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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희 사모(행복연구원장)



기독교 국가였던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최후를 생각해 본다. 콘스탄티노플은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을 일컫는다. 서기 330,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 제국의 새로운 단독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비잔티움이라 불렀던 작은 도시를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렀다.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아시아가 경계한 지점의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며 육지와 면한 한쪽에는 바다 절벽을 포함한 삼중 성벽이 도시를 지켜주었다.

 

 

삼중 성벽이라 함은 벽을 하나 넘으면 뒤의 성벽에서 화살을 쏘고 또 하나를 넘으면 뒤의 성벽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성벽 아래는 20m가 넘는 해자가 있어 접근불가였고 도시를 둘러싼 바다는 마르마라 해협의 강한 해류 때문에 배의 정박이 불가능했다. 수영을 해도 전부 떠내려갈 만큼 물살이 센 곳이다. 해류가 약한 곳이 딱 한 곳 있었는데 금각만(金角灣), 혹은 골든혼(Golden Horn)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런데 금각만 입구는 굵은 쇠사슬을 설치해서 배가 전혀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버렸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노플은 천년동안 단 한 번 십자군 4차 전쟁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요새로 남았다.

그러나 이런 천연의 요새에 위기가 닥쳤다. 오스만제국의 젊은 황제 술탄 메흐메드 2세가 배 한 척 들어갈수 없었던 금각만을 뚫기 위해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는 쇠사슬이 쳐진 금각만의 반대편 언덕에 통나무 레일을 만들어서 골든혼 밖에서 놀던 배들을 육로로 이동케 하여 골든혼 안쪽으로 무기를 옮겨왔다. 불가능하게 보였던 금각만이 뚫리자 콘스탄티노플은 1453529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기고 영원한 침묵 속에 잠기고 말았다.

 

 

절제는 마음의 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당시의 콘스탄틴이 무너진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제 정세가 힘들어서 다른 기독교 국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오랜 역사 속에서 국력이 쇠약해져 방어할 능력을 갖추지 못함이다. 성벽이 무너지자 황제는 적진 한가운데서 맹렬히 싸우다 전사했고 사람들은 지금의 아야소피아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다. 그러나 정복자인 메흐메드 2세는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하루 동안 점령군으로서 할 수 있는 약탈과 폭력, 살인까지 허용했다. 하나님의 도성으로 일컬었던 천년의 성이 무너지고 이방인의 요새가 된 그날의 콘스탄티노플은 얼마나 참혹했을까.

무너져 내린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이야기가 마치 목회자의 생애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했어도 한 곳에 구멍이 뚫리니 성이 허물어지듯, 하나님의 종으로 평생을 달렸지만 한 곳에 구멍이 뚫리면 수십 년 쌓아온 충성이 단번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우리 생애에 성벽이 무너져 내린 도시같은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얼마나 슬프고 황망할까?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가끔 성벽이 무너져 내린 목회자의 이야기가 들려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남의 일 같지 않아 안타까움으로 깊은 고민을 해본다. 왜 그렇게 무너져야만 했을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목회자가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인해 자기 통제력을 잃어버린 결과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목회자가 혼신을 다하여 사역하지만 본성을 소유한 사람이니 약하고 미숙한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자기 통제력이 힘을 얻을 때는 자신을 잘 지켜낼 수 있지만 자기 통제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는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이 부분을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16:32).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25:28). 자기 통제의 힘이 마음에서부터 생겨나 삶의 태도를 다스리는 능력이 되므로 마음 지키는 일에 실패하면 그의 삶도 황폐해진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삶의 성벽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행동의 주체가 되는 마음을 지켜야 한다. 마음을 지키는 파수꾼은 바로 절제다. 절제는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행동의 통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부터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는 것이다. 마음의 통제가 일어나면 행동은 자연히 그 방향을 따르게 되고 삶의 태도도 결정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절제는 마음의 성을 지키고, 성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20). 그리스도만 드러나도록 초점을 맞추고 그리스도가 나를 통치하시도록 내어드린다. 결코 주님보다 앞서지 않고 주님의 명령에 게으르지 않고 즉각 반응하는 태도가 곧 자기 절제의 열매를 소유한 사람이리라.

 

 

우리의 일상에서 잊고 있는

절제의 중요성

 

우리의 일상에서 절제가 매우 중요함에도 그 가치를 잊어버릴 때가 많다. 도리어 절제를 대수롭잖게 여기거나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삶의 여정을 돌아보면 절제하지 못해 뒤늦게 후회하고 잠 못 이루었던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감정을 다스리는 작은 일에서부터 목회의 균열이 발생하는 큰일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마라톤 선수가 아무리 잘 달려도 트랙에서 벗어나면 탈락이듯이 목회자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로(正路)로 달려가야 한다. 정로로 달리기 위해서는 경건의 훈련처럼 절제의 중요성을 숙지해야 한다. 절제는 우리에게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유명한 셰프의 요리에도 소금이 빠지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하듯, 목회자의 삶에도 절제의 소금이 고르게 녹아져야 맛을 잃지 않고 목회자다움의 변질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소금에 푹 절여진 배추가 되어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손에 온전히 길들여지는 주님의 도구가 된다.

절제는 우리로 하여금 삶과 사역의 중심을 잘 잡아주어 균형을 잃지 않게 만든다. 야외에서 텐트를 쳐보면 중심기둥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을 때 텐트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기울어지는 텐트는 아무 쓸모가 없다. 절제의 훈련을 통해 균형을 잡으면 안정되고 건강한 사역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절제의 훈련은 죄인인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게 만든다. 모나고 뾰족한 성품, 혈기 왕성한 성품, 원망과 상처가 많은 성품을 십자가 앞에서 녹이고 또 녹여 성숙한 인격으로 빚어 간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경험케 하며 진정한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도록 세워준다. 그러나 절제의 파수꾼을 세우지 않는 목회자는 겉으로는 장미의 정원을 꾸밀 수 있겠지만 종래는 탐욕의 쓰레기로 인하여 토양이 부패해져 장미가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맡겨 주신 승리의 깃발을 지키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성령이 주신 브레이크, 절제를 잘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 절제가

꼭 필요한 영역

 

절제는 모양이 없는 액체와 같이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쓰임새를 나타낸다. 오래 참고 인내하는 모습,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과 헌신의 태도, 냉철한 판단과 예리한 분별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분별하고 조심해야 할 영역에서 몇 가지만 나누어 보고 싶다.

 

관계 속에서의 절제가 필요하다

목회자는 사역의 특성상 모든 사람을 친절하고 따듯하게 대하려고 힘쓴다. 사람을 잘 믿고 긍휼히 여기며 거절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세속의 가치와 얕은 꾀를 가진 사람조차도 분별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그저 믿어주려 한다. 하지만 목회자는 공인이고 영적 지도자이기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분별과 절제가 중요하다. 특별히 개인적인 친분을 쌓으려고 할 때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숙고함이 꼭 필요하다.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자신이 영향을 받게 되고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좋은 사람과 함께 하라는 가르침을 많이 주셨다.

검정 연탄을 들고 있는 사람과 동행한다면 내 옷에도 검정 가루가 묻는 것이 당연하다. 시커멓게 더럽혀진 손을 잡고 함께 동행하면서 나는 괜찮다라고 주장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며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자녀들을 위해 만남의 축복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목회자에게도 만남의 복은 너무 중요하고 이 복이 서로에게 임하려면 관계의 절제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

 

어떤 목회자는 목회에 전념하다가 동창을 만났다. “어이~생각해 봐. 죽기 살기로 교회에만 붙어있다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나? 교인들이 알아주나? 인생 많이 살 것도 아닌데 바람이나 쐬러 가자구.” 목회의 스트레스를 풀어 준답시고 여기저기 재미를 찾아서 데리고 다닌다. 그런데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동행하는 이의 생각과 행동, 판단에 물이 들게 된다. 달콤한 맛에 길들여진 아이가 밥을 먹지 않듯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목회자는 목양에 충실했던 자신의 모습을 옹졸하고 초라하게 여긴다.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겠다고 스스로를 변명하며 일상의 사역을 가볍게 여긴다.

그가 외치는 자유함이 얼마나 오래도록 그를 지탱해 줄까? 그의 변질은 누구의 책임인가?

 

거룩한 사역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사역에 혼신을 다하다보면 꿈이 커지고 해야 될 일이 자꾸 눈에 보인다. 비전을 선포하고 사역의 장을 펼치지만 때로는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 같이 결실 없이 마무리하여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있다. 예배당 건축, 선교지 확장, 지역사회 봉사 등, 선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은사와 역량,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는 현실적인 안타까움이 있음이다. 성전을 건축하다 재정이 부족해 멈추거나 양도해야 하는 경우, 지역사회 봉사를 출발했으나 지역민의 특성이나 필요를 채우지 못해 시험거리로 남는 것이다. 믿음의 큰 꿈이 뜨거운 감자가 되어 목회자의 고민만 더하게 만들고 책임은 오롯이 목회자의 몫으로 남는다. 아름답게 시작했으나 끝을 맺을 수 없는 사역은 갈등과 원망이 일어날 수 있다.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대립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교회적으로는 큰 상처만 남게 된다.

목회자는 자신이 마지막 책임자임을 생각하고 선한 일을 꿈꿀 때도 절제를 사용함이 지혜롭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한 번 더 점검하고 올바른 분별을 위해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정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일까? 우리 교회는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을까. 나의 생각, 계획이 앞선 것은 아닐까?” 마음은 원이로되 교회가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면, 성도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거룩한 주의 일도 원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면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하거나 자신의 계획이 당장 실행되지 않는다고 초조하게 매달리지 않을 수 있다. 기드온이 양털을 놓고 하나님의 증표를 구했듯이 거룩한 일, 선한 일일수록 더욱 절제의 태도를 갖추는 것이 정직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태도다.

 

 

개인의 취향과 즐거움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영적인 일을 감당하는 목회자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통하여 영혼의 평안함과 정서적 안정을 얻는다. 정서적 안정감은 육체의 건강뿐 아니라 정신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긴장과 피로를 푸는 방법은 각자의 기질과 취향에 따라 다르다. 뜨거운 사우나 즐기기, TV 시청이나 스포츠 즐기기, 인터넷 서핑, 오락, 글쓰기, 그림 그리기, 사람 만나 대화하기 등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즐거움을 찾는다. 이 즐거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

그럼에도 간혹 우리의 즐거움이 절제되지 않아 시험에 들거나 올무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사역의 어려움이 생겨 갈등하고 근심이 몰려오면 힘들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보다는 쉽게 즐거움의 현장으로 달려가 숨는 것이다. 처음에는 현실의 무게를 덜어내고 싶어 잠시 들렀던 도피처인데 그만 발목이 묶여 버렸다. 자신만의 내밀한 세계에서 맛보는 즐거움은 고통의 무게만큼 크게 느껴져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곳은 힘들이지 않아도 충분한 기쁨과 만족을 안겨 주기에 현실을 회피하는 피난처로서는 안성맞춤이다. 끝없이 TV 채널을 돌리고, 밤새도록 오락을 하고, 인터넷 서핑에 몰두한다. 필요치도 않은 것을 충동구매하고 욕망이 가득한 세속적 가치를 탐닉하고 자신만의 오락에 빠져든다. 날마다 영적 전쟁을 치르는 목회자가 위로부터 주어지는 힘을 얻어야 정면 돌파할 수 있는데 엉뚱한 데서 위로를 얻고 기쁨을 추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우리를 무너뜨리는 원수는 외부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의 내부에 존재한다. 선과 악이 아니었던 우리의 취미 생활, 즐거움이지만 쓰임새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을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 한다. 돈에 마음이 뺏겨 나귀도 보았던 천사를 보지 못한 발람처럼 영적인 눈이 멀지 않으려면 개인의 즐거움마저도 지나침이 없는지 돌아보고 절제함이 옳다.

 

생각과 마음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일상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어떤 생각들은 절제함으로 경계할 필

요가 있다. 부정적이며 어두운 생각, 파괴적이고 불순한 생각들이 불현듯 떠올라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것이다. 그 생각을 거절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는 것처럼 발전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귓가에 백성들의 외침이 들렸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 소리는 사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질투와 시기로 발전시켰고 급기야 왕권의 위협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살해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어떤가.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존심 상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그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우리는 그만큼 자신이 상처받았기 때문이라 여긴다. 어느 날, 느닷없이 허전하고 외롭다는 감정이 밀려오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 날이 지나도 이 생각이 사라지지 않으면 우울감이 찾아온다. “그래,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 결국 나는 혼자야.” 스스로 단정 짓고 우울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울감은 열등감, 비교의식, 자기비하, 죄책감을 동무로 데리고 온다. 자기연민의 작은 불씨가 커져서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도 받지 못한다는 해석을 낳고 믿음의 손해를 본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있는 어두운 생각은 삶의 연약함 때문에 스며들기도 하지만 이면에는 우리의 대적 마귀가 쏘는 불화살의 공격이 숨어 있다. 마귀의 불화살은 우리의 약한 생각과 마음에 집중적인 화살을 날려 그것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 불이 활활 타오르도록 쉬지 않고 기름을 끼얹는다. 화재는 조기에 진압하지 않으면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낳듯이 생각과 마음에 스며드는 어두운 불길도 조기에 다스려야 한다. 부정적이고 어두운 생각들이 퍼지지 못하도록 절제시키고 내 것이 아님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물리쳐야 한다. 더 이상 우리의 마음과 뇌리에서 머물지 못하도록 털어버림이 옳다.

 

 

성령충만의 열매인

절제를 얻기 위하여

 

절제가 필요치 않은 곳은 없는데 정작 절제가 능숙하게 이루어진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부끄럽지만 나 자신부터 절제의 열매를 사모하는 노력은 있지만 절제의 열매가 무르익었다고 내세우지 못한다. 사실 삶의 영역에서 절제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면 그는 성령충만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절제의 열매를 얻기 위해 가져야 될 적극적인 태도의 변화를 찾아보려고 한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다

유다 왕 웃시야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되어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므로 복을 받았다. 52년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주변 강대국을 물리치고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는 왕권 말기에 나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웃시야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대하26:16). 성전의 분향하는 일은 구별된 제사장의 몫임을 온 백성도 알고 있는데 왕이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웃시야의 마음이 높아져 자신의 분수를 도외시하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어서 벌어진 일이다. 제사장 아사랴가 용맹한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와서 웃시야의 죄를 지적했으나 그는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처럼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서 겨우 제동이 걸렸다. 웃시야가 하나님의 지엄하신 권위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목회자가 절제를 잘 알면서도 절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언제나 지도자의 위치에 있고 지도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지도력을 인정해 주고 자신도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므로 절제의 경계선을 허물어 버린다. 자신이 계획하고 행하는 일은 하나님의 한계 없는 기름 부으심이 임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하여 절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스스로 높아지는 마음 때문에 멈춤을 표시하는 빨간 신호도 보지 못한다.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교만과 욕심이다. 교만과 욕심은 자족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목회와 가정, 자녀, 물질, 건강 등 이 땅에서의 분깃을 주셨다. 그것이 크든 작든 우리 각자에게 주신 영역과 분깃이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고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과 허락하지 않으신 것을 탐내는 마음은 하나님을 신뢰치 않는 태도다.

 

한 걸음 더 딛고 싶어도 양심의 소리를 따라 멈춘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시려고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 할 뿐 아니라 목회자의 양심을 사용하길 원하신다. 한 걸음 더 딛고 싶은 욕구에 떠밀리면 이래도 될까?’라는 마음이 들게 하셔서 주춤하게 만든다. 왠지 마음 한편이 꺼림칙하며 기도가 잘 되지 않고 말씀을 보아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양심을 통해 주시는 성령의 사인일 수 있다. 그럼에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자꾸 바라본다면 나중에 는 하나님께 여쭙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육신의 욕구에 사로잡혔다는 신호다. 그것마저 깨닫지 못하면 이후에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욕망의 연기가 앞을 가릴 때 위급 상황을 알리는 비상벨이 고장 났으니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영적 양심이 무디어지면 하나님께 여쭙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다윗이 방랑자일 때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여쭈었지만 왕이 되어 모든 것을 소유하자 마음이 무디어졌다. 나라는 전쟁 중이건만 그는 음욕을 참지 못해 충성된 신하의 아내를 왕궁으로 불러들인다. 그의 마음에서 들리는 양심의 소리는 없었을까.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릴 때 거리낌은 없었을까. 당황한 신하들의 표정과 수군거림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는 왕권의 매력에 빠져 양심의 소리뿐 아니라 하나님께 묻는 습관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리라. 오직 한 걸음 더 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다윗의 범죄는 더욱 대담해졌다. 결국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서야 거침없는 질주가 멈추었다.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다윗의 태도는 자신의 가정과 자녀들의 인생에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자녀의 문제는 다윗의 평생에 찌르는 가시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욕망의 노예였던 한 시점을 후대에 남겼다.

 

하기 싫어도 옳은 것을 먼저 선택하는 습관을 훈련한다

삶의 각 분야에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자기관리, 자기절제의 습관이 잘 훈련되어 있다. 우리도 일상에서 옳은 것을 먼저 선택하는 습관을 훈련한다면 평생토록 자신을 유익하게 만들 것이다. 작은 일도 하나님께 여쭙고, 선한 일에도 화평을 앞세우며, 주장할 수 있지만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 하기 싫어도 옳은 것을 먼저 행하는 성실, 주님이 하라시면 기어이 순종하는 삶이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면 그는 건강한 목회자요, 절제의 열매를 맺는 성숙한 사람이리라.

어느 사모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우리 목사님은 꼭 토요일 되면 설교 준비하지 않고 교회에 나와요. 여전도회 청소할 때 거들어 주고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세요. 중요한 것은 설교 준비할 시간을 놓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왜 그러시는지 속상해 죽겠어요.” 사택과 교회가 붙어 있다 보니 그럴 수 있겠지만 이것은 잘못된 습관의 문제가 아닐까. 주일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자세, 성도들에게 친절함을 나타내는 것과 영의 양식을 먹이는 일의 중요성과 우선순위를 세우는 문제가 잘 정립되지 않은 탓이라 여겨진다.

 

내조자로서 목회하는 사모도 잘못된 습관으로 인해 목회를 어렵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부부 함께 심방하다 조금 마음이 상하면 뿌리치고 혼자 돌아서는 것, 성도들에게 매일 힘들다고 토로하며 얄미운 집사 흉보는 것, 스스로의 경건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성도들을 부지런히 감독하는 것,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지나친 고집과 독선은 성숙하고 절제된 모습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모님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외로이 고군분투하는 귀한 목회자임을 알지만 간혹 우려하는 목소리를 담아 보았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가르치는 우리가 먼저 절제를 위한 좋은 습관을 훈련한다면 성도들도 세상에서 무릎 꿇지 않으리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권고를 성령의 음성으로 받는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섬기는 지도력으로 사명을 감당한다. 그런데 가끔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조언은 배제하고 자신의 생각, 의견만 옳다고 고집하는 불통의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권위적인 목회자라고 말한다. 권위적인 목회자는 목회의 협력자인 가족, 가까운 동역자, 평신도 지도자들의 제안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한다.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의 안타까운 조언마저 핀잔하며 업신여긴다.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이 목회를 알아?” 늘 함께 있으니 충언도 잔소리 같이 여겨질 수 있겠다. 하지만 진정한 우군인 배우자의 조언마저 듣지 않는다면 성령의 사인을 무엇으로 받겠는가. 만약 반복해서 똑같은 내용의 조언을 듣는다면 거칠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성령 음성이라 믿고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목회자가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 정석이지만 언제나 그 통로만 열려있는 것은 아니다. 성령에 민감한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권고 속에도 성령의 사인이 있음을 경험적으로 안다. 나는 담임목회로 떠나는 사역자에게 늘 당부한다. “기도하는 아내가 권면하는 말은 꼭 들으세요.” 나 자신도 그 누구의 권면보다 남편의 권면이 가장 무섭고 정확하다고 믿는다. 목회자가 잘못된 걸음을 옳길 때 뒤에서 비난하는 사람은 많아도 진심 어린 권고를 하는 사람은 없다. 목회의 지경이 넓어질수록 스스로 자아도취, 자기만족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사랑하는 사람들을 경계의 울타리로 삼는 것이 지혜다. 목회자도 살고 교회

와 성도들도 살게 되리라.

어느 원로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젊은 후배들이 묻지요. 목회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목회는 왕도가 없어요. 돌아보니 목회는 외줄타기였습니다. 자칫 한눈을 파는 순간,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 말씀이 어찌 그리 와 닿던지 녹음해서 듣고 또 듣고 수차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외줄에 서 있는 심정으로 절제에 힘써서 아버지가 계신 건너편까지 완주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 아버지의 박수쳐 주심을 바라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고전 9 :25 -


번호 제목 날짜
40 2019 Summer (36호) 분별력은 사역자의 걸음을 밝혀 주는 가로등입니다 file 2019.07.03
39 2019 Spring (35호) 분별력은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file 2019.04.15
38 2018 Winter (34호) 청소년 자녀는 조개 속의 진주입니다 file 2019.01.04
37 2018 Autumn (33호)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전 우주와 같습니다 file 2018.10.10
36 2018 Summer (32호) 어머니의 사랑은 자녀를 살리는 보약입니다 file 2018.06.27
35 2018 Spring (31호) 아버지 당신은 자녀의 미래입니다 file 2018.04.01
34 2017 Winter (30호) 평신도는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file 2018.01.05
33 2017 Autumn (29호) 성도의 교제는 영적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2017.09.28
32 2017 Summer (28호)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2017.06.23
31 2017 Spring (27호) 복음은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생명의 피입니다 2017.04.05
30 2016 Winter (26호) 건강한 리더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에서 출발합니다 2016.12.28
29 2016 Autumn (25호) 말씀의 훈련은 '내가 복음'을 '주님의 복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2016.09.21
28 2016 Summer (24호) 사모의 영광은 예배의 영광에서 채워집니다 2016.06.22
27 2016 Spring (23호) 교회는 어두운 밤 외로이 서 있는 등대입니다 2016.03.29
26 2015 Winter (22호) 사모의 즐김은 피로회복제와 같습니다 2016.01.04
25 2015 autumn (21호) 사모의 지성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2015.10.06
24 2015 summer (20호) 사모의 멋은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2015.07.15
23 2015 Spring (19호) 쉼은 크고 넓은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2015.04.02
» 2014 Winter(18호) 절제함은 우리의 질주를 막아주는 성령의 브레이크입니다 2015.01.09
21 2014 Autumn(17호) 사랑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것입니다 2014.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