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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의 영광은

예배의 영광에서 채워집니다

 

조성희 사모(행복연구원장)

    

 

우연한 기회에 TV에서 왕의 남자라는 코너를 보게 되었다. 950년의 역사를 지닌 영국 황실에서 가장 명예로운 직업이 무엇일까에 대한 이야기였다. 16세기 당시 가장 명예로웠던 이 직업은 왕이 친히 명문 귀족 가문의 자녀들 가운데서 뽑았다.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받아들인 이 직업은 왕의 특별한 의자를 들고 다니는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변기였다. 영국 황실에는 황족을 위한 화장실이 따로 있지만, 왕에게는 그마저 안전의 위험 때문에 항상 휴대용 변기를 가지고 다녔다. 왕의 변기 담당관은 늘 그림자처럼 왕을 따른다. 왕의 가장 가까운 방에서 머물며 시도 때도 없이 왕의 용변을 담당한다.

아침이면 변기 준비, 청결한 뒤처리, 냄새를 맡고 용변의 상태와 양을 기록하여 식단 조절을 명령한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엘리자베스 여왕도 왕위에 오르자 귀족 가문의 딸이었던 자신의 가정교사를 변기 담당관으로 세웠다. 영국 황실의 기록에는 16세기 초에서 20세기 초까지 47명의 변기 담당관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현대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이 직업을 16세기 당시의 사람들이 가장 명예로운 직업으로 받아들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가장 고귀한 왕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으며 왕과 가장 가까운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왕과 왕실의 모든 비밀을 공유한다는 이유다. 이것을 특권으로 인식하고 영광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웃음을 자아내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이야기지만 진정한 경외감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왕이 누구신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왕에 대한 존경, 경외감이 충만한 결과 왕을 위해서라면 어떤 궂은일도 영광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제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우리가 드리는 경외, 경배, 예배는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를 생각해 본다. ‘왕의 남자들이 가지는 영광스러움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올려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고 싶다. 사실 사역자인 우리에게 있어서 예배의 자리는 너무나 익숙한 현장이다. 그 누구보다 예배드리는 횟수가 많을 뿐 아니라 예배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짜 예배를 드리는 태도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에 등대처럼 서 있게 하신 의미를 되새겨 보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나타난다.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혹은 입 맞추다라는 뜻이다.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세계를 건설하신 하나님의 지성소 앞에 나아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우리를 친 백성 삼아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최고의 존경을 올려 드리는 표시다.

 

구약의 성막에는 죄 없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제사를 받으려 강림하시는 상징적인 장소 곧 지성소가 있다.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아론의 직계 후손인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을 대신하여 속죄제를 올려 드린다. 구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영광에 노출되면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의식을 위해 제사장이 입는 예복에는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장신구들과 각종 보석과 황금 방울을 달았다. 감히 성소에 들어갈 수 없는 백성들은 제사장이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방울 소리로 그들의 제사가 드려지는 것을 짐작했다. 또한 제사를 올리는 제사장이 조금의 흠과 티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히브리 전승에 의하면 제사장이 제사를 올리러 들어갈 때 그의 발목에 밧줄을 묶어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밖에서 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혹여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제사장이 죽임당한 것을 알고 밧줄을 잡아당겨 시신을 끌어내었다고 하니 얼마나 두려운가! 그만큼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 준다.

이렇게 두려운 지성소의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속죄제로 인하여 모든 어둠과 억압은 사라지고 자유와 평화와 기쁨, 거룩함이 주어졌다. 만인 제사장으로서의 특권도 주어졌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61:6a).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에 대한 예언이면서 동시에 신약시대의 성도, 즉 교회를 가리켜 예언하심이다. 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봉사자가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1:6a) 말씀의 우리안에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를 일컬음이 포함된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그러므로 사모는 목회자, 사역자 이전에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예배의 은혜, 예배의 회복 없이 더 이상의 사역은 의미가 없다. 오직 예배만이 우리와 우리 사역을 의미 있게 세워줄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영광의 자리다

 

 

영국 황실에 등장하는 왕의 권위와는 그 모양이 다르지만 현대에서도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본다. 대통령이 기거하는 청와대는 부름을 받아야 출입이 가능하다. 또한 부름을 받으면 대통령과의 만남을 위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예전 교육을 받는다. 특히 해외에 나가 있는 교포들은 조국의 대통령이 그 나라를 방문할 때 대통령과의 만남을 위해 일상의 분주함도 뒤로하고 정해진 시간에 달려간다. 하지만 도착한 이후로 두 시간씩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고충이 있다고 들었다. 그 이유는 국가의 지도자에 대한 권위와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런 불편함이 있는데도 교민들이 생업을 접으면서 그 시간을 사모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고국의 지도자를 만나는 영광스러움과 이민생활의 필요를 직접 간구하고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대통령을 만나도 그 권위와 영광을 생각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데 하늘의 하나님을 알현하는 자리는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이며 특권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를 예배의 자리에 초청하시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허락해 주셨다. 아무 조건 없이, 자격 없는 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43:21). 얼마나 영광스러운 초청인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무엇 하나 아쉬울 것이 없는 분이시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순전한 사랑이 이유가 되어 예배의 자리에 임재하시고 우리를 만나 주신다. 하나님 자신에게만 있는 영광을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고 경험케 하신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은 우리인 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는 최고의 시간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빛과 같다.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할 때면 햇빛을 머금은 자연의 색이 너무 아름다워 감탄사가 나온다. 하지만 햇빛이 사라지면 자연의 아름다운 색채도 어둡게 퇴색된다. 우리 역시도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비추이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떤 아름다움도 존재할 수 없다. 예배는 바로 태양빛이 온누리를 비추듯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한 영광의 빛을 받고 누리는 시간이다. 은혜의 빛이 비치면 그 빛 아래에서 꽃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과분한 사랑과 칭찬, 존경을 받기도 한다. 이는 우리의 공로나 잘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 때문이다.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우리 모습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덧입혀 주시면 우리도 감히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

 

 

예배의 자리에서

사모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은 온 교회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송축할 때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교회가 탄생하게 된 모습,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얻고 누리는 은혜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지면상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만 손꼽아 본다.

 

영혼의 독소를 뽑아내고 회복시키는 은혜다

 

코브라를 춤추게 하는 사람의 공연이 TV에서 소개되었다. 독이 많은 코브라를 손으로 잡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흠칫 놀란다. 사람들의 궁금함을 알았는지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맹독이 있는 뱀을 손으로 다룰 수 있습니까?” 그러자 코브라 주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코브라의 독은 매우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30분마다 코브라의 독을 뽑아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공연을 진행할 수 없겠지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치명적인 독이 어찌 독사에게만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죄인인 우리에게도 독사보다 더 강한 죄의 독이 있다. 30분마다 기다릴 것도 없다. 신앙의 선조들은 매 순간 죄를 먹고 마시는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사모인 우리에게도 이 독이 존재한다. 굳이 나쁜 말과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목회적인 삶이 녹록하지 않으므로 야기되는 독소들도 많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면 그 스트레스가 독이 된다. 미움과 다툼, 극심한 분노는 소화력을 떨어트리고 경련을 일으켜 더욱 강력한 독소를 뿜어낸다. 문제와 시험거리들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가족 간에 갈등이 있거나 집안에 우환이 겹치면 낙심과 염려의 독이 마음을 짓누른다. 잠자리에 누워도 머릿속은 쉬지 않고 팽팽 돌아가는 느낌에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

이 모든 상황은 몸에 쌓이는 이산화탄소 같아서 밖으로 내뿜지 않으면 건강의 문제가 된다.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답답한데 어디에서 해독을 받을 수 있는가. 세상 어디에도 사모를 해독시켜 주는 곳은 없다.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진정한 해독을 경험할 수 있다. 쌓인 독소를 뽑아내고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는 중요한 시간이 바로 예배의 자리다. 온몸에 퍼진 독이 혈관을 막기 전에 십자가 보혈로 씻김을 받아야 한다.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사랑과 용서, 화평의 해독제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죄의 독소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생기로 호흡하여 영혼이 소성케 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움을 받는 은혜다

 

목회자의 아내는 평범한 여성인데 사람들은 특별하게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일도 척척 해내고 언제나 환하고 밝은 미소로 모든 성도를 대하며, 늘 에너지가 충전되어 있다고 믿는다. 실상은 그렇지 못한데 남편과 성도들이, 혹은 상황이 그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사역을 조정해 주는 본부이며 원동력이다. 동시에 영혼의 생수를 마음껏 마시게 하는 샘의 근원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은 예배의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와 능력으로 채움을 받는가에 달려 있다. 어떤 사역자도 예배를 도외시하고서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한다. 좋으신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모른 척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부어 주시고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다. 성령의 능력은 위대한 일, 기적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구약의 어린 사무엘을 보라. 부모에게 순종하여 성전을 지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셨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심을 모든 백성들이 알게 만드셨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삼상 3:19) 신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겁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성령의 능력을 힘입자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 받기 위해 무엇을 행했는가. 그저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을 따라 성령을 사모하며 그 자리를 지킨 것뿐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무슨 수고와 노력으로 성령의 능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사모함이 가장 지혜로운 태도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 그 품에서 쉬기를 원하면 성령은 능력을 부어 주신다. 능력을 힘입으면 복음을 외치는 일에 담대해진다. 어떤 종류의 사역을 하든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드러난다. 은혜의 보좌는 나의 골방이 되기도 하며 하나님을 묵상하는 곳 어느 장소라도 가능하다. 그러나 공적으로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자리야말로 진정한 은혜의 보좌다.

 

사단의 세력에서 보호하시고 승리케 하시는 은혜다

 

일 년 전 메르스가 온 나라를 충격에 빠트리고 경제를 마비시켰다. 신약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지만 질병에서 안전한 지대는 없다. 사람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전염병보다 우리가 더 긴장해야 되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비집고 들어오는 사단의 공격이다. 사단은 교묘하게 다가와 목회자와 성도들을 이간질 시키고 이단과 사이비들을 동원하여 교회를 흔들어 놓는다. 교회 안에는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비롯하여 원수가 몰래 뿌리고 간 가라지도 많이 있다. 목회자는 자신의 영혼을 세우고 양 떼들의 영혼이 순수하게 지켜지고 있는가에 대한 파수꾼의 책임도 있다. 영적으로 예리한 눈을 가지고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은 예배 시간을 통하여 그의 자녀들을 보호하는 영적 울타리를 만들어 주신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유월절을 만들어 주신 것처럼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다. 주님은 이미 베드로의 약함을 아셨고 베드로가 이길 수 없는 사단의 참소를 들으시고 베드로를 보호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1,32). 우리 주님의 깊은 사랑은 베드로의 약점과 배신마저 다 품으시고 그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 주셨다.

그렇다. 사단은 늘 참소하는 자로서 우리의 삶과 사역의 연약한 부분을 들추어내고 공격하지만 좋으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 약점, 모든 염려들을 다 십자가 뒤에 감추어 주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신 것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 불담으로 울타리를 쳐주시기 위함이다. 엘리사가 머무는 도단성이 아람 군대의 침공으로 두려워 떨 때 게하시의 눈을 열어 하늘의 군사를 보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영안이 열리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원한다.

 

 

사모가 온전한 예배자가 되기

어려운 이유

 

사역의 현장이 다양한 만큼 사역 환경에 따른 사모의 역할도 다르다. 사역의 모양에 따라 예배에 대한 형태가 다르지만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모의 역할에 중점을 두고 고민해 보고자 한다.

 

예배 시간의 감독자 역할을 하게 되므로

 

사모들은 누구나 다 목회자인 남편과 같은 심정으로 공적 예배를 위해 준비한다. 특히 주일 낮예배는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도 있으므로 어떻게 하든지 예배에 집중케 하고 은혜받는 분위기를 만드느라 노심초사한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를 보고(?) 떠나는 성도들은 잘 모르겠지만 목회자에게는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는 영적 씨름의 현장이다. 예배를 돕는 예배부와 음악, 음향, 영상 등 눈에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 사이에서 준비할 일이 많다. 규모가 크지 않은 교회, 개척교회는 재정적으로도 어렵고 도와줄 전문가도 없어 힘든 일이 더 많이 있다. 목사님이 설교 준비를 하시면 그 외 작고 자질구레한 제반 사항은 다 사모의 몫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사모는 자신도 모르게 예배 감독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은 못 보는데 사모의 눈에는 보이기 때문이다. 예배자로서 집중하지 못하고 사방을 끊임없이 살펴본다. 마이크는 잘 나오는지, 영상은 적절한지, 안내는 잘 되고 있는지, 분위기는 성도들의 집중에 방해가 되지 않는지, 실내온도는 어떤지를 관찰한다. 몸은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자신을 산 제물로 올려 드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때로는 봉사하는 성도들과 직접 머리를 맞대고 논의도 하고 지시도 한다. 이것은 관계가 좋을 때는 아무런 탈이 나지 않는데 조금만 관계가 불편해지면 사모에게 원망의 화살이 돌아갈 확률이 높다.

 

이민 목회하시는 사모님을 만났다. 차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사모님이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봉사를 맡은 성도들이 책임을 제대로 감당치 못하니 사모님의 마음이 안타까워 봉사자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개선을 요청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니 봉사자들은 불평을 터뜨렸다. 목사님은 성도들의 불편한 심기를 전하고 아내에게 나서지 말라고 부탁했다. 일주일에 한 번밖에 드리지 않는 예배인데 예배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는 사모님의 생각과 서툴러도 일꾼들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목사님의 생각에 차이가 있어서 약간의 갈등이 있어 보였다.

사모만큼 예배를 위해서 기도하고 애쓰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일이 매 주일마다 반복되어 사모 자신의 예배가 흐트러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진심을 몰라주는 남편과 성도로 인해 상처받는 다면 더더욱 손해다. 사모가 예배의 감독자가 되어 성도들이 예배에 집중하도록 돕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사모 자신이 진정한 예배자로 서지 못하는 것은 우려할 상황이다. 교회의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사모가 이 역할을 계속 해야 된다면 더욱 많은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목회는 나의 최선 이후에는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현명하다. 오히려 적극적인 예배자가 되어 친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 좋겠다.

 

성도들을 위해 무한정 봉사하므로

 

사모는 주일에 더 많은 일을 감당한다. 예배 시작 전에 주보나 교회 청소를 담당하고, 예배 시간이 다가오면 예배당 안내를 맡고, 그 임무가 끝나면 주일학교 부서로 달려가 교사로 봉사한다. 마침내 사모가 예배드리는 시간이면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서 돌아다니는 아이들 관리하고 교통정리를 한다. 혹여 젊은 부인이 아기를 안고 끙끙대면 사모가 친정엄마처럼 성큼 다가가 아이를 맡아 주기도 한다. 몸과 마음은 이미 분주해진 상태고 그다음에 할 일은 머리에서 맴돌고 있으니 어찌 고요하고 안정된 심령으로 예배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그뿐 아니다. 설교가 끝날 쯤이면 점심 메뉴가 떠오르면서 짧은 시간에 재빠르게 해야 할 것들이 어른거린다. 결국 먼저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가서 성도들의 식탁을 준비한다. 사모님의 손맛이 제일이라는 교인들의 말을 위로 삼아 땀 흘리며 일하고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담당한다. 오후예배가 끝나 성도들의 모습이 사라지면 그제야 사모의 역할도 끝이 나고 몸은 파김치같이 널브러진다.

그러나 영혼의 창고는 텅 비어 있다. 주님 때문에, 사랑하는 교회를 위하여 많은 일들을 감당하지만 이런 모습의 사역은 끝까지 달리기 어렵다. 아무리 튼튼한 나무토막도 불에서 다 타버리면 남는 것은 재밖에 없다. 나무는 그래도 되지만 사모가 영혼이 텅 비도록 자신을 불태워 버리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영적 공허함과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엄습하게 된다. 양 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 사명감일지라도 적절한 지혜가 필요하다.

일손이 부족하여 일인다역을 감당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사모 자신이 예배자로 올려 드리는 시간은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 사모 자신을 올려 드리는 예배에 방해가 되는 섬김, 봉사는 지속적으로 허용하면 안 된다. 예배 시간만큼은 온전히 확보하여 영혼의 안식과 재충전을 받아야 산다. 그 시간에 어떤 성도가 무엇을 요구하거나 부탁하면 정중하게 예배드려야 함을 알려주고 사양해도 된다. 혹 서운해할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어차피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키지 못한다. 지혜로운 마리아처럼 하나님 한 분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성도들의 작은 재능이라도 격려하여 섬김을 배우게 하고 지극히 작은 부분도 짐을 나누어지는 것을 가르침이 필요하다.

 

익숙함이 반복된 미지근함으로 인하여

 

목회는 긴 장거리 경주여서 힘을 잘 분배하여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회의 연수가 적을 때는 열정이 불같이 타올라 일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속에 있는 안주하는 성품과 반복되는 익숙함에 느슨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어찌 보면 과도한 헌신 이후에 지쳐 있는 마음일 수 있고 감각이 무디어지듯 영혼과 마음이 미지근해져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늘 익숙한 교회와 예배실, 강단, 예배 순서, 설교자까지 포함해서 몇십 년이 되어도 똑같은 모습이다. 성도들은 살면서 전근이다, 승진이다, 이사다 해서 섬기던 교회가 바뀌기도 하는데 사모는 목회지를 변경하지 않고는 그럴 수 없다. 성도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목회자의 말씀을 먹고 사는데 사모의 설교자는 늘 남편 목회자다. 그것 역시도 바뀔 수 없는 부분이다. 때로 는 부부가 서로 냉전 중임에도 예배의 중심에는 남편이 서서 말씀을 선포한다. 개인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종으로 인식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쉬운 사모는 별로 없으리라.

 

이렇듯 사모가 여러 가지 이유를 내밀면서 미지근한 자리에 머물러도 되는 것일까? 무더운 여름날, 냉장고에 있지 않은 미지근한 생선회를 먹으라고 한다면 먹을 사람이 있을까? 미지근함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다. 우리가 미지근한 예배자로 남아 있는 것은 죄의 문제며 영적 게으름 병에 걸렸음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복음이 더 이상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는 말과 통한다. 이것을 극복하는 길은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서 안주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내면의 열정이 살아나도록 스스로 영적 규칙을 정함이 좋다. 먼저는 영혼의 신선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고 말씀을 규칙적으로 묵상하고 은혜되는 말씀은 외우도록 힘쓴다. 예배의 기쁨을 잃어버린 요소를 찾아서 끊어 버리고 성도들과 함께 교회 안에 있는 성경공부, 전도훈련에 참여한다. 여의치 않으면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웃 교회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영적으로 살아나기를 결단해야 한다.

 

나 자신도 주일 저녁예배나 수요예배 때, 너무 피곤하여 기대감 없이 예배에 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고, 주일 하루도 주님께 헌신하고, 수요일은 식사도 제 대로 못한 채 달려온 성도들을 보게 하신다. 성도들이 묵묵히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면 부끄러워서 회개하고 다시 마음을 추스른다. 성도들의 고달픈 삶을 위해 기도하면 걱정되었던 문제들이 내 안에서 녹아내린다. 말씀을 듣는 시간에는 노트에 기록하면서 내게 주신 메시지를 찾는다. 산만함을 줄일 수 있고 예배에 더욱 집중케 되어서 좋다. 설교 노트는 다시 보고 주셨던 은혜를 회상한다. 라일락의 글을 쓰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흩어지는 성도들을 보며 영혼에 허전함이 없이, 승리하도록 기도한다. 나에게 도전을 주며 깨닫게 하는 성도들을 인하여 감사드린다.

 

 

예배가 회복되면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다

 

오래전, 교회에서 안식월을 주셨다. 두 달 동안 남편과 함께 유럽의 교회와 역사를 돌아보았다. 점차 몸도 익숙해지고 마음도 가벼워져서 여유로움이 생겼다. 그러나 방랑의 시간이 두 달 가까이 되자 영혼의 곤고함과 허전함이 밀려왔다. 유럽의 멋진 교회당은 있었지만, 지나가는 나그네인 나는 주일예배 한 번 드리고 일어나야만 했다. 내 영혼의 찌꺼기를 토해내고 온 마음을 다해 찬양하며 눈물로 기도했던 그 자리가 너무 그리웠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매 주일 만나는 그 장소, 그 성도, 그 목회자이지만 우리가 함께 지체되어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이다. 안식월을 끝내고 돌아와서 교회 마당을 밟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감격이 몰려왔다. 돌아갈 교회가 있다는 사실!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 믿음의 한 가족인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교회 마당에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였다.

이 감사와 감격이 나를 다시 뜨거운 예배자로 회복시켰다. 눈에 보이는 것이 바뀌지 않았지만 예배의 기쁨을 이어가려면 가난한 심령에서 나오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나이가 들고 목회의 경륜이 쌓이면서 더욱 주님을 닮고 싶은 갈망, 성령에 붙들린 충만한 삶을 경험해 보고 싶은 갈망이 있어야 예배를 사모하게 된다. 배부른 아이처럼 아무런 욕구가 없는데 저절로 예배의 감격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감사의 고백이 회복될 때 예배자의 간절함이 회복된다.

사역의 현장, 주변의 모든 것들로 인하여 감사하기 어렵다면 눈물을 머금고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를 올려 드리자. 저절로 되지 않으면 강권하여 올려 드리자. 우리를 측은히 바라보시는 성령께서 외면치 않으시고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실 줄 믿는다. 우리가 누구인가!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르기로 작정한 사명자다. 우리가 예배자로 회복되면 살리는 역사도 함께 회복될 것이다. 성도가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는 은혜다. 우리 모두 예배자의 거룩한 소망 을 가슴에 품고 흩어지는 예배, 삶의 예배에서도 승리하기를 기도한다. 한국과 세계 열방에서 하나님을 예배 하는 주님의 공동체들을 위해 기도한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땅과 세계 열방의 모든 교회에서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는 역사가 이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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