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쉼은 크고 넓은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조성희 사모(행복연구원장)

 

눈물 나게 맛있는 사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환호하는 사과, 심까지 먹어버리게 되는 사과, 썩지 않는 기적의 사과!”

200612, 일본의 NHK 방송은 온라인 판매 3분 만에 품절되는 기적의 사과를 소개했다. 이 사과 수프를 먹기 위해 도쿄의 한 레스토랑은 일 년 전에 예약을 해야만 했다. ‘기적의 사과는 좋은 사과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기무라 아키노리(木村秋則)의 농작물이다.

그 당시 사과 농작의 성공은 병충해를 막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농약을 많이 살포했다. 농약으로 나무가 약해지면 다시 인공의 영양제를 투입하는 일을 반복했다. 기무라 아키노리는 농약을 쓰지 않고 자연친화적인 방법을 동원해 병충해를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그의 뜻을 묵묵히 따라준 가족들이 굶어 죽게 될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죽기를 결심하고 어두운 야산을 향해 올라갔다. 목을 매기 위해 밧줄을 걸었지만 실패했다. 다시 시도하려는 순간, 어슴푸레한 달빛 사이로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나무가 눈에 띄었다. 그는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밧줄을 놓고 그곳을 향해 달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도토리나무였고 달빛에 비추인 것은 도토리 열매였다. 깊은 산속, 누군가 농약을 뿌리거나 영양제를 주었을 리 없는데 나무는 매우 건강했다. 나뭇잎은 병충해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뿌리는 싱싱하게 뻗어 있었고 흙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는 죽음의 결심도 잊어버리고 산에서 내려와 흙을 분석하며 연구했다. 산의 흙 속에는 다양한 종류의 미생물들이 섞여 있었고 흙은 표면과 땅속 깊은 곳의 온도가 일정했다. 그는 자신의 사과밭과 산속 흙의 차이를 연구한 결과, 나무의 생명은 토양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토양은 자연의 법칙을 따라 미생물과 더불어 포근한 대지를 만들고 땅속 깊이에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는 강한 면역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토양에 뿌리를 내린 과실나무는 자연의 치유력으로 면역이 강해지고 병충해의 공격도 이겨낸다. 인위적인 영양공급이 없어도 대지가 가지고 있는 영양분을 통해 사과나무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사과나무와 목회

 

사과 농사는 토양이 생명인 것을 발견한 기무라 아키노리는 더 이상 자신의 노력으로 나무를 살리려고 버둥거리지 않았다. 다만 사과밭이 자연의 숨결로 가득하여 토양이 숨 쉬고 미생물이 어우러져 생명체들 스스로 뿜어내는 영양소가 가득하도록 기다렸다. 드디어 독소가 빠지고 땅이 회복되자 건강한 토양은 나무에게 열매를 안겨 주었다. 농부 자신이 죽을 만큼 수고해서 얻은 것은 절망이었지만 자연의 원리를 따르자 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사과를 얻게 된 것이다.

사과나무와 농부를 보면서 목회자와 목회의 관계가 연상되었다. 목회자는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와 같이 성도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기를 소망한다. 목회라는 밭에서 병충해를 막고 건강한 알곡이 되도록 힘을 다한다. 주야를 구분하지 않고 열심히 뛰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는 영역들을 발견한다. 성장을 위해 좋은 것을 다 동원했지만 거두는 열매는 없다. 자괴감도 느끼고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며 주저앉고 싶다. 열매를 얻은 기쁨도 아련한 옛이야기 같고 그저 지치고 고갈되어 가는 자신을 본다. 감사와 감격도 희미해지고 모든 것에 허한 마음과 피로가 몰려온다. 식어버린 벽난로처럼 목회를 향한 뜨거운 열심도 싸늘해진다. 더 이상 어떤 것도 데울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하다. 동료들이나 가족들에게조차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반문한다. 왜 그럴까?

 

이러한 현상을 번아웃(burnout) 증후군, 탈진이라고 한다.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의 장작이 다 타버리고 더 이상 태울 것 없어 불길이 잦아드는 현상이다. 모든 것을 다 소진한 상태, 텅 빈 느낌,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시도할 의욕이 나지 않는 무기력감이다.

이제는 사과나무를 향한 농부의 마음처럼 애타게 달려온 걸음을 멈추고 쉬어야 한다는 뜻이다. 농부가 열매를 맺게 하는 대지에게 나무를 맡기듯 목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목양을 맡겨드리는 쉼이 필요한 것이다. 열심히 일한 후에 쉼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총의 법칙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이 목회라는 나무에만 매달려서 허덕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인생의 토양이시며 목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넓은 품에 안기어 쉬기를 바라신다. 땅이 살아 숨 쉬면 스스로 열매를 내듯이 목회자도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숨결을 느끼면, 그분이 친히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다윗은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초청하신 그분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1).

 

 

쉼을 한 바가지의 마중물로 사용한다

 

한 세대 전 우리네 집들은 대부분 한옥이었고 마당 한가운데는 세련된 수도꼭지 대신에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펌프가 있었다. 사람이 손으로 펌프의 손잡이를 세게 눌러서 물을 길어 올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펌프는 아무리 급해도 그냥 펌프질만 하면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펌프 옆에 놓여 있는 고무통의 물 한 바가지를 떠서 부어준 다음 펌프질을 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온다. 이렇듯 먼저 부어 주는 물이 마중물이다. 한 바가지의 물은 펌프를 매끄럽고 힘 있게 움직여서 땅속 깊은 곳의 물을 확확 끌어낸다. 한 바가지의 물을 아끼는 주인은 아예 지하수의 시원하고 풍성한 물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목회자의 쉼도 목회현장의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한다. 생각도 멈추고 마음도 가라앉아 몸이 움직이지 않는 때를 만나면 마중물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잠시라도 현장에서 물러나 쉼을 가져야 한다. 비단 목회자의 삶만 유별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값비싼 외제 자동차도 연료가 바닥나면 거리에 방치되고, 중요한 전자제품도 충전시켜야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심지어 길가의 작은 화초들도 물을 머금어야 싱싱하게 고개를 쳐들 수 있는데, 목회자가 한 바가지의 쉼을 부어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닌가. 한 바가지의 쉼이 없으면 시들어 버린 나뭇가지처럼 생명력 없는 사역으로 힘겹게 이어가야 한다. 자신도 행복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든다. 그러나 적절한 때에 쉼을 가지면 새 힘과 에너지를 모두 가질 수 있다. 몸이 강건해지면 영적인 부분도 신선해지고 사역의 역동성도 발휘할 수 있다. 우리 모두 땅속 깊은 곳으로부터 새 물을 뿜어 올리기 위해 한 바가지의 쉼을 아끼지 않으면 좋겠다.

 

 

자신의 필요에 맞는 쉼을 분별해야 한다

 

쉼에 익숙하지 않은 목회자들은 이라고 하면 단순하게 휴식, 혹은 여행을 생각한다. 또는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무턱대고 나도라는 마음으로 따라 한다. 그것은 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도리어 스트레스가 된다. 피곤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상황과 필요를 잘 판단해서 올바른 쉼의 방향을 정함이 지혜로울 것이다.

 

* 일상의 피곤을 풀어주는 쉼

 

뚜렷한 출퇴근이 없는 목회자는 모든 시간이 다 일하는 시간이다. 교회와 성도들, 가정의 대소사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일을 다 마치고는 결코 쉴 수 없다. 육체가 신호를 보내기 전에 배우자와 의논하여 자신이 행복해지는 시간을 정해 놓음이 필요하다. 잠이 부족하면 잠자는 날을 정하고,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책도 보고, 자연 속에서 산책이나 등산도 즐기고 맛집을 찾아 먹어 보는 , 꽃 한 송이 사려고 화원을 돌며 향기를 맡는 즐거움 등을 재충전의 시간으로 계획하고 우선순위에 넣어 둔다.

평생에 가보지 못한 음악회. 미술 관람, 전시회, 연극 공연 등 일 년에 딱 한 번이라도 챙겨보길 권한다. 긴 날이 아니라 하루, 이틀만 목회지를 벗어나도 쉼이 된다. 단순한 쉼이지만 활력을 불어넣는 데는 커다란 효과가 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쉼을 위한 행복 통장을 따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매달 몇만 원씩, 아니 단돈 만 원이라도 목적 금액을 떼어 놓는 것이다. 소액이라도 매달 쌓이면 가치 있게 쓸 수 있다. 한 해에 한 번이라도 예비해 두었던 행복 통장을 활용하면 소소한 즐거움으로 나만의 행복감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 정신적, 정서적 억압을 풀어주는 쉼

 

목회에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정신적 피곤함이다. ‘주의 종이라는 호칭에 부과되는 평범하지 않은 시선의 중압감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만든다. 성도들은 무리가 되어 행복하게 보이는데 자신은 혼자 동떨어져서 외로움만 쌓여 가고 마음에는 바윗덩이가 하나씩 얹혀 있다. 신경이 예민해지며 성도들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싶다. 정신적인 억압의 결과로 마음의 상처가 혈관에 붙어 있는 혈전같이 응어리져 마음을 묶어 놓은 탓이다. 일상의 휴식만으로는 해결이 어렵고 묶여 있는 매듭을 풀어야 된다.

자신이 내성적인 성향으로 인해 마음 열기가 어려워도 노력해야 한다. 목회지를 벗어난 곳에서 전문가를 통해 상담도 받아 보고, 사역의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좋겠다. 편안한 동료들과 함께 여행을 가서 나눔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리라. 동역자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모두가 매듭의 고통이 있음을 발견한다. 서로의 매듭을 나누고 함께 울고 웃으면 해결책도 나오고 지혜도 얻는다. 고통의 무게는 반으로 줄고 마음에 숨통이 트이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변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두는 것도 중요하겠다. 마음의 회복이 일어나면 새로운 매듭이 생겨도 그 매듭을 푸는 시간은 단축되리라.

 

* 영적인 침체와 회복을 위한 쉼

 

목회자도 사역에 쫓기다 보면 정작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는 데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여 심히 곤고할 때가 있다. 항상 말씀을 전하지만 가르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연약함도 있어 마음에 눌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은 진행되어야 하니 때에 맞게 껴입은 옷은 점차 무거워지고 속사람은 곤비하여 짜증과 혈기만 늘어간다. 육체의 건강도 해독이 중요하듯이 영혼의 곤고함도 독소를 제거하고 회복하는 영적 재충전의 쉼이 중요하다. 피로회복제를 통해 병을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영혼의 침체는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누려도 소용없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어린아이가 넘어지면 아빠를 부르며 달려가듯 영혼의 아버지에게 달려가 새 힘을 얻어야 한다. 목회자에게 영혼이 소성케 되는 쉼보다 더 소중한 쉼이 어디 있겠는가. 외부와 단절되는 조용한 곳을 찾아 주님과만 독대하는 고독한 시간을 가지고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것이다. 기도의 형태는 어떠하든지 세상의 소리를 끊고 주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면, 영혼을 회복시키는 응답이 있으리라. 하늘 아버지의 한 말씀을 듣게 되면 영적인 침체와 어두움도 물러가게 될 줄 믿는다. 외줄 타는 목회현장에서 끝까지 완주한 선배들은 영적인 쉼을 귀중히 여기고 놓치지 않은 결과라 여겨진다.

    

 

목적이 없는 쉼은 위험한 쉼이 될 수 있다

 

오래전 몇 분의 성도들이 함께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행지에서도 큐티하고 기도하면서 보내면 좋겠다는 조언을 드리자 한 성도가 질문을 던졌다. “모처럼 여행을 가는데 무거운 성경을 꼭 들고 가야 하나요? 여행지에서는 모든 것을 다 잊고 편하게 쉬면 안 되나요?” 어떤 조언을 해야 할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누린다는 것이 주님마저 뒤로 밀쳐두는 제멋대로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자유롭다는 심리적, 환경적 요인 때문에 주님이 허락하신 쉼을 위험한 쉼으로 변질시키기도 한다.

 

* 영적인 일을 마치고 난 후 이루어지는 쉼이다

 

교회의 큰 행사나 집회 인도, 어떤 일의 책임자로서 무거운 직무를 잘 감당하고 난 후에 가지는 쉼이다. 오랜 시간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온 신경을 집중시켰던 만큼 피로감과 해방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긴장했던 일을 성공리에 마쳤으니 자기 만족감 혹은 성취감으로 마음도 들떠있기 쉽다. 팽팽한 긴장이 풀려 마치 바람 빠진 풍선 같은 허전함도 느껴진다.

이때에 가지는 쉼은 자칫 영적 무장이 해제되는 위험한 쉼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으니 이제 하나님께만 고정되었던 시선을 잠시 거두고 나의 허전함을 채워줄 그 무엇을 찾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름이다. 육에 속한 만족감을 얻으려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순간을 마귀는 놓치지 않는다. 자신의 신분과 존재 목적도 잊어버릴 만큼 강력한 유혹으로 초대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맡겨진 일을 다 마친 후 감정의 출렁임으로 무기마저 빼앗겨 버리는 패잔병이 되지 않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승리의 개가를 부른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쉼을 가지기 원하신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보라. 그들은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싸우던 중 요단 강물이 멈추어 서는 기적을 보았다. 주변의 왕들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하나님의 역사는 대단했다. 요단 강을 건넌 그들은 자신들의 용맹함과 하나님의 기적을 자랑하며 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에 맞지 않은 할례를 명하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에 도취되어 영적 전열이 무너지지 않도록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하게 막으심이다. 그들은 할례를 통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며 승리를 자축하는 대신 영적 경계를 강화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도 일의 쉼표가 영적인 쉼표로 이어지지 않도록 영적 긴장을 풀지 않아야 한다.

 

* 일상의 일탈을 꿈꾸는 쉼은 위험한 쉼이 될 수 있다

 

늘 반복되는 일상의 삶에 식상함을 느끼는 권태기처럼 색다른 삶의 맛을 보고 싶어 떠나는 쉼이다. 배우자나 동료도 없이 호기심으로 출발한 나 홀로의 쉼, 혹은 어떤 동호회를 따라 낯선 곳, 낯선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여 떠나는 것은 멋스러운 것 같지만, 지극히 위험한 장난이다. 안전장치 없이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돌발적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각각의 이유는 있겠지만, 우리의 마음이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함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지적하셨다.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과신하여 움직이는 쉼은 자칫 방종으로 치달을 위험이 다분히 있다는 사실도 유념하면 좋겠다.

 

외국의 어느 목회자는 배우자 없이 휴양지에서 쉬고 있었다. 어느 날 지인이 찾아와 근처에 살고 있는 젊은 자매를 인사시켜 주었다. 그녀는 평소에 그 목회자를 존경했다고 말하며 시중을 들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과감히 거절했어야 하는데, 외로움을 느꼈던 목회자는 그러지 못했다. 일단 아는 사람이 없다는 환경이 자유함을 주었고 잠깐의 만남이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자신을 방치했다. 그는 어리석게도 사람보다 더 두려운 하나님을 생각지 못했다. 결국 목회자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던 그 일은 수년이 지나서 그의 발목을 잡았고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그의 명예는 한순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일생을 드려 수고했던 목회지와 가정도 깨어졌고 가슴을 치며 후회해도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

끈 떨어진 연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듯이 하나님이 없는 쉼은 파멸을 자초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어디에서 쉬든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더 깊은 친밀감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쉼이 필요하지만 결코 쉬면 안 되는 때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 쉼이 필요하지만, 쉬지 않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 있는 상황도 있음을 말하고 싶다. 사방으로 욱여싸인 것 같은 어두움과 고통의 커튼이 드리워지는 시간이다. 고통의 커튼이 온몸을 휘감을 때 피하지 않고,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십자가 앞에 내어 드리는 것이다. 찌르는 가시도 끌어안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 내면 십자가의 은총은 갑절이 되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쉼을 맛보게 하시리라.

 

* 교회가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시점이다

 

사사기에 보면 시스라라는 장군이 등장한다. 그는 전쟁터의 치열한 현장에서 도망하다가 중립에 속한 헤벨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피신했다. 안전한 피난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쟁의 긴장과 피곤을 견디지 못하여 잠이 들었다. 깊은 잠에 떨어진 시스라는 집주인 헤벨의 아내 야엘이 그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으므로 기절하여 죽고 말았다.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한 인생인가.

 

땅 위의 모든 교회는 크고 작은 영적 싸움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교회가 평안할 때는 목회자의 쉼이 문제 되지 않지만, 혹여 영적 전쟁의 작은 불씨라도 튀는 것이 보이면 쉼의 계획을 양보하는 것이 지혜롭다. 목회자가 기도의 자리를 지키면서 초기에 진압하기 위함이다. 진화의 시기를 놓치면 불씨들이 옮겨붙어 온 교회를 태워 버릴 수 있다. 교회가 시험에 드는 영적 전쟁을 경험하면 목회자는 피가 마르는 고통을 겪고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고 만다. 더러운 꼴 다 안 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몰려온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통에 어린아이들을 버려놓고 부모 혼자 도망가는 모습이지, 결코 양들을 위한 해결책이 아니다.

 

어떤 교회는 분쟁 가운데서 목회자 부부에게 쉼을 허락해 주었다. 순진한 목회자 부부는 감사히 쉼을 받아 해외로 떠났다. 목회자가 떠나고 없자, 그들은 마음껏 거짓 누명을 만들어 목회자를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많이 있다. 육신적으로는 절대적인 쉼이 필요하지만 오히려 그 쉼을 십자가 앞에 반납하고 대신 십자가 밑에 나아가 하나님이 도우시는 영적인 쉼을 간구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다.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은 당신의 품에 안긴 종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아주 엎드러지지 않도록 앞장서서 싸워 주실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방법으로 쉼을 허락해 주실 줄 믿는다.

 

* 교회가 특별한 사역을 계획하고 있는 시점이다

 

오래전 어느 목회자의 글을 읽다가 기억에 남는 내용 한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사역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 아니다. 목회자가 다 하려고 하지 마라. 나는 우리 교회 건축할 때 안식년을 가졌다. 성도들끼리 마음 맞추어 잘해보라고 맡겼는데 성령께서 일하시니 교회 잘 지었더라.” 그분의 주장은 당시의 젊은 목회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너도나도 그분의 흉내를 내면서 교회의 시끄러운 이야기가 들려 왔다. 그리고 훗날 돌아보니 그 교회는 그분이 평생에 헌신할 교회가 아니었다. 왠지 씁쓰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대부분의 목회자는 주님의 교회에 일생을 헌신한 목자로서 책임을 지고 있다. 목자는 양들의 인도자가 되므로 교회의 건축이나 중대한 사역을 계획했을 때는 쉼을 가지러 떠나면 안 된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녀들에게 알아서 집 지으라 명하고 훌쩍 떠나겠는가. 그것은 자녀를 못 믿거나 부모의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다. 가정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들이 함께 살 집에 대한 애정과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교회를 향한 목회자의 사랑과 책임이 어찌 부모보다 작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목회자는 영적인 지도자로서 일의 중심에 서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목회자가 중심에 서서 진두지휘하는 사령관의 모습을 보여 주면 성도들도 안심하고 맡은 곳에서 충성하게 된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수없이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영적 지도자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고 눈에 보이지 않자 무슨 짓을 했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없어진 것처럼 아론을 졸라 금송아지를 만들고 광란의 춤을 추며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다. 성경의 교훈은 우리에게 영적 지도자 한 사람의 중요성을 잘 말씀해 주고 있다.

 

 

쉼의 결국은

 

다시 예수로 충만함을 얻고 그분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교회가 풍랑이 이는 바다 가운데 있다면 배 밑에서도 고요하고 안정된 심령을 누리신 주님을 만나고, 많은 사역 가운데서 지쳤다면 한적한 곳을 찾아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던 주님을 만나고, 육체의 소욕이 마음을 끌면 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 선언하신 주님을 만나 더 배우는 것이다. 그리하면 주님처럼 사명의 기쁨을 노래하며 사랑하는 가족, 성도들과 더불어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활력소를 얻을 수 있다.

배우자가 쉬기를 청할 때 그 쉼의 요청을 가벼이 여기거나 헌신의 부족으로 치부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쉼은 매우 유익한 것이지만 쉼을 계획하는 형편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수용함이 지혜롭다. 어떤 목회자에게는 쉼을 결정하는 것이 쉬운 일이지만 어떤 목회자에게는 어려운 사안이 되기도 한다. 쉼의 유형이나 방식도 지역마다, 교회의 형편 따라 각각 다를 수 있다. 혹여 쉼마저도 비교의 대상이 되어 남들만큼 되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않으면 좋겠다. 특별한 때는 특별히 역사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교회와 더불어 동고동락하기로 결단하는 것도 잘 선택한 쉼이라 생각한다.

 

어떤 모양의 쉼을 가지든 예수로 충만하면 온전한 쉼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사과나무가 영양이 풍부한 땅에 뿌리를 내리면 저절로 달콤한 사과를 맺듯이 목회자인 우리도 주님의 품에 안기어 쉼을 가질 때 목양의 열매를 맺는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당신의 종들을 쉼으로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번호 제목 날짜
40 2019 Summer (36호) 분별력은 사역자의 걸음을 밝혀 주는 가로등입니다 file 2019.07.03
39 2019 Spring (35호) 분별력은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file 2019.04.15
38 2018 Winter (34호) 청소년 자녀는 조개 속의 진주입니다 file 2019.01.04
37 2018 Autumn (33호)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전 우주와 같습니다 file 2018.10.10
36 2018 Summer (32호) 어머니의 사랑은 자녀를 살리는 보약입니다 file 2018.06.27
35 2018 Spring (31호) 아버지 당신은 자녀의 미래입니다 file 2018.04.01
34 2017 Winter (30호) 평신도는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file 2018.01.05
33 2017 Autumn (29호) 성도의 교제는 영적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2017.09.28
32 2017 Summer (28호)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2017.06.23
31 2017 Spring (27호) 복음은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생명의 피입니다 2017.04.05
30 2016 Winter (26호) 건강한 리더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에서 출발합니다 2016.12.28
29 2016 Autumn (25호) 말씀의 훈련은 '내가 복음'을 '주님의 복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2016.09.21
28 2016 Summer (24호) 사모의 영광은 예배의 영광에서 채워집니다 2016.06.22
27 2016 Spring (23호) 교회는 어두운 밤 외로이 서 있는 등대입니다 2016.03.29
26 2015 Winter (22호) 사모의 즐김은 피로회복제와 같습니다 2016.01.04
25 2015 autumn (21호) 사모의 지성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2015.10.06
24 2015 summer (20호) 사모의 멋은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2015.07.15
» 2015 Spring (19호) 쉼은 크고 넓은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2015.04.02
22 2014 Winter(18호) 절제함은 우리의 질주를 막아주는 성령의 브레이크입니다 2015.01.09
21 2014 Autumn(17호) 사랑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것입니다 2014.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