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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의 멋은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조성희 사모(행복연구원장)

 

일 년 사계절 가운데 봄이 무르익는 때를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이는 만물이 생동감 있게 살아나 본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사모도 만개하는 꽃처럼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풍부하게 소유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모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부터,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이나 멋을 꽃 피워보지 못하고 사역자로서의 걸음을 걷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사모라는 이름의 굴레 안에 갇혀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호의 라일락은 지금까지 다루었던 목회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사모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는 이라는 주제를 정했다. 구체적으로 기획하다 보니 방향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여성들을 위한 잡지처럼 순전히 외모적인 면에서만 다루어야 하는가, 우리가 추구하는 사모들의 멋이 세상의 것과 똑같은 것이어야 하는가. 멋에 대한 개념도 각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개인적인 특성과 연령, 환경의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니 조심스러운 마음이 든다. 나 역시 멋을 논하기에는 주저함이 많지만 겉사람은 쇠약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며 멋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이란, 사전적인 용어에서는 옷, 얼굴, 태도 등에서 드러나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맵시, 사람이나 사물에서 엿보이는 고상한 품격이나 운치 등을 가리킨다. 단순한 한 개의 요소가 아닌, 여러 부분이 어우러지는 조화를 통해서 아름다움이 풍겨질 때 멋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잘 지은 건축물을 보거나 완성도 높은 미술 작품을 감상하며 감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얼굴이 예쁘지 않은 여성도 얼굴 표정, 옷맵시, 말씨, 교양 있는 태도가 잘 어우러지면 멋스럽다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외모의 조화로운 꾸밈에 교양과 지성미가 곁들여져서 자기 관리가 잘 이루어진 여성이라는 뜻이다. 결국 멋은 외모를 치장함과 동시에 내면의 태도가 함께 어우러져서 그 사람의 멋을 만드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멋이 유행 따라 바뀌고 상품화되어, 진정한 멋의 의미를 간과해 버린 채 외모지상주의로 기울어진 느낌이 많다.

세상의 흐름이나 유행이 멋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든지 사모의 멋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분명한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벧전 3:3-4). 성경은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의 매력을 외모의 멋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내면의 정절과 성숙됨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모가 추구하는 진정한 멋은 세상의 멋으로만 가꾸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고유한 멋이다. 이 멋은 온몸으로 풍겨내는 향기가 되어 교회공동체 안에 스며든다. 꽃들이 각각의 향기가 있는 것처럼 사모의 멋스러움도 독특한 향기가 되어 감출 수 없다. 장미의 향기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라일락의 은은한 향기 되어,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그 향기에 취하게 만든다. 사람의 마음까지 흠뻑 적셔주는 격조 높은 멋을 소유한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은 사모. 이 세상 어디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모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사모가 여성의 아름다움과 멋을 주저하게 되는 이유

 

얼마 전, 담임목회지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사모님을 만났다. 반가워서 서로 안아주며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사모님! 담임목사의 아내가 되어서 그런지 더 멋있어요. 오늘 정말 예뻐요.” 나의 칭찬을 듣자 사모는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모님, 사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렇게 못 입어요. 오늘은 사모님 만나는 특별한 날이어서 제가 입고 싶은 대로 입어 보았어요.” “아니, 왜요?” “우리 교회에는 제가 젊은 사모니까 모두 저를 주목하세요. 어르신들은 저를 딸처럼 잘 품어주시는데, 어떤 교우들에게서는 조심스러운 느낌을 받아요. 아예 신경이 쓰이지 않도록 어두운색으로 입고 최대한 수수하게 입어요.” 대도시에서 목회를 하는데도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안타까웠다.

20여 년 전의 세월을 거슬러 돌이켜 보니, 나 역시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남편의 옷매무새, 헤어스타일까지 일일이 신경 썼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서울에 갔던 남편이 다른 목회자의 손에 이끌려 기독교 문화 사역자가 운영하는 미용실을 다녀왔다. 당시 서울의 헤어스타일은 요즘 20대의 청년들같이 머리를 귀 뒤까지 짧게 올려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30대의 담임목사가 머리까지 짧게 쳤으니 전형적인 담임목사의 모습이 아니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문제는 성도들의 마음이었다. 젊은 교우들은 목사님이 자신들처럼 젊어졌다고 좋아하고, 연세 드신 교우들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여 정식으로 말씀하신 교우도 있었다. “사모님, 목사님 머리 스타일이 너무 안 맞는 것 같아요. 다음에는 사모님이 신경 좀 쓰면 좋겠어요.” 지금은 긴 세월 동안 성도들과 친밀해지고 복음의 동역자 관계여서 오히려 많은 사랑과 이해를 받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교회마다 목회자를 대하는 환경과 문화는 각기 다르겠지만 위에서 말한 젊은 사모의 이야기는 오늘 목회현장에 있는 많은 사모들의 현실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기본 의식 수준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사모의 위치와 역할, 성도들의 관념은 많이 변하지 않았음을 보는 것이다. 사모들도 성도들의 바람에 맞추다 보니 자연스레 자신의 취향이나 스타일을 포기하게 된다. 어쩌다 좋은 것이 생겨도 자신 있게 착용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수수하고 검소한 것이 더 은혜롭다고 여기며 주의 종으로 합당한 사모가 되려고 애썼다. 외모에 신경이 쓰이거나 예쁜 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 들면 은혜가 떨어진 탓으로 돌리고, 늘어진 피부와 주름살에 마음이 서글퍼지면 정상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왠지 자신이 세상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지금까지 사모들은 교회의 덕이 되고 성도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려는 마음 때문에 일편단심 사역자다운 모습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사모들이 주저하며 잊고 있었던 여성의 매력, 아름다움을 가꾸는 즐거움이 회복되면 좋겠다. 이 작은 즐거움은 사모를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할 뿐 아니라 삶의 활력소도 만들어 준다. 영적인 자신감과 더불어 한 여성으로서의 자신감도 안겨주어 목회현장에서 당당하고 멋있는 사역자가 되리라 믿는다.

 

멋스러운 사모는 자신을 가꾸려고 노력한다

 

지금은 천국에 계시지만, 한국 교회가 다 아는 훌륭한 목사님을 가까이 모신 적이 있다. 교회는 초창기에 강력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고 성도들은 뜨겁게 전도하러 다녔다. 그때 목사님께서 여성 리더들에게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복음 전하러 다닐 때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지 마세요. 살림 살다가 거리로 뛰쳐나간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단정하게 입고 가방도 깔끔한 것을 들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가꾸셔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그 이미지 여하에 따라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 때문에 복음이 가리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당시의 교회 문화에서 그런 지적을 하셨다는 것은 대단한 인식이라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똑같은 말씀을 듣고 다르게 해석하는 성도들이 있었다. “우리 목사님은 전도할 때 좋은 옷 입고 비싼 가방을 들고 다니라고 하시네. 돈 없는 사람은 전도도 못 하겠다.” 목회자가 그렇게 말씀하신 본질을 놓쳐버리고 딴소리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가꾸기 싫어하는 자신의 게으른 성품을 합리화시키는 고집스러운 태도라 여겨진다.

 

사모가 좋은 이미지를 위해 가꾸고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성도들은 사모의 영성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외적인 매력을 느껴야 마음을 열고 다가온다. 우리는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상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을 상대로 사역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사무엘은 왕을 세우는 기름부음의 자리에서 출중한 외모가 눈에 띄는 엘리압에게 다가갔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행동을 제지하면서 주신 말씀이 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대선지자도 사람의 외모에 마음이 끌린다면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우리 주변에서 널리 회자되는 말이 생각난다. “여성의 나이 40이 넘으면 미의 평준화가 일어난다. 나이 들수록 화장을 하고 자신을 가꾸는 것은 상대방을 향한 배려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성도를 존중하는 사모라면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무심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태도다. 자신을 가꾼다는 것이 꼭 많은 돈을 들여 치장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인다운 품위와 자신만의 향기를 간직하라는 뜻이다. 매일 아침, 자신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자신을 가꾸는 사모는 멋스러움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사모가 가꾸어야 할 외적인 멋

 

나 역시 멋에 대한 조예가 별로 없는 편이어서 나의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공감이 될지 모르겠다. 조금은 어색하지만 내가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나누는 것으로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용기를 내본다.

 

* 나만의 멋을 위하여

사모는 공인이며 지도자의 아내니, 외모를 가꾸는 것이 필요하다. 화장이나 헤어, 의상, 모든 영역에서 나에게 잘 맞는 멋을 가꾸려면 전문가에게 물어보고 잡지나 TV, 인터넷, 혹은 동네 가게의 주인에게라도 물어서 좋은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다. 배우지 않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어색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당하게 물어서 나의 멋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특별한 철학이나 피부 트러블이 없다면 적당하게 화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화장을 할 때는 자신의 피부톤에 맞는 색상을 선택하고 얼굴형에 맞는 화장법도 조언을 받으면 좋을 것이다. 헤어스타일도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알아서 해주세요”, “파마 자주 하지 않도록 최대한 볶아주세요라고 주문하면 멋과는 거리가 좀 멀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유행을 따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전문가 몇 사람에게만 조언을 들으면 자신의 얼굴형에 맞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으리라.

옷을 구입할 때도 자신이 입고 싶은 색상과 디자인의 옷을 골라야 한다. 늘 수수하게 있던 사모가 어느 날 자신을 꾸미고 멋을 내면 성도들이 못 보던 모습이어서 살짝 눈살을 찌푸리거나 뒷말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내 돈으로 내가 사 입는 옷인데 당당하게 입고 싶은 옷, 원하는 색상을 골라보자. 단지 너무 화려하거나 자신의 체형에 어울리지 않은 옷, 유행에 민감한 옷은 조심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다.

특히 나이가 든 중년 이후에는 더욱 외모를 단장함이 중요하다. 젊을 때는 아무렇게나 입어도 젊음 자체가 아름답지만, 나이가 들수록 외적인 멋이 스스로의 격을 만들어 가는 데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매사에 귀차니즘이 생겨 대충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것을 탈피하려는 결심과 노력이 없으면 어느새 여성의 매력이 사라져 버리고 남성호르몬이 강하게 발산되는 중성(?)의 여인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

 

* 젊은 사모들을 위하여

요즈음 20~30대의 젊은 사모들은 외적인 멋에 대해서는 최신 정보를 꿰뚫고 있기에 멋에 대한 조언은 필요치 않은 것 같다. 대신에 기존의 목회자의 아내들과 많은 세대차가 느껴지는 부분을 말하고 싶다. 이 세대차는 길지 않은 세월임에도 우리 사회가 급변하고 가치체계가 달라진 것이 한몫을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젊지만 지혜롭고 사명이 투철한 사모들도 많이 있는 반면, 가끔 어떤 사모들은 자신의 신분이나 역할에 대한 인식이 없이 자유와 개성에 대한 강조점이 더 많은 것 같다. 사모인데도 교회를 출입하면서 스키니를 입고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심한 경우는 짧디짧은 스커트와 핫팬츠에 민소매 차림으로 교회를 활보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서울의 어떤 교회는 부교역자 사모들을 위한 매뉴얼을 만들었겠는가. 그 매뉴얼에는 이런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외적인 멋은 단순하게 멋으로만 끝나는 부분이 아니다. 좀 더 살펴보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등산복, 파티복, 회사 출근 복장이 다르듯이 그의 마음과 태도가 외모에 반영된다는 말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부교역자든 담임 목회자든, 목회자의 아내는 모두 사모다. 사모는 스승의 부인이라는 뜻이고 지도자와 같은 격을 유지함이 옳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이가 젊을수록 외적인 멋에 지도자라는 의식을 담은 품격을 더 많이 실어야 한다.

 

* 담임목회로 부임하는 사모를 위하여

사모들이 부교역자의 아내로 있을 때는 자유로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남편이 마지막 책임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모가 져야 할 짐이 별로 없다. 하지만 담임목회지를 향해서 나아갈 때는 매사에 신경이 쓰인다. 특히 여성도들 중심에 서 있게 되는 사모는 외모를 꾸미는 부분도 고민이 되어 질문을 한다. “사모가 조금만 꾸미면 화려하다고 흉보고 너무 수수하면 촌티 난다고 한다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우리 교회에서 담임목회지로 떠나는 사모들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사모님은 시집가는 신부예요. 신부가 자신의 취향이나 고유한 멋을 너무 죽이면 힘들어서 오래 버티지 못해요. 영적인 부분이나 인격적인 부분은 성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신뢰를 쌓는 것이 당연하지만,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 것은 사모님의 고유한 영역이에요. ‘나는 이러이러한 스타일을 좋아한다라고 보일 수 있도록 옷의 색상이나 디자인도 마음대로 정하세요. 처음이니까 성도들의 눈치를 보다가 세월이 흐른 후 이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해도 되겠지하면 성도들이 말할 거예요.요즈음 우리 사모님이 평소와 다르게 튀는 옷을 다 입고~ 변했네.’ 아예 처음부터 사모의 품위를 잃지 않는 선에서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과 색상을 선택하고 당당하게 입어야 해요. 혹 취향에 맞지 않아서 싫은 내색을 하는 성도가 있다 해도 시간이 흘러 정이 들고 신뢰가 생기면 문제 삼지 않는답니다.” 막상 신임 사모들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겠지만 사모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멋스러움이 손해 볼 필요는 없다. 약간의 질투를 감당해 낼 수 있다면 오히려 멋진 사모를 통해서 여성도들의 역할 모범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향기로 드러나는 사모의 내적인 멋

 

향수가 사람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 데 쓰이듯이 사모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도 있어야 한다. 이 향기는 외적인 멋을 더욱 고상하고 우아하게 만들며 존경과 신뢰를 함께 얻게 된다. 사모가 가꾸는 외적인 매력은 이 향기와 더불어 나타날 때 완성된 멋이 된다. 내면의 향기를 잃어버린 외모의 가꿈은 그리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멋스러움이 묻어나는 내면의 향기는 어떤 모습일까? 나의 소견을 따라 몇 가지만 생각해 보고자 한다.

 

* 지혜로움이 흘러나오는 사모

지혜로움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 사물에 대한 상황을 잘 파악하고 현명하게 대처해 내는 정신적 능력이라고 일컫는다. 이 지혜를 가진 여인이 성경에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다. 성경은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삼상 25:3)라고 묘사했다. 그녀가 어떤 사연으로 불량자 나발의 아내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지혜로움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 아비가일은 상황 판단 능력이 탁월했다 : 가문이 멸망할 위기의 순간에 두려움에 떨지 않고 신속한 판단을 내려 위기를 극복했다. 우리에게도 다양하고 긴급한 상황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누구와 무엇을 의논하며 어떤 과정을 밟을 것인지, 그 시기가 지금인지, 묵혀 놓고 기다려야 할지 분별하는 능력이다.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남편이 힘들어할 때, 상대의 입장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관점으로 남편을 도울 수 있다면 슬기로운 사모다. 목회자는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면 안 된다. 유리그릇끼리 마주치면 부서지거나 금이 생겨 다시 회복할 수 없음이다. 어떤 일도 감정이 격해진 순간에 결정하는 것은 일을 그르치기 쉬우므로 마음의 풍랑이 잠재워질 때까지 결정을 유보하는 것도 현명한 판단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이성과 논리를 앞세우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판단과 대응 방법을 여쭙고 그 뜻을 따라 움직이는 사모가 지혜로운 모습이다.

 

- 아비가일은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정확히 알았다 : 자신은 지역의 유지며 소문난 갑부의 아내지만 마치 종인 것처럼 다윗의 발 앞에 납작 엎드렸다. 한 남편의 아내로서 남편의 잘못을 자신의 죄라고 고백하며 철저하게 낮아졌다. 지혜로운 사모는 자신이 영적 지도자인 것을 알지만 목회자보다 앞서지 않도록 조심하는 자세를 가진다. 언제나 자신이 설 자리와 앉을 자리를 구분하는 것이다. 때로 고약한 성도들은 사모는 담임목사가 아니므로 사모가 설치면(?) 꼴 보기 싫다는 고백을 털어놓는다. 어디까지나 그 성도의 주관적인 견해지만 사모 스스로도 자신이 조연임을 잊지 않는 것이 상처를 덜 받게 된다. 사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모의 역할은 하나님의 무대에서 영원한 조연이다. 어느 때는 말없이 지나가는 엑스트라(extra)가 되기도 한다. 호수 위에 유유히 떠 있는 백조의 두 발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수고하는 배역이지만 칭찬을 받기 어렵다. 그럼에도 겸손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모를 하나님은 귀한 여인으로 보시리라.

 

* 언행의 품격이 느껴지는 사모

말과 행동은 자신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며 관계 형성에는 최고의 도구로 사용된다. 언행의 습관과 독특성은 대부분 삶의 형태에서 빚어지고 자기를 중심해서 상대를 보려는 경향이 다분히 있다. 품격 있는 언행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의식과 훈련이 몸에 배어 있을 때 드러난다. 사모는 사역의 특성상 성도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언어생활에서 지혜로워야 한다. 가까운 사이라고 수다쟁이가 되거나 농담이 지나치면 품위가 떨어진다. 대화를 나눌 때는 먼저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태도를 가짐이 필요하다. 잘 들어주기만 해도 훌륭한 상담가라고 하지 않는가. 듣는 것은 상대방의 심정에 공감하는 것이므로 존중과 사랑이 느껴진다. 충분히 들은 후 필요 적절한 말로 상대를 격려해준다면 은쟁반에 금 사과 아니겠는가.

얼굴 표정과 태도 역시 의사소통의 한 방식으로 행동언어라고 부른다. 그만큼 얼굴 표정과 태도는 상대에게 나의 의사를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기도는 많이 하지만 늘 얼굴이 어둡고 무표정한 사모, 일에 시달려 항상 피곤에 찌들어 있는 사모, 짜증과 불만이 섞여서 볼멘 얼굴로 말하는 사모는 자신이 불행한 사역자임을 선전하는 것과 같다. 그의 얼굴 표정은 상대방에게 그 어떤 메시지보다 강력하게 전달된다. 사모의 수고가 특심하지만 그의 사역은 반쪽의 열매를 거두게 될지 모른다. 반면에 단아한 복장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예의 바른 사모의 모습, 부드럽고 따스한 어조로 먼저 다가가 인사하는 사모의 모습, 진정성이 느껴지는 친절로 배려하는 사모의 모습에는 진정한 품격이 느껴진다. 목회현장의 숨겨진 구석마다 사모의 영향으로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얼마나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으면 복수하기 위하여 달려온 다윗의 분노를 눈 녹듯 녹여 버렸을까. 그녀는 우아한 자태를 가졌으며 부드럽고 떨리는 목소리로 다윗을 향한 최고의 찬사를 올렸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다윗을 응시하며 용서를 구하는 한 여인의 여리고 가냘픈 모습도 보여 주었다. 다윗은 그녀의 진심에 감동했을 뿐 아니라 여인의 아리따운 모습 또한 그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많은 사연을 접하는 사모가 아비가일처럼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는 언행의 품격이 더해지면 그것이 곧 능력이 된다.

 

* 내면의 성숙이 묻어나는 사모

린아이는 작은 상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여 큰 소리로 울며 자기의 아픔을 알아달라고 떼를 쓴다. 어른이 되면 웬만한 고통쯤은 잘 참고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다른 사람이 불편할까 도리어 조심한다. 사모도 목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를 대하는 반응과 태도를 통해 자신의 성숙도를 나타낸다. 목회적인 어려움, 비난과 모욕을 느낄 때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고 이목을 끄는 행동을 할 것인지, 의연히 대처할 것인지, 아픔의 시간을 다스리는 모습에서 사모의 영적, 인격적 내공이 드러남이다.

 

성경에는 인내의 사람 한나를 통해 내면의 성숙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자식이 없던 한나는 남편의 또 다른 부인 브닌나를 통해 멸시 받는 고통의 세월을 보낸다.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삼상 1:6) 남편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지만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고 다툼을 일으키지 않았다. 고요히 눈물을 삼키며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간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 1:10) 오랜 세월 반복되는 고통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은 여간 성숙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한나는 자신의 고통 이면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갔다. 역사에 가정법은 성립되지 않지만 만약 한나의 성숙함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가장 중요한 기도의 자리를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도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사모에게는 한나와 같은 내면의 성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논밭이 쩍쩍 갈라져도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 농부처럼, 숯덩이를 가슴에 품고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요동하지 않는 성숙함이다. 교회의 연약함, 남편의 연약함도 자신의 부족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사모, 이유 없이 트집 잡는 성도 앞에서 허리를 낮추어 주는 사모, 사모를 훈계하고 주장하려 드는 성도에게도 겸허히 귀 기울여 주는 사모, 때로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모는 내면적인 성숙으로 채워진 모습이다. 우리 자신이 죽어지는 순간부터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잊지 말자.

 

천한 기생이었던 라합은 먹고 살기 위해 외모의 멋을 가꾸었지만 그녀의 내면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맡기는 모험을 감행했다. 반대로 고귀한 왕후의 신분으로 외모를 가꾸었던 이세벨은 거짓과 악함으로 자신의 내면을 채웠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도 얼굴에 화장을 하고 예후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으나 결국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두 여인의 모습에서 보듯이 외모는 우리의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나눈 사모의 외적인 멋, 내적인 멋이 더욱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진정한 사모의 멋을 만들기 소망하며, 나의 간절한 바람도 이 글에 담아 보았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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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2017 Autumn (29호) 성도의 교제는 영적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2017.09.28
32 2017 Summer (28호)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2017.06.23
31 2017 Spring (27호) 복음은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생명의 피입니다 2017.04.05
30 2016 Winter (26호) 건강한 리더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에서 출발합니다 2016.12.28
29 2016 Autumn (25호) 말씀의 훈련은 '내가 복음'을 '주님의 복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2016.09.21
28 2016 Summer (24호) 사모의 영광은 예배의 영광에서 채워집니다 2016.06.22
27 2016 Spring (23호) 교회는 어두운 밤 외로이 서 있는 등대입니다 2016.03.29
26 2015 Winter (22호) 사모의 즐김은 피로회복제와 같습니다 2016.01.04
25 2015 autumn (21호) 사모의 지성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2015.10.06
» 2015 summer (20호) 사모의 멋은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2015.07.15
23 2015 Spring (19호) 쉼은 크고 넓은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2015.04.02
22 2014 Winter(18호) 절제함은 우리의 질주를 막아주는 성령의 브레이크입니다 2015.01.09
21 2014 Autumn(17호) 사랑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것입니다 2014.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