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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리더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에서

출발합니다

 

조성희 사모(행복연구원장)



1914년 12월 5일 어니스트 섀클턴이 남극 대륙 횡단을 계획하고 27명의 대원들과 함께 사우스 조지아(South Georgia) 섬에서 출발했다. 항해 두 달여 만에 배가 얼음 빙벽에 갇히게 되었다. 남극의 매서운 겨울과 하루 종일 해가 보이지 않는 암흑 가운데 표류하던 배는 9개월 만에 침몰하고 말았다.

대원들은 세 척의 구명보트에 의지해서 표류하다가 무인도인 엘리펀트(Elephant) 섬에 상륙했다. 거센 바람 때문에 거할 곳이 없었지만, 펭귄을 잡아먹으며 버텼다. 시간이 지나면서 펭귄의 숫자도 줄고 대원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당시는 2차 세계 대전 중이었고 도움을 요청할 장비나 구조대도 없었다. 무인도에서 1,300㎞ 떨어진 최초의 출발 기지 조지아 섬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뿐이었다.
섀클턴은 목숨을 걸고 또 한 번의 모험을 시작했다. 작은 구명보트 한 척에 5명의 대원을 데리고 거센 태풍과 영하 20~30℃의 추위를 뚫고 16일 만에 조지아 섬에 도착한다. 도착한 곳은 기지의 반대편이어서 만년설과 얼음으로 뒤덮인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다시 썰매를 만들어 타고 높은 산을 넘어 기지에 당도한다. 구조대는 엄청난 얼음덩어리 때문에 4개월 만에 무인도로 돌아왔다. 남아 있던 대원들은 보트 두 척을 뒤집어쓰고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고 있었다. 섀클턴과 대원들은 조난당한 지 634일 만인 1916년 8월 30일, 전원이 구조선에 오르게 된다. 대원들은 8월 30일을 평생 기념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들의 무사 귀환은 기적이었고 사람들은 기적의 비결을 물었다. 대원들의 일기와 사진, 증언을 들으면서 섀클턴의 리더십 때문임을 알았다. 섀클턴은 극한 상황의 대원들에게 소망과 꿈을 심어 주고 신앙을 돈독하게 세워 주었다. 대원들을 먼저 배려하고 섬기고 헌신하므로 진정한 사랑을 몸소 보여 주었다. 역사는 섀클턴의 미완성 탐험을 ‘위대한 실패’라고 평가했다.


섀클턴의 리더십은 이 시대가 추구하는 올바른 리더상의 본보기가 된다. 진정한 리더는 성공과 실패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과 가치, 태도를 통해서 진가를 평가함이 옳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세상의 파도를 헤치고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선장의 역할을 맡은 목회자가 반드시 건강한 리더가 되어야 한다.

그는 지성과 영성, 인격의 균형을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야 한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종 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우고 성령으로 정결함을 입는다. 성령의 통치하에서 자아와 욕심의 다스림을 받고 승리하는 사람이 건강한 리더다. 기독교 역사 속에 등장하는 리더십은 모두 정결한 마음과 영혼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출발했음을 보여 준다.



건강한 리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건강한 리더는 광야의 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손에서 빚어진 사람이다. 범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만 신뢰하게 만드시는 훈련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예외 없이 그의 종을 광야 학교에 몰아넣으시고 적합한 훈련을 시키신다. 건강한 리더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훈련 과정을 몇 가지만 생각해 본다.



묵은지같이 오래 묵혀 두시는 시간이 있다 

배추 겉절이는 버무려 놓은 그날 하루가 지나면 맛이 없다. 묵은지는 오랜 시간 숙성이 되었기에 깊고 그윽한 맛을 느끼게 한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묵은지로 만드는 음식은 겉절이와 비교할 수 없는 별미가 된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훈련하실 때 묵은지같이 오래 묵혀 두시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꼭꼭 숨겨 놓으실 때가 있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는 누구도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 주의 종을 영적으로 깊은 맛을 내는 사람으로 빚으시려는 계획이다. 금방 두각을 나타낼 것 같은 탁월한 사람, 혹은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수고한 만큼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사람의 안목으로는 부족함이 없는데 주목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해 고뇌하는 시간이다.
요셉의 인생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빚으시는 묵은지의 과정이 잘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어린 요셉에게 큰 꿈을 꾸게 하셨지만 꿈의 열매는 단숨에 주어지지 않았다. 요셉의 아버지는 자식들의 거짓에 속아 귀히 여겼던 요셉을 잃어버렸다. 아버지에게 잊혀진 요셉은 형들에게도 버림받으며 잊힌 존재가 되었다. 애굽에 팔려온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충직한 종이 되었지만 그의 절개는 감옥행으로 이어졌고 주인 보디발에게서 또 한 번 잊혀졌다. 요셉은 감옥에서 왕의 시종들을 만나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다. 왕 앞에 복직하게 된 술 관원은 요셉에게 약속했다. “내가 왕 앞에 서면 당신의 억울함을 전하겠소. 필시 왕께서 사면해 주실 것이오.” 그 말을 듣고 요셉은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을까. 이번에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를 알려 주실 것이라 믿었지만 술 관원은 요셉을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요셉의 결말을 아는 우리로서는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유추해볼 수 있다.



고독의 방에서 외로이 머물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건강한 리더를 빚으실 때 반드시 사람에 대한 훈련을 하신다. 주의 종들은 대부분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 섬기는 사명을 받았다. 언제나 누굴 만나도 사귐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육 과정에는 사람에 대한 훈련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사역을 위해 헌신하던 성도들,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과 이상하게 관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사소한 일에 갈등이 생겨서 오해가 증폭되고 관계가 삐걱거린다. 서로 마음을 풀려고 대화를 하면 더 꼬여 버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어떻게 집사님이 그럴 수가 있지?’ 배신감과 당혹감에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비난과 질타로 인해 심한 외로움을 느낀다. 누구도 의지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어 골방에 갇혀 있는 듯하다. 사람을 사랑한다던 자신감은 다 사라지고 회의론자가 된다. “왜 내가 이런 사람들을 사랑해야 되지? 왜 이들을 위해 나의 생애를 드려야 하지?”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빚으시려고 꼭 필요한 골방의 훈련, 고독의 훈련을 시키시는 것이다. 고독의 훈련을 가장 잘 감당하신 분은 바로 인성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시다. 무거운 사명을 앞두고 감람산에서 새벽이슬 맞으며 기도하실 때도 혼자였고, 골고다 언덕길을 묵묵히 걸으실 때도 혼자였다. 예수님의 곁에는 한 사람의 제자도 따라오지 않았으며 홀로 서서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셨다. 우리가 주의 종이 맞다면 외롭고 곤고한 고독의 방은 필연적인 훈련 코스라 하겠다.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시간을 요구하신다
바닷가 해변에서 아이들이 모래로 집을 짓는다. 모래를 꽉꽉 눌러서 단단한 벽체를 만들고 누구 집이 더 크고 멋있는지 자랑한다. 그러나 한순간, 솨- 바닷물이 밀려오면 아이들은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가고 파도가 떠난 자리에는 정성껏 지은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파도 앞에서의 모래성은 그저 한 줌의 모래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주의 종을 건강하게 빚기 위하여 그의 모든 노력과 의지, 수고가 한 줌의 모래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케 하신다. 열정을 품고 최선을 다했건만, 정작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훈련이다. “내가”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오~ 주여”만 부르게 하신다. 혼신을 다해 일했는데 건강이 악화되어 병석에 드러눕고, 시간과 돈을 들여 준비했던 계획이 틀어져 두 손을 놓게 되고, 사역이 안정되어 가는 듯 했는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져 보금자리를 뒤집는 일이 발생한다. 너무 기막히고 황망하여 가슴이 꽉 막힌다. 할 수 있다는 각오는 절망으로 바뀌어 자괴감 속에서 절규한다. 원인과 결과의 공식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이 상황은 하나님께서 백기를 들고 나아오라고 명령하신 시간이라 믿는다. 종의 일생이 주 안에서 끝까지 바르게 달려가기를 바라시는 훈련이다. 그저 주인께 무릎을 꿇고 고백하면 된다.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나 한 사람도 감당치 못합니다. 제발 불쌍히 여겨 주세요.”


건강한 리더는

사람 앞에서도 인정받는 특징이 있다

 

도자기가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깨트려서 뜨거운 불가마에 집어넣는다. 오랜 시간 잘 구워져 주인의 마음에 흡족한 도자기는 광택과 색이 선명하여 고가의 예술 작품으로 거듭난다. 건강한 리더들도 도자기와 같이 하나님의 손에서 빚어지면 모양과 색깔은 달라도 품질의 격은 주인의 품격과 닮아 간다. 그러므로 건강한 리더의 특징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주인의 말씀을 지키는 데 인생을 건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아람과의 전쟁을 준비하다가 하나님의 뜻이 궁금해졌다. 아합은 400명의 선지자를 불러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본다. 선지자 400명과 시드기야는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결같이 승리를 외쳤다. 그런데 한 사람 미가야 선지자는 왕의 죽음을 예언했다. 미가야는 수백 명의 거짓 선지자와 진노하는 왕 앞에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 결과 미가야는 시드기야에게 뺨을 맞는 수모를 당하고 옥에 갇혔으나, 미가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히 드러났다.
이 세대는 시드기야처럼 주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종들도 있고, 참되고 진실한 미가야 같은 종들도 많이 있다. 이들의 차이는 주인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건강한 리더는 시대의 흐름, 사람들의 욕구에 발맞추지 않고 오직 주인의 말씀에만 집중한다. 그는 화려하지 않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고, 강하게 보이지 않지만 비굴하지 않다. 주인의 마음이 진실하게 전해지도록 정직한 통로 되기를 힘쓴다.


주인의 종다운 성품이 뚜렷이 보이는 사람이다
리더들 가운데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적 결함, 성격적 결함이 크게 두드러져 주인을 욕되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성질 더러워. 아무도 못 말려. 인간성에 문제가 많아.” 주인의 이름을 사용하는 종으로서는 결코 듣지 말아야 할 말이다. 자기 마음대로 성질부리던 선지자 요나가 떠오른다. 요나는 사명을 받은 종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고집과 이기성이 그를 이끄는 모습이다. 사역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그 민족이 싫어서 억지 회개를 외치고,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긍휼로 바뀌자 몹시 화가 났다.
사역도 포기하고 박넝쿨 밑에서 쉬다가 햇살을 막아 주던 넝쿨이 시들자 분이 폭발해서 하나님께 덤벼든다. “하나님, 제가 화를 내다 죽을 지라도 저의 화는 정당합니다!” 혈기가 충천하여 펄펄 뛰던 요나는 “박넝쿨과 니느웨에 거하는 사람 중 누가 더 귀하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서야 마침내 숙연해진다.
요나의 생각과 가치, 태도의 문제는 무엇일까. 주의 종이라는 이름은 있는데 영혼을 향한 주인의 사랑, 긍휼의 성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요나의 혈기는 주인의 마음과는 너무 거리가 먼 성품이다. 거울을 보듯 부지런히 자신을 살펴 주인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도록 절제하는 사람이 건강한 리더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24).


비전을 따라 움직이고 비전을 보여 주는 사람이다
세상 리더들의 비전은 사람의 만족에 무게를 두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 가치를 달리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러 갈래의 길이 눈앞에 있어도 주인이 가라고 명하신 한 길을 향해 나아간다. 그 길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비전이라고 말한다. 종은 반드시 주인의 비전을 따라 움직인다. 어떤 향기가 코끝을 자극해도 주인이 명하신 자리가 아니면 뒤돌아보지 않는다. 주인이 심겨 주신 그 자리에서 꽃 피는 것을 꿈꾸며 씨앗을 심는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주인의 사람이므로, 주인의 비전을 알려 주고 비전을 따라 사는 인생의 모범을 보인다. 종의 모습 속에서 주인의 뜻이 보이고, 주인의 눈물과 소원이 읽혀진다면 그는 주인과 밀접한 정직한 종이다.
예수님은 수가성의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느라 끼니를 거르셨다. 제자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양식을 권하자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날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의 비전을 똑똑히 보았고 훗날 예수님 닮은 증인이 되었다. 예수님처럼 순교자로 사명을 감당했다. 건강한 리더에게는 예수님의 꿈과 열정, 열심, 희생이 보인다. 그를 따르는 이들도 그렇게 전염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다.


가르침이 삶으로 드러나 신뢰받는 사람이다
“BE BRITISH!”(영국인답게 행동하라)를 외치며 죽음의 현장을 지휘한 리더가 있다. 그는 타이타닉 호의 처녀항해를 맡은 영국 출신의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이다. 그는 선장으로서 빙산을 제때 발견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부하 직원들을 독려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지막까지 물이 차오르는 조타실에서 키를 붙잡고 있다가 물에 쓸려서 사망했다.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선장다움’을 잃지 않은 그의 태도를 귀감으로 삼아 동상을 세워 기념했다.
신뢰받는 리더에 대한 내용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신뢰는 한 사람의 리더가 그의 역할에 합당한 ‘~다움’으로 삶이 표현되어 질 때 얻게 되는 선물이다. 목회자도 ‘주의 종다움’이 드러나야 신뢰를 얻는다. 그의 가르침이 행동을 뒷받침하고 내면의 정직함과 책임감이 수반되면 그를 따르는 믿음이 생긴다. 리더는 희생함으로, 기꺼이 손해 보므로, 오래 참음으로, 자신의 것을 내어 주므로 선한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리더를 신뢰하게 되면 리더의 비전에 마음을 기울이고 함께 공유하고 싶은 확신을 가진다. 선하고 아름다운 일들은 모두 리더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뢰가 작은 불씨 되어 큰 불길을 일으킨 것이다.



리더가 빠지기 쉬운 

함정들

 

건강한 리더는 한순간을 풍미하고 끝나는 권력자와 같지 않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평생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땅바닥의 패인 부분에 발을 헛디뎌 발목을 접질리는 것처럼 영적인 함몰 웅덩이에 빠지는 경우가 생긴다. 리더의 건강성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함정이다. 이 함정은 리더의 내면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가당착’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만족감
처음 사역을 시작하거나 사역의 현장이 힘들어서 어렵게 버티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다. 그러나 사역의 현장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서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고 칭찬의 말을 듣게 되는 시점부터 이런 유혹이 다가온다. 이 마음은 매우 위험한 자기만족이다. 지금까지 수고한 자신에 대한 우월감과 교만이 함께 도사리고 있다. 동시에 더 이상은 힘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안주하고 싶은 욕구도 포함된다. 사역자가 수고한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만 남았음을 기억함이 좋다. 자신의 판단과 사람들의 칭찬을 너무 믿다가 엉뚱한 사건에 연루되고 커다란 시험에 드는 시점도 바로 이때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죽을병에서 살아난 히스기야는 그 마음이 방만해지고 높아졌다. 그를 살려 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으며 새롭게 얻은 인생을 국가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여쭙지 못했다. 도리어 적국의 사신이 방문함에 우쭐해져서 궁전의 내밀한 곳까지 다 보여 주는 실수를 범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의 잘못된 선택을 지적하고 후대에 치를 참혹한 대가를 예언해 주었다.
하나님의 종은 주인이 맡겨 주신 일을 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못한다. 성경은 책임을 맡은 종들에게 충성되게 감당하기를 당부하셨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경계를 정하는 것은 주인의 몫이다.


인정받지 못하면서 일할 필요는 없어
교회들이 담임 목회자를 초빙할 때 한동안 젊은 나이의 목회자를 초빙하는 일이 있었다. 젊으면 참신하고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더 지혜롭겠다는 시각이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예전처럼 연령층이 더 높아졌다고 한다. 젊은 사역자들은 참신하지만, 인내하고 견디는 힘이 약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거나 반대에 부딪히면 쉽게 사표를 던지고 뛰쳐나온다. “내 말을 따르지도 않는 곳에서 자존심 구겨 가며 굳이 일해야 될 필요는 없어.” 성도들 앞에서 사용했던 ‘위임’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도록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한다. 오죽하면 사표를 던졌을까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지만, 한편으로는 자아가 좋아하는 자존심을 꺾지 못하는 것이 영적인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 가출한 청소년이 다시 가출하는 것처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면 똑같은 태도를 반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타협할 수 없는 자기 감정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야 한다. ‘자존심’을 위해서 자기의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주인에게서 탈출한 종의 모습이다. 자신의 역할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주인의 재가를 기다리며 참는 것이 바른 태도다. 아무리 탁월한 지도력이 있어도 사역에는 맑음, 흐림, 폭풍우가 교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지사다.


작은 일에 매일 수 없어. 더 큰일을 해야 돼

소명으로 출발한 길이지만 자신의 사역에 대한 생각은 각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사역자는 자신의 꿈이 매우 큰 것을 이야기하며 매일의 현실은 답답하고 불만족스러워 한다. “원래 나는 큰물에서 놀아야 되는데, 평범한 일들은 나에게 맞지 않아. 누구는 터를 잘 잡아서 막 부흥한다는데….” 그렇게 자신을 위안하다보니 어느 순간, 게으름이 습관화되었다. 하늘의 구름 잡듯이 현실을 외면한 채 상상하는 데 온 마음을 빼앗긴다. 마치 세상에서 한탕을 꿈꾸며 평범한 일도 하지 않으려는 어떤 사람처럼 말이다. 자신에 대한 긍정의 마음은 나쁘지 않으나, 헛된 야망과 욕심으로 인해 현재에 대한 책임을 과소평가하고 변명하며 불성실한 태도는 문제가 된다.

이것 또한 리더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재의 사역이 시들하게 느껴져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될 것 같은 마음에 사로잡힌다. 마음이 급해지면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 어떤 사람, 어떤 일이 눈에 띄면 그것이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진다. 성급한 마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외치고 결정을 내린다. 안타까운 것은 새롭고 대단하게 느껴졌던 그 일도 막상 현실에서는 자질구레한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얼마 있지 않아 후회하고 어리석음을 탄식하지만 회복하기 어렵다. 그의 욕심과 불성실한 태도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사모에게도 리더의 정신과

태도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사모상에서는 사모를 리더라고 감히 지칭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의 흐름과 사람들의 인식이 전혀 다른 세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앞장서 있는 지도자에게 무조건 책임을 묻고 판단하려는 의식이 팽배하다. 교회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교회를 이끄는 책임이 목회자에게 집중된 만큼 사모들을 향한 시선도 달라져 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리더의 정신과 지혜로운 태도를 가짐이 필요하다.


사모도 똑같이 주목받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나 중책을 맡은 리더들의 공식적인 모임을 보면, 부부가 항상 함께 움직이고 단상에 나란히 서 있다. 공식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은 남편인데 아내를 똑같이 예우한다. 이 모습은 부부를 연합된 한 몸으로, 같은 책임을 느끼는 지도자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증거다. 부부란, 영광도 같이 누리고 책임도 같이 져야 하는 운명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음이다.
그런 면에서 사모도 남편 목회자의 곁에 서 있는 리더로서의 인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사모가 맡은 역할은 목회자의 내조자로서 보이는 곳,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지만 남편과 같은 소망으로 공동체를 섬기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사역자 부부를 따로 놓고 보지 않는다. 좋든 싫든 두 사람을 한 지도자로 본다. 사모이기에 덜 경건해도 되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성도는 없다. 오히려 사모의 모습을 통해서 목회자의 지도력이나 신실성에 대한 믿음의 여부를 가리기도 한다. 사모가 무엇을 하든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위치라면, 차라리 분명한 리더의 의식과 태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자리매김을 하면 사역에 더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모도 믿음의 모본을 보이는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모는 나서기보다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이 마음 편하다. 하지만 주목받는 자리, 책임 있는 자리에 있기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부분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충성된 봉사자들은 대부분 여성도들인데 사모만 숨죽이고 있는 것은 좋은 모범이 되지 못한다. 다른 것은 부족해도 믿음의 삶은 사모가 말할 수 있는 전공이 아닌가. 믿음의 가치를 중심으로 성도들에게 모본으로 보여줄 것이 많이 있다. 가정생활, 자녀 교육, 부모님 공양, 올바른 재정관, 믿음의 결정, 분별력 등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삶의 영역들을 말씀과 기도로 세워 나가는 사모의 모습은 그 어떤 스승의 가르침보다 더 힘이 있다.
요란하지 않지만 사모의 조용한 헌신은 여성과 가정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된다. 이런 사모를 어찌 리더십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모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명자다. 남편 목회자의 동역자다. 죽어 가는 영혼들을 가슴에 안고 울어야 할 복음에 빚진 자다. 조국의 미래를 바라보며 다음세대를 향한 중보자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 사모의 자리가 이 땅에서는 별 인기가 없을 지라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시리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 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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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016 Spring (23호) 교회는 어두운 밤 외로이 서 있는 등대입니다 2016.03.29
26 2015 Winter (22호) 사모의 즐김은 피로회복제와 같습니다 2016.01.04
25 2015 autumn (21호) 사모의 지성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2015.10.06
24 2015 summer (20호) 사모의 멋은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2015.07.15
23 2015 Spring (19호) 쉼은 크고 넓은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2015.04.02
22 2014 Winter(18호) 절제함은 우리의 질주를 막아주는 성령의 브레이크입니다 2015.01.09
21 2014 Autumn(17호) 사랑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것입니다 2014.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