도현장에
서 필요한 실제적인 훈련이 동시에 필요하다. 성도들은 복음 전하는 롤모델이 있을 때 더 쉽게 배운다. 우리 교
회도 전도하는 삶이 일상화되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훈련한다. 전도대 파송, 전도폭발훈련, 전도 편지 쓰기 등
매년 태신자를 작정하여 새생명축제에 초청하고 교회로 이어지게 만든다. 특히 제자 훈련생들에게는 전도하
는 과제가 있다. 매일 한 사람 이상에게 전도하고 일주일에 몇 번 했는지 점검하고 전도 일지를 쓰게 한다. 고
기 잡는 어부가 방법과 도구만 연구하다가 고기 한 번도 잡아 보지 못한 어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우리
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힘을 다하여 복음 전하므로 복음의 능
력을 덧입게 되고 복음 충만, 성령 충만으로 나아간다.


죄에 대한 애통함이 있을 때 복음의 능력을 덧입는다
주님이 오실 것을 예비한 세례 요한은 매일 요단 강에서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목회를
하건, 선교를 하건 우리는 다 죄인이다. 죄인의 특징은 하나님과 멀어지려고 하는 본능, 제멋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늘 꿈틀거리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를 통해서 가장 거룩한 복음도 흐르고, 더럽고 추한 죄성도 흐르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잠시라도 영혼의 무장이 풀어지면 어느새 죄의 성품이 우리를 옭아맨다. 그러므로 날
마다 회개하고 복음으로 재무장하지 않으면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회개는 우리의 영혼을 십자가의 보혈
로 깨끗하게 씻는 작업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십자가 앞에 엎드려 통회 자복하는 시
간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
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
니라”(사 59:1, 2).
주님은 우리가 죄의 보따리를 풀어 놓고 낱낱이 회개할 때 가장 크게 기뻐하신다. 기도의 응답도 그 시간에
주어진다. 회개가 없는 사역은 하나님의 과녁에서 벗어나 있기에 정직한 사역이 될 수 없고 복음의 능력도 경
험하기 어렵다. 십자가를 붙들고 그 앞에 엎드리면 회개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음을 보게 된다. 복
음의 감격이 무디어진 것 회개, 복음보다 앞서서 행했던 것 회개, 종이 주인처럼 행세한 것 회개, 목양이 아니
라 사업에 매진 한 것 회개, 의에 대한 열망이 개인의 욕심으로 변질되었던 것 회개, 전도자의 사명감이 퇴색
되어진 것 회개 등 회개할 것이 너무 많다. 사실 회개는 하지 않으면 할 것이 없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죄와 허
물을 발견하게 된다. 검정 옷에 떨어진 먹물과 흰옷에 떨어진 먹물의 차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능력이 정결한 자를 통해서 순도 높은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눈 덮인 언덕에 감
히 손댈 수 없는 백색의 고요함과 엄숙함이 느껴지듯 깨끗한 영혼에게 복음의 능력이 덧입혀진다. 복음은 죄를
덮고도 남는 능력이다. 사역을 한다고 더 경건해지고 더 십자가와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골방에서
주님과 독대하며 정직하게 영혼의 더러움을 토할 때 주님을 뵈옵는 것이다. 이곳에서 복음의 맛을 경험하고 능
력을 덧입는다. 복음의 능력으로 모든 교회들이 승리를 경험하는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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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19 Summer (36호) 분별력은 사역자의 걸음을 밝혀 주는 가로등입니다 file 2019.07.03
39 2019 Spring (35호) 분별력은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file 2019.04.15
38 2018 Winter (34호) 청소년 자녀는 조개 속의 진주입니다 file 2019.01.04
37 2018 Autumn (33호)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전 우주와 같습니다 file 2018.10.10
36 2018 Summer (32호) 어머니의 사랑은 자녀를 살리는 보약입니다 file 2018.06.27
35 2018 Spring (31호) 아버지 당신은 자녀의 미래입니다 file 2018.04.01
34 2017 Winter (30호) 평신도는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file 2018.01.05
33 2017 Autumn (29호) 성도의 교제는 영적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2017.09.28
32 2017 Summer (28호)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2017.06.23
» 2017 Spring (27호) 복음은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생명의 피입니다 2017.04.05
30 2016 Winter (26호) 건강한 리더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에서 출발합니다 2016.12.28
29 2016 Autumn (25호) 말씀의 훈련은 '내가 복음'을 '주님의 복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2016.09.21
28 2016 Summer (24호) 사모의 영광은 예배의 영광에서 채워집니다 2016.06.22
27 2016 Spring (23호) 교회는 어두운 밤 외로이 서 있는 등대입니다 2016.03.29
26 2015 Winter (22호) 사모의 즐김은 피로회복제와 같습니다 2016.01.04
25 2015 autumn (21호) 사모의 지성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2015.10.06
24 2015 summer (20호) 사모의 멋은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2015.07.15
23 2015 Spring (19호) 쉼은 크고 넓은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2015.04.02
22 2014 Winter(18호) 절제함은 우리의 질주를 막아주는 성령의 브레이크입니다 2015.01.09
21 2014 Autumn(17호) 사랑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것입니다 2014.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