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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훈련은

'내가 복음''주님의 복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조성희 사모(행복연구원장)

   

 

우리나라에도 자랑스러운 선수가 많이 있지만 연습 벌레로 소문난 유럽의 축구 선수 파벨 네드베드를 소개하고 싶다. 네드베드는 1972년 체코에서 태어났으며 대포알 같은 슈팅과 경기 내내 뛰어다니는 왕성한 체력으로 두 개의 심장, 세 개의 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체코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을 4번이나 수상하였고 유럽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되는 발롱도르(BALLON D’OR), FIFA(국제축구연맹)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축구인 100명에 속하는 축구 스타였다.

그를 인터뷰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의 성공 비결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는 연습과 훈련이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학교를 다녔고 하루에 12시간을 연습했습니다. 경기가 있는 날도 경기 끝나면 바로 훈련장으로 달려갔고 일과의 마침은 연습장의 조명이 꺼질 때였습니다. 저의 취미는 연습입니다. 조깅은 일이 아니라 내 인생 그 자체입니다.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도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고 휴가를 떠나도 이른 아침 조깅은 빼먹지 않았습니다.”

그의 연습량은 유명 구단에 입단한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네드베드의 명성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훈련은 가르칠 훈() 단련할 련()이라는 뜻으로, 어떤 것을 가르치고 반복 연습하여 온몸에 체득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훈련의 과정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이를 수 없다. 훈련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훈련되지 않고는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배울 수 없음이다.
이 부분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 4:8, 새번역). 성경 곳곳에서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명령하셨다. 동시에 군사의 비유, 경주자의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권고하셨다. 훈련으로 연마함이 없이 경건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거룩한 모판이다

 

올봄에 우리 새로남기독학교에서 작은 논을 만들었다. 도심지에 사는 아이들이지만 논에서 무르익는 벼의 성장과 열매 맺는 추수의 의미를 느끼게 하고 싶어서 수십 개의 고무통에 모종을 심었다. 아이들은 큰 기대감 없이 작은 풀포기 같은 벼 모종을 심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깜짝 놀랄 만큼 벼가 자라는 것을 보았다. 물만 주었는데 벼가 쑥쑥 자라 어느새 곡식을 담은 줄기가 보였다. 얼마나 신통하던지 어서 속히 가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아이들과 함께 알곡을 수확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벼가 이렇듯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옮겨 심은 작은 모종이 건강했기 때문이다. 알곡을 머금은 모종은 사명을 다한 것이다.

 

교회에서 훈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회는 거룩한 모판이다. 세상으로 파송받은 성도들이 심기어진 자리에서 열매 맺는 건강한 모종이 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건강한 모종으로 준비된 성도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워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뿌리를 굳게 내리고 사명을 다할 수 있다. 척박한 땅에서도 견디고, 가뭄과 뙤약볕에도 메마르지 않고, 병충해의 도전에도 이겨낼 힘이 있다. 어떤 상황에도 복음의 용사, 십자가의 용사로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다. 말씀의 훈련은 사명을 이루어야 할 성도를 강한 군사로 세워주는 강력한 영적 무기다.
교회 안에서 훈련이라는 용어를 쓰면 가끔 어색하게 느끼고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한 곳이어야 하는데 훈련은 딱딱하고 경직되며 인위적인 틀 안에 가두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교회가 세워진 본연의 목적을 돌아보면 훈련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피 묻은 복음이 세상에 널리 전파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준비 없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파송의 사명을 감당하려는 성도는 말씀의 훈련으로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의 복음

내가 복음

 

교회는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소그룹의 형태도 만들어서 믿음의 가족들이 친밀하고 영적인 깊이를 더하도록 강조한다. 그러나 때로는 말씀을 펼쳐 놓고 교제와 나눔을 위주로 하다가 말씀으로 인한 변화는 맛보지 못하고 교제 중심, 취미 동호회 같은 모습으로 흘러가는 소그룹도 있다.

가판대의 물건처럼 다양한 강좌들이 개설되면 훈련이 잘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칫하면 단순히 교육의 차원, 지식의 전달에서 멈출 수 있다.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마음과 영혼을 단련시키는 훈련이 되려면, 모든 강좌와 프로그램의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종하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포장은 어떤 제목으로 꾸며도 내용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이다.

만약 교회가 말씀 앞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교회공동체는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직분을 받고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녀도 사사시대처럼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이상을 따라서 목소리를 높이는 내가 복음으로 흐르게 된다. ‘내가 복음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 판단을 더 크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으나 실상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 내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의 하나님을 주장하며 자신의 색깔을 교회 안에 덧칠한다. 교회 식구가 100명이면 100가지의 색이 입혀질 것이다. ‘내가 복음은 교회가 시험을 만나면 파당을 짓고 자신의 주장이 거세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영광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질주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훈련은 그 목적과 방향이 철저하게 주님 중심, 말씀 중심이어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훈련은 성경말씀을 스승으로 모시는 훈련이다.

 

 

말씀 앞에 순종하는

훈련이 주는 유익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이어간다면 말씀으로 성숙해진 성도들을 통해 유기적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1. 성도를 성도답게 만들어 준다

말씀의 훈련은 성도로 하여금 육신의 욕심과 영적 욕구의 갈등에서 벗어나 제자의 삶으로 돌이키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가장 먼저 가치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전까지는 다수를 따라 움직이고 상황을 따라 자기중심의 판단을 가졌으나 훈련을 통해 성경의 절대적인 가치와 권위를 깨닫는다. 자신을 말씀 앞에 복종시키고 성도의 정체성과 정신으로 신앙의 기본을 바르게 세운다.

기본이 훈련되지 않으면 오랜 교회 생활과 상관없이 성숙함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의 훈련을 받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자의 자세, 삶으로 예배하는 믿음, 기도의 깊이와 넓이, 섬김의 기쁨을 배우며 신실함, 정직함, 겸손함의 열매가 커진다. 영적인 성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원을 꿈꾸게 된다. 주님이 흘리시는 눈물을 함께 흘리고 주님의 근심이 애통의 제목이 되어 중보 기도자로 서게 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하신 말씀대로 세상을 품고 기도한다. 나라와 민족, 교회, 주의 종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중보하며 적극적인 복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된다.

 

2. 사역자와 사역의 균형을 잡아 준다

사역자마다 자신의 사역현장에 좀 더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어떤 영역의 특성이든지 다 복음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가끔 어떤 사역자들은 영적인 균형을 잃어버려 사역의 현장이 흔들리는 것을 본다. 사역자 자신이 도덕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세상의 지탄을 받는 경우와 교회관이 희미하여 교회와 성도를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므로 문제를 일으키는 예다.

심지어 사역자가 올바른 신학적 지식과 확신이 없어 이단과 사이비에 미혹되어 성도들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는 사례도 있다. 하나의 사건이 불거지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작은 사건들이 이어지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사역자의 영적인 균열을 돕거나 권고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심각하다.

사역자는 일평생 한길을 달려가면서 외롭게 서 있다. 끊임없이 말씀의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영적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자신을 보다 더 건강한 사역자로 세울 수 있다. 영적 근육이 강화되면 성도들을 말씀으로 세우고 싶은 열망이 생긴다. 말씀을 붙잡고 성도와 함께 씨름하다 보면 도리어 성도들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고 영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유익을 맛보게 된다.

 

 

3.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건강한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켜 순종하는 교회다. 이 모습이 우리가 바라는 좋은 교회의 특징이다. 좋은 교회의 건강함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방 두 개를 준비하고 실험을 했다. 한 방에는 어른들이 모여 있고 한 방에는 어린아이들이 모여 있다. 함께 돌봐주던 교사가 자리를 비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각 방의 형편이 짐작된다. 아이들의 방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 분명하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미성숙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처럼 교회의 건강은 그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성도들이 성숙하면 건강한 교회가 되고 미성숙한 성도들이 많으면 병약한 교회가 된다. 건강한 교회는 주위의 다른 교회 사람들이 만들어 주지 못한다. 본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하다. 너희는 청년의 정욕을 버리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고 기록하고 있다. 건강한 교회, 성숙한 성도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말씀 앞에 복종하는 훈련이 체질화될 때 가능하다.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 한 분만 말씀하시고 모든 사람은 귀 기울이므로 건강함을 유지한다.

 

 

훈련사역을

주저하게 되는 이유

 

여행에서는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여 곤경에 처할 때가 있지만, 때로는 신발 안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여행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겉으로 표나지 않는 소소한 것이지만, 결국은 몇 걸음 못 가서 멈추어 선다. 신고 있던 신을 벗어 들고 모래 알갱이를 털어내야지만 다시 걸을 수 있다. 훈련사역을 위해 털어내야 하는 모래 알갱이는 무엇일까.

 

1. 사역자가 자신 때문에 주저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쉬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 가운데서 키를 잡고 배를 운항하는 선장과 같다. 힘들지만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그 책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선뜻 나서지 못함은 늘 자신의 부족함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오랜 목회의 경험상 새로운 것을 시도함에 대한 부담이 있고, 과거에 실패했던 경험에 의한 두려움도 있다. 또한 실제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하며 값을 치르는 어려움도 있다. 이것저것을 너무 많이 생각하다가 결국 주저앉으며 나는 아니야라고 단정한다.

이렇듯 목회자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생각해 본다. 교회가 말씀의 훈련을 준비하면 가장 싫어할 존재가 누구이겠는가. 바로 사단이다. 사단은 말씀의 훈련을 가장 싫어하며 불가능한 요소들을 나열하고 방해할 것이 뻔하다. 그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도전은 목회자의 마음을 묶어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이제 그 전략에 흔들리지 말고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주위를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라도 고민 없이 훈련했는데 열매를 거두었다는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용기를 내어 주저하는 자리를 떨쳐 버리고 일어나는 것이 첫걸음을 떼는 결단이다. 훈련사역은 외부에서 오는 도전이나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다. 바로 목회자 자신의 마음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2. 교회의 토양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훈련사역에 관심도 많고 열정도 많은 목회자 가운데는 교회 환경이나 토양이 오래된 고목처럼 열악한 상황도 많다. “우리 교회는 성도들의 나이가 많아요. 배운 사람이 거의 없어요. 농촌, 어촌, 산촌에 있어서 안 돼요. 환경이 너무 열악해요. 돈이 없어요. 직분자들이 서로 싸워서 소망이 없어요.” 가만히 들어 보면 안 되고도 남을 이유가 충분히 많다. 너무 힘든 상황이어서 도리어 무엇이나 도움을 드려야 할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말해 본다. “그래도 말씀으로 훈련할 한 사람을 찾아보세요. 그 한 사람이 불씨가 되면 타오르는 불길을 만들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일당 백 명, 일당 천 명을 감당하는 용사가 될지 몰라요.” 상대방에게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 같아 죄송한 마음에 얼른 눈길을 피한다. 그런데 뒤돌아보면 지역과 환경을 불문하고 훈련을 시도했던 목회자에게서 훈련의 열매가 맺히는 간증을 듣게 된다. 말씀에 순종해서 일대일 훈련을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한 사람을 성령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 한 사람이 은혜를 받고 변하자, 교회는 물론이고 온 동네가 들썩이는 이야기도 들었다. 믿기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할렐루야!

 

 

말씀의 훈련과

사모의 역할

 

 

1. 사모도 한 사람의 여성도로 인정하자

한국 교회는 남자 성도보다 여성도가 훨씬 많다. 교회를 위해 앞장서서 헌신하는 사람은 거의 여성도다. 교회에서 여성도가 빠지면 교회사역이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우스갯말도 있다. 말씀의 훈련을 받으면 여성들도 말씀을 가르치는 평신도 지도자, 리더로 세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유독 사모에게만은 많은 제약을 두는 것 같다. 마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선입견이 가득한 그 시절처럼, 사모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가지는 교회들이다. “사모는 나서지 말아야 한다. 사모가 나서면 성도들이 싫어한다. 사모 때문에 목회자가 욕을 먹는다.” 물론 교회의 건덕을 위해서 사모의 지혜로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사모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성으로서 은사와 재능을 따라, 혹 교회의 필요한 곳에서 헌신할 수 있는 장이 열리면 좋겠다. 여성도의 헌신을 당연히 받아들이듯 사모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역의 기회를 허락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는 배우자인 목회자의 인식도 한 몫을 하리라. 먼저 목회자의 인식이 바뀌어서 사모도 한 사람의 여성이며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고 싶은 열망이 있음을 인정해 주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자신 있게 아내를 지원해 주고 배움의 기쁨, 지도자로 쓰임받는 기쁨을 경험케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2. 사모도 말씀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어느 젊은 사모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목사의 사모입니다.” 사모는 스승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표현이므로 스스로 자신을 사모라고 지칭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표현이다. 이렇듯 목회자의 아내가 되면 저절로 성도들의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되는 것은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헌신하겠다는 결단이므로 오히려 출발일 뿐이다. 결단이 합당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빚어져야 하는 과정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사모는 영적 지도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말씀의 훈련을 사모해야 한다. 말씀의 깊이와 넓이가 채워져 가는 만큼 영적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됨이다.

사모의 형편상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배우는 기회가 쉽지는 않지만, 억지로 그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면 남편 목회자께서 인도하는 훈련 시간에도 성도들과 함께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사모가 함께 있음을 불편하게 여기고 호기심을 가질 수 있지만, 오해는 잠깐이다. 사모가 배움의 자리를 사모하는 것은 겸손한 모습이요, 목회자의 정신이 살아 있는 것이니 주저할 필요가 없다. 또한 말씀을 사모하는 사모가 어찌 기도의 자리를 소홀히 하겠으며 지혜 없는 자와 같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겠는가? 시간이 흐르면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다. 영적인 신뢰와 존경의 마음이 생기면 저절로 따르게 된다.

 

3. 사모도 말씀훈련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내가 만나 본 사모님들 가운데는 목회자 못지않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분들이 많았다.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억척같이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돌아보며 지역 사회에도 공헌하는 귀한 분들이었다. 누가 그런 사모님들을 보고 사역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역자로 불림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다만 사모가 사역을 처음으로 시도할 때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함이 지혜롭다. 사모의 기질과 성격, 은사를 따라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이다. 혹 재능을 따라 섬기는 것이라 해도 주변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사모가 피아노 반주를 잘해도 성도 가운데 누군가 헌신하고 싶어 하면 양보함이 옳다. 그래서 사모의 재능을 발휘하는 데는 조심스러움이 따른다. 그러나 사모가 말씀을 배우고 훈련받아서 말씀과 기도의 인도자가 되는 것은 재능과 무관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의 훈련을 받았으니 주님과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궁극적으로 사모 자신도 살고 교회에도 큰 힘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목양의 성격은 부성과 모성의 양면이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목양은 무조건 남성 목회자의 몫이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사역이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 성도들의 각각 다른 모습을 보면 자녀에게 부모의 역할이 다 중요하듯, 목양에도 부성적인 면과 모성적인 면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함을 느낀다. 그런 면에서 사모가 사역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다. 특히 한국 교회의 건강성을 책임지는 사람이 여성도들인 것을 감안할 때, 사모가 여성을 지도하는 사역자로 서는 것은 합리적이고 바람직하다.

문제는 남성과 여성의 확연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훈련하는 인도자가 남성 사역자뿐이니 아쉬움이 많은 것이다. 여성의 복잡 미묘한 성향과 내면은 여성 사역자가 훨씬 더 잘 공감하고 정확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말씀의 훈련을 받은 여성도들이 남다른 성숙함을 갖추게 되면 교회는 평화롭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성장하리라.

 

훈련된 여성 사역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도시 중심가에서 벗어난 소도시, 농어촌, 특수, 해외 선교지에서는 여성 사역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말씀으로 훈련받아서 말씀훈련의 인도자로 세울 만한 여성 사역자는 더욱 만나기 어렵다. 설사 담임 목회자가 혼신을 다하여 1, 2년 훈련을 시켜 키웠다고 해도 꾸준히 한 사역지를 섬기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사역자 한 사람 키우느라 많은 에너지를 쏟고 투자했지만 떠나면 붙잡을 수 없어 허탈함만 남는다. 어쩌다 나름 갖추어진 여성 사역자를 초빙해도 밀접한 형태로 늘 동행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 사역자의 권한이 많아지고 인기가 높아지면 뜻하지 않은 갈등과 관계의 충돌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한집에서 지내는 사모가 여성 성도들을 중심으로 말씀사역을 감당하면 여러 종류의 걱정들을 한 번에 다 날려버릴 수 있다. 그 어떤 사역자들보다 더 목회자인 남편을 잘 알고 교회를 사랑한다. 늘 함께 다녀도 누구도 염려하지 않는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동역자가 된다. 이보다 더 좋은 여성 사역자를 어디에서 초빙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사모가 말씀의 훈련을 받고 훈련에 동참한다면 참 멋진 동역자가 되리라 확신한다.

 

 

 

교회 안의 훈련이

정착되려면

 

교회 안에서 말씀의 훈련이 뿌리내리려면 먼저 목회자의 마음에 확신이 서야 한다. 사단의 방해와 여타의 어려움으로 한 번 주저앉으면 다시 시작하기 어려운 탓이다. 교회를 개척한 경우에는 성도들을 독려하는 것이 덜 힘들지만, 기존 교회에 부임해서 훈련사역을 시작하려면 상당한 저항감에 부딪히게 된다. 오래된 성도들과 직분자들에게 말씀의 훈련을 이해시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들 스스로가 말씀 중심이지 못한 것, 말씀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교회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은 매우 힘든 과제다. 지름길이나 특효약은 없다. 그저 기도하면서 훈련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알려주고 건강한 교회의 꿈을 심어 주는 작업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동시에 좋은 일꾼에 대한 관점을 말씀으로 기준 삼고 성도들도 말씀의 렌즈를 통하여 볼 수 있도록 권고한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을 확신하며 성령의 일하실 것을 굳게 믿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못 바꾸실 사람, 못 바꾸실 교회는 없다. 쉽지 않은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파송한다고 맡기신 것 아니겠는가. 주님의 명령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빛을 발하길 두 손 모은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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