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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의 즐김은 피로회복제와 같습니다

 

조성희 사모(행복연구원장)

 

가을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부교역자 사모들의 체육대회가 열렸다. 나는 다른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지만 얼굴을 보고 싶어 잠깐 들렀다. 교회 지하에 있는 농구장에서 사모들이 일 년에 한두 차례 미니 운동회를 한다. 관중석에 앉아 있는 사모들은 여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 표정들이 상기되었다. 나와는 세대 차이를 느낄 만큼 젊고 예쁜 사모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마음은 함께 어울려서 뛰어 보고 싶은데 나는 이미 뛰고 노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세대다. 내가 어린 사모였던 20~30년 전은 사모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이다. 자유롭고 활발한 사모들의 모습을 보노라니 부럽다.

 

사모들의 웃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격려 메시지를 보냈다. “여러분, 오늘 미니 체육회를 통해서 마음껏 웃고 즐기세요. 사모들은 남편바라기가 되면 힘들어서 못삽니다. 사모의 자격은 혼자서 잘 놀 수 있어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풀고 스스로 즐겁게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오늘 동역자들과 함께 마음껏 즐기세요.” 행복한 모습을 뒤로하고 나오니 내 마음도 즐겁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애틋한 마음이 들어 코끝이 찡해진다. 지금은 어린 아기를 안고 까르르 웃으며 소녀같이 즐거워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원하지 않는 웃음을 웃어야 하고 말하고 싶어도 꾹꾹 참으며 남모르게 눈물지을 것이 생각나서다. 아프고 외로운 그 길을 누구라서 비켜가고 피해갈 수 있겠는가. 우리의 젊은 사모들이 자신의 정서적 건강을 위해 즐거움을 찾고 행복하길 소망한다.

 

즐거움은 피곤을 풀어주는 피로회복제와 같다. 현대인들이 운동을 강조하고 커피 한 잔을 그토록 애타게 찾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바쁘고 피곤한 일상의 무게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의 환기를 시켜 보려는 몸부림이다. 마음의 환기는 삶에 대한 즐거움과 의욕을 만들어 준다. 사모가 정서적 순환을 위해서 나만의 공간, 여유, 취미생활을 가진다면 그 시간들은 새로운 에너지가 된다.

사모들은 일인 다역을 감당하느라 에너지를 다 소진할 때까지 달린다. 쉬지 않고 달리다가 낡은 타이어를 교체하지 못하면 타이어가 찢어지는 것처럼 마음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울 수 있다. 멀리 가려면 마음의 즐거움과 동무해서 가는 것이 지혜롭다. 즐거움을 경험하는 마음은 삶의 작은 조각에서도 의미를 발견한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떨어지는 빗방울, 싱그러운 바람 냄새, 꽃 한 송이, 소담스럽게 흩날리는 눈송이들도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 생기가 되살아난다. 사모의 삶에서 즐거움, 즐김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다. 고단한 마음을 회복시키는 피로회복제가 되므로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모의 즐거움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기상 캐스터가 전하는 일기예보에 민감하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심정이 영향을 받고 일정이나 행동반경이 정해진다. 날씨가 우리 삶에 밀접한 관계가 있듯이 사모의 삶에서 배어나오는 정서적인 측면도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만약 사모의 마음이 늘 흐리고 음산하다면 어떻게 될까? 꽁꽁 얼어붙은 빙산처럼 찬바람만 쌩쌩 불어오면 어떻게 될까?

사모가 삶의 즐거움을 상실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은 남편과 자녀들이다. 목회자는 매사에 아내의 기분을 고려해야 하고 때로 전전긍긍하게 되고 당당하게 나아가지 못한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우울한 분위기를 접하면서 어머니가 힘들게만 보이니 불행하다고 느낀다. 자신들 역시 슬프다고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가족을 돌아보지 않으실까 생각하여 믿음의 손해를 보기 쉽다. 자녀들은 대부분 어머니의 정서적인 우산 아래에서 같은 정서를 배우기 때문이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사모가 늘 피곤에 찌들어 우울하고 힘겨운 모습이면 성도들의 마음도 어두워진다. 그러나 사모가 밝고 즐거운 모습이면 성도들도 안심이 된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얼굴 표정에서 안도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심지어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목회자를 통해 주님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성도들에게 역할 모범이 되고 위로와 도전이 된다. 세상 속에서 영적 전쟁을 치르는 성도들도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리라 믿는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그럼 사모는 우울하면 안 되고 슬퍼도 안 되고 위선을 행하라는 말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자신의 모습이 아닌 가면을 쓰고 즐거움을 지어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사모가 즐겁게 사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여 즐거움의 샘이 마르지 않기를 원함이다.

 

즐거움의 파이를 키우는 레시피

 

요즈음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은 요리에 관한 내용이다. 주방에만 숨겨져 있던 셰프들이 나와서 저마다의 솜씨를 자랑한다. 각각의 맛을 설명할 때 얼마나 달콤한지 시청자들이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자신도 그 재료를 사서 직접 만들어 본다. 문제는 셰프에게 들었던 그 맛이 안 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셰프의 음식은 그 만의 비법 레시피가 있음이다. 재료만 똑같은 것을 구비했다고 그 맛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고 즐거움의 파이를 키우려면 즐거움의 원칙, 레시피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즐거움을 위한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보자. 내가 살면서 즐거운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응용하고 있는 나만의 레시피를 소개하고자 한다.

 

1. 무엇이든지 사랑으로 행하면 즐겁다

 

몇 년 전, 일본의 홋카이도를 방문하면서 일본 여류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의 기념관을 방문한 적 있다. 그녀는 빙점, 길은 여기에라는 대표적인 소설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가다. 1964년 미우라 아야코는 아사히신문이 주최하는 1,000만 엔 현상 소설 부문 1위로 뽑혔다. 더구나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녀의 삶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미우라 아야코는 20대의 나이에 폐결핵과 척추 질병으로 인해 10년 넘게 병상에서 살았다.

그녀의 소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1955, 공무원이었던 청년 미쓰요가 우연히 이 병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미쓰요는 병상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그녀에게 성경을 읽어 주고 찬양을 불러 주었다. 이후 1959, 두 사람은 30대의 나이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아야꼬의 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일상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남편 미쓰요는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아내가 구술한 내용을 글로 옮겼다. 미쓰요는 30여 년의 세월 동안 아내의 충실한 비서가 되어 아내를 위한 인생을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가 어떻게 병든 여인을 아내로 맞으며 아내의 인생을 위해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가? 미쓰요는 대답했다. “나는 아내와 3일만 살아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결혼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아내에게 헌신하겠다는 사랑이 있었기에 힘들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밤늦게까지 앉아 서로 이야기하며 글을 완성해 나갔고 아내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감사요, 즐거움 자체였습니다.”

미우라 아야코의 기념관에서 80세가 넘은 미쓰요를 만났다.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맑고 깨끗하여 소년같이 보였다. 그 부부가 함께 지냈던 다다미방과 손때 묻은 현장을 둘러보며, 사랑의 위대함은 어떤 일도 즐거움으로 감당케 하는 능력이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사모들이 감당하는 사역과 삶의 현장도 사랑하는 마음을 안고 행하면 즐거움과 동무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은 즐거운데 육체의 피곤함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고 피폐해지는 일은 없다. 일이 힘들지 않아도 기쁨이 상실되면 몸과 마음의 병을 앓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면 즐거울까로만 접근하지 말고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질까 생각해 봄도 좋겠다.

 

2. 매사에 소망의 안경을 쓰면 즐겁다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특별한 즐거움이 있겠는가. 현실을 바라보면 허무하고 슬픈 일도 많다. 목회에 대한 근심, 자녀에 대한 걱정, 미래의 필요한 공급 등 우리를 잠 못 이루게 할 고민은 끝이 없다. 근심과 염려를 이겨내려면 즐거움의 파이를 키우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바로 소망의 안경을 쓰는 것이다. 소망은 무작정 긍정의 힘을 주장하거나 계획도 세우지 않고 큰소리만 치는 만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소망은 로마서 828절의 말씀처럼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내일을 꿈꾸며 정금같이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사람은 바로 소망의 안경을 쓴 사람이다.

우리가 소망의 안경을 쓰지 않는다면 우리 속사람이 우리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일과 사건을 대할 때 자신의 기질과 성품을 따라 사물을 보는 버릇이 있음이다. 부정적이거나 소극적, 혹은 우울하고 회의적인 성향은 여간해서 긍정의 마음과 생각을 갖지 못한다. 늘 문제만 크게 보이고 못마땅한 것이 두드러지니 미래는 더욱 불안하고 암울하게 느껴진다. 희망의 노래를 부르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성향을 뛰어넘어 즐거움이 채워지려면 상황의 문제인지, 자신 속에 있는 성향 때문인지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의 타고난 기질과 성품은 한 번에 뒤엎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주는 소망의 렌즈를 착용하면 된다. 성령의 생수로 소망의 렌즈를 깨끗하게 닦아 소망이 잘 보이게 하는 것도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방법이다. 오늘보다 내일은 더 많은 은혜 주실 것을 믿으면 눈물도 웃으며 삼킬 수 있으리라.

 

3.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하면 즐겁다

 

아이들이 어릴 때, 두 아이의 나이 차가 많아 둘째는 항상 형을 따라 하곤 했다. 작은아이의 눈에 무엇이나 잘하는 형이 특별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문제는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인사하는 큰아이를 보고 말한다. “~ 잘생겼다. 아빠랑 똑 닮았네.” 나란히 서서 어른들을 바라보는 꼬맹이에게는 아무런 말이 없다. 심지어 근데 둘째는 누구 닮았어요?”라고 묻는다. 나는 얼른 맞받아서 ~ 우리 둘째는 엄마랑 똑 닮았어요.” 그러면 아이는 안심하는 표정으로 돌아선다. 어른들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혹여 작은아이가 상처받고 자신의 존재를 가치 없게 받아들일까 염려하는 마음이었다. 청년이 된 두 아이는 생김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잘하는 것도 다르다. 한 부모의 자녀지만 지극히 독자적인 존재다.

어린아이들의 이야기에서 보듯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누군가와 연결하려는 고정관념이 있고 서로 다른 것이 눈에 띄면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나를 저울질한다면 자신의 삶을 즐기고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목회자인 우리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를 평가하는 태도는 우리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외모를 비롯하여 기질과 은사, 환경의 다름, 금 그릇과 질그릇의 비교, 큰 대접과 간장 종지의 차별감을 느끼는 것이다. 즐거움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다.

목회자가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나 하나만을 사랑하시는 것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좁은 길로 들어선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으로 불러 주신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달란트는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사명의 본질은 똑같다. 이 세상에서의 선물 보따리가 조금 작은 것뿐이다. 오히려 천국에서는 땅 위의 선물 보따리가 작은 종들에게 큰 상급이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복음의 동역자들과 비교하는 경쟁을 버리고 우리의 대적 마귀와 겨루어 이기는 즐거움이 가득하길 간구한다.

 

4. 작은 일에 크게 감동하면 즐겁다

 

큰소리 내고 웃으면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하여 배를 잡고 억지로 웃음을 연습하는 사람을 보았다. 억지라도 웃는 연습을 하면 나중에는 웃음보가 터진다고 한다. 연습하면 웃음보만 터지는 것이 아니다. 즐거운 마음을 가지는 것도 즐거움을 선택하려는 결심과 노력으로 가능한 부분이 있다. 바로 작은 것에 감사하고 감동하는 태도를 익히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고 작은 친절에 크게 감동하고 사소한 일에도 기쁨을 표현하는 연습이다. 감탄사를 많이 사용하면 자신의 마음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마저 감탄에 전염되게 만든다. “! 정말 좋아요, 어머나~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우리 스스로 감동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살면서 깨닫는 것은 누군가 내게 다가와 나를 감동시켜 주고 기쁘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감동을 경험할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을 따라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태도를 선택하여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지혜다.

 

요즈음 나는 매일 우리 교회가 세운 기독학교에 출근한다. 몸이 피곤한데 그 피곤보다 더 큰 감동이 나를 움직여서 즐겁게 학교 간다. 어린아이의 청순한 눈망울, 장난기가 얼굴 가득 묻어나는 개구쟁이들은 작은 것에 크게 반응한다. 그들을 보노라면 감동이 무엇인지 느껴진다. 어느 날, 1학년의 작은 아이가 다가오더니 조그마한 것을 내 손에 쥐어주며 말한다. “사모님, 선물이에요.” 받은 손을 펼쳐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에게게~” 방울토마토 한 알에 노란색의 포스트잇을 감싸서 준 것이다. 노란 종이에는 비뚤비뚤 눌러 쓴 글씨가 보인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날, 나는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감동했다. 방울토마토 한 개가 그렇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사람들은 나의 건강을 염려해 주는데 이런 즐거움 때문에 힘든 줄 모르고 감당한다. 어디서 이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되레 감사한다.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마음이 에너지를 최고로 끌어내는 것을 느낀다.

이런 즐거움이 주는 은혜를 알기에 늘 기쁜 마음을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마음이 곤고하고 어두운 날, 자동차를 몰 때면 자동차 안에서 혼자 심령 부흥회를 한다. 큰소리로 찬양을 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방언으로 기도한다. 때로는 사탄을 향해 명령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어린 딸처럼 칭얼거린다. 그러면 신기하게 어두운 마음이 사라진다. 감사한 마음이 가득해져서 길가의 가로수, 나뭇잎 하나, 지나가는 사람까지 다 사랑스럽게 보인다. 시인이 된 것처럼 감탄사를 터뜨린다. 얄미운 사람도, 근심되던 일도 바람결에 날아가는 티끌같이 작아진다.

 

5. 진리가 주는 자유함을 누리면 즐겁다

 

오래전의 한국 교회는 사모들의 즐거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사모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따로 떼어 놓는 것은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목회환경도 달라지고 사모의 역할도 바뀌고 성도들의 인식도 다양해졌다. 목회자를 폭넓게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분위기도 많다. 사모에게 율법적이고 금욕적인 모습으로 살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목회자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하여 즐거움의 시간을 가꾸는 것을 적극 권하기도 한다. 이는 건강한 목회를 위하여 멀리 바라보는 안목이다.

사모가 스스로의 즐거움을 찾지 못하면 자신이 정서적으로 기댈 언덕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게 된다. 바쁜 남편을 한없이 바라보거나 성도들에게 의지하다가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모의 즐김이 복음의 진리에 방해되지 않고, 본질이 지켜지는 데 어려움이 없다면 즐거움을 위한 시간은 보장되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임을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뜰 안에서 마음껏 뛰놀고 기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원하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1-32).

목회자가 골프를 치면 흉이 되는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이 든 사람이 운동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 골프라고 하니 누가 함부로 비난하겠는가. 사모들도 이제는 용기를 내어 자신이 좋아하는 것,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을 찾아서 시도해 보자. 배우는 것이 좋으면 평생교육원의 문을 두드리고, 미술에 관심이 있으면 하얀 캔버스에 그림도 그려보고, 다양한 재료와 소재를 이용한 미술 공예를 해도 된다.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악기도 배우고 요리, 원예를 비롯하여 작은 생물을 키워보는 것도 좋겠다. 열대어를 비롯하여 새, 거북이, 다람쥐, 파충류 등은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어떤 도시에는 사모들만을 위한 사모 합창단이 활동하는 것으로 안다. 얼마나 좋은 모임인가. 사모의 건강한 취미생활은 삶의 윤활유가 된다. 꽁꽁 얼어붙은 대지 위에 비치는 햇살과 같다. 늘 고단하다는 생각을 접고 무엇인가 선택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끝이 나고 신앙생활의 방황은 교회 정착에서 끝이 납니다우리 교회의 주보 제일 윗면에 있는 글귀다. 이 글귀는 읽을수록 인생의 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함이 느껴진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성도들의 삶을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공식이 있는데 그 공식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서 인생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혀 준다.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함의 근원이 이 안에 있다는 뜻이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삶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은 아버지의 품 안에서 그분과 충분한 교제를 누리는 것이다.

 

1.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질 때 가장 큰 즐거움이 있다

 

이 세대의 흐름은 달콤한 것, 스피드한 것, 즐기는 것, 화려한 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집안에 가만히 있어도 안방까지 들어오는 현란한 광고, 드라마 속에서 보여주는 세속의 가치와 화려한 삶이 사람들의 생각 깊숙이 파고들어 온다. 마치 저것이 없으면 우리의 삶이 불행할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세속화의 바람이다. 이 바람은 성도와 목회자, 교회에까지 불어온다. 이제 우리의 즐거움은 내가 원하는 것을 사고 좋은 것을 누려야 즐겁다고 여기는 부분이 없지 않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즐거움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의 시간, 은혜의 교류가 충만할 때 누리게 되는데 이 사실을 간과하고 달콤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다.

때로는 목회자도 인스턴트식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러울 때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능적인 역할이 목회자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영이 나의 삶을 통해서 흘러나와야 한다는 인식이 있을까. 사모인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 자신을 어떻게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고 싶다. 즐거운 마음을 잃어버렸다면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뿐 아니라 영혼의 골방이 비어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배가 고픈 사람은 어떤 일이나 구경거리에도 흥미가 없다. 금식을 통하여 배고픔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충분히 아는 바와 같다. 금식이 끝날 때까지는 어떤 욕구도 우리를 움직일 수 없다.

영혼의 굶주림을 대비시켜 보자. 영혼의 저장고가 텅 비어버린 굶주린 사모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으로 치장하고 원하는 바를 다 누리고 있다 해도 과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영혼의 허전함이 채워지지 않는 동안은 육신의 어떤 것으로도 영혼에 만족함을 줄 수 없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다른 데서 헤매고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우리가 3일간 기도하지 않아도 영적 허기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면 영적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우리의 삶에 영혼의 큰 기쁨을 맛보는 것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으리라. 영원한 즐거움, 목마르지 않는 즐거움은 오직 한 길, 그분과 깊은 사귐의 시간을 통해서 얻는다.

 

2.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때 가장 큰 즐거움이 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홍해를 가르는 바람의 위력과 그 바람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는 것 같다. 기적을 직접 경험하고 목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 감격은 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미리암이 소고치며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녀의 찬양은 길고 긴 서사시 같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감격하는 그 즐거움은 세상이 주는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부족한 우리에게도 가끔 미리암과 같은 찬양의 고백이 터져 나올 때가 있다. 부족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확연히 보일 때다. 막다른 골목 앞에 선 막막함 앞에서 새로운 문이 열리고 빛을 경험하는 은총이다. 나 같은 죄인을 그분의 도구로 사용해 주신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 온몸이 전율케 된다. 이 즐거움은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다.

 

며칠 전,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목회하는 후배 사모님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각각 힘든 목회 현장의 기도제목을 나누는데 가슴이 울컥했다. 한 사람의 성도가 말씀으로 세워져 가는 것에 감격하는 모습에 큰 은혜를 받았다. 어른 목회가 잘 안 되는 어느 사모님은 말했다. “지역에 있는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다 어느새 19명이 되었는데 나는 그들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교회를 여기에 세우셨구나 깨닫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기도합니다.” 커다란 아파트 단지 사이에서 작고 초라한 아이들 돌보는 것을 큰 사명으로 받고 순종하는 사모님께 박수를 드렸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과 은혜로움이 가득했다. 누가 그의 모습을 보며 불행하다고 감히 평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의 즐거움 가득한 모습 아닌가!

오늘 우리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즐거움이 사라졌다면, 매일 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간절함과 열망의 불꽃이 사그라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면 좋겠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들을 살리고 세워가는 것을 목도하면 우리의 온몸과 마음이 기뻐 춤을 추리라. 육체의 질병이 치료되어도 기뻐서 펄쩍 뛰는데 사망의 문 앞에서 생명으로 살아난 현장을 목도하고 어찌 뛰지 않겠는가. 먼지 같은 존재인 우리에게 생명 살리는 역할을 맡기셨으니 그보다 더 큰 감격은 없다. 사모의 최고 최후의 즐거움은 생명 살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리라.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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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2017 Autumn (29호) 성도의 교제는 영적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2017.09.28
32 2017 Summer (28호)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2017.06.23
31 2017 Spring (27호) 복음은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생명의 피입니다 2017.04.05
30 2016 Winter (26호) 건강한 리더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에서 출발합니다 2016.12.28
29 2016 Autumn (25호) 말씀의 훈련은 '내가 복음'을 '주님의 복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2016.09.21
28 2016 Summer (24호) 사모의 영광은 예배의 영광에서 채워집니다 2016.06.22
27 2016 Spring (23호) 교회는 어두운 밤 외로이 서 있는 등대입니다 2016.03.29
» 2015 Winter (22호) 사모의 즐김은 피로회복제와 같습니다 2016.01.04
25 2015 autumn (21호) 사모의 지성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2015.10.06
24 2015 summer (20호) 사모의 멋은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2015.07.15
23 2015 Spring (19호) 쉼은 크고 넓은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2015.04.02
22 2014 Winter(18호) 절제함은 우리의 질주를 막아주는 성령의 브레이크입니다 2015.01.09
21 2014 Autumn(17호) 사랑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것입니다 2014.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