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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희 사모(행복연구원장)

우리 교회에 소아과 의사로 섬기시는 여자 집사님이 있다. 20년 동안 일하면서 청진으로 폐렴을 놓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실력 있는 의사였다. 몇 년 전 한 아기가 콧물감기 증세로 진료를 받았다.
열도 없는데 아이의 얼굴빛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아 급히 대학병원으로 이송했다. 3개월을 치료했는데 결국 아이는 폐렴의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아니, 그럴 리가! 내가 좀 더 구체적으로 묻고 잘 진단했으면 살아날 수 있었을까? 열도 없고 기침도 없었는데 어떻게 폐렴이 되었을까?’ 폐렴의 증세는 없는데 아이의 폐가 굳어 있다는 것이다. 집사님은 마음이 안타까워 일 년 넘게 그 가정을 위해 기도했다.

집사님의 마음이 가까스로 진정이 되었을 무렵, 쌍둥이 아기를 차례로 진료했다. 잘 먹지 않고 기침이 멎지 않는다고 했다. 철저하게 청진을 했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종합병원에서 사진을 찍도록 했다. 피 검사는 이상이 없는데 폐가 이상하게 나온다는 소견을 밝혔다. 서둘러서 서울의 유명한 병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병명을 모른 채 수개월씩 입원해있던 쌍둥이 아기는 사망하고 말았다. 얼마 후, 또 한 아기가 똑같은 증세로 서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몇 달 만에 사망했다.
원인도 모른 채 어린아이들의 사망이 이어지자 집사님은 견딜 수 없었다. 잠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애간장이 녹는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제발 아기들을 살려주세요. 그 아이들을 데려가셔야 한다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 주세요. 저를 데려가시고 그 아이들을 살려주십시오.” 집사님은 자신의 잘못도 아니건만 자신의 환자를 책임지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피가 마르는 고통을 겪었다.
어느 날 성령께서 물으셨다. “너는 너의 책임에만 관심이 있고 너의 짐만 벗고 싶은 거냐? 그 가정의 상처와 영혼들에 대한 관심은 없느냐?” 집사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영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깨닫고 그 가정들의 영적구원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그 가정들이 구원의 은총을 입게 해주세요. 슬픔을 위로하시고 다시 아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기들의 사망 원인을 찾게 해주세요.”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집사님의 간구를 다 응답해 주셨다. 한 해에 수십 명의 생명을 앗아가며 수년간 계속되었던 영유아들의 사망 원인은 전자제품에 사용되는 물품의 독성 때문이었다. 인체의 면역이 가장 약한 아기들과 임산부들이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또한 슬픔을 겪었던 가정들은 모두 아기를 낳았고 약속이나 한 듯 집사님의 소아과를 다시 찾아왔다. 집사님의 눈앞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엄마들은 어느새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다.


진정한 사랑은 애끓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음으로 출발한다



어떤 의사가 환자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드리기를 소망하겠는가! 이는 책임감을 뛰어넘어 세상을 향한 애끓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드릴 수 있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이 사랑의 성품으로 죄인인 우리와 악하고 추한 세상을 품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 4:10). 죄의 수치로 벌거벗겨진 우리를 아버지 사랑의 옷자락으로 덮으시고 입 맞추어 주셨다. 마치 마법에 걸려 괴물이 된 왕자가 그를 사랑한 눈물 한 방울에 마법이 풀렸다는 동화처럼 아버지의 사랑은 죽은 인생을 살아나게 하셨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죽으신 것이다.

사람 중에 누가 개미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는가? 애끓는 아버지의 마음은 개미와 같은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 뼈의 진액이 마르도록 십자가 형틀에 매달리셨다. 하나님의 공의를 통과할 수 없는 우리 대신 벌을 받으심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으로 절규하시며 완전한 암흑 가운데 자신을 던졌다. 그로 인해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죄와 사망의 무거운 쇠사슬을 끊어버린 참 자유인이 되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사랑의 능력도 알았다. 사랑은 우리 삶의 원천이 되며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품어야 할 사랑도 세상의 사랑과는 출발이 다른 아버지의 사랑이다. 애간장이 타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형제를 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나 자신을 돌아본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 영혼을 품고 부르짖는 사랑이 살아 있는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눈물이 지금도 흐르고 있는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폄하하는 한국 교회를 생각하면 탄식하는 부르짖음이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이 부족한 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의 사랑의 샘에서 두레박이 철철 흘러넘치도록 사랑을 공급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이 글을 이어간다.


사랑에 대한 오해



의사의 처방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약을 사던 시절, 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광고 문구가 있었다. “약 모르고 오용하지 말고 약 좋다고 남용하지 말자.” 사랑도 마찬가지다. 유난히 정이 많은 우리 사회의 문화는 정을 사랑이라 여기는 인식이 많이 있다. 그래서 정이라는 그물에 한번 걸리면 사리 분별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남이냐!”라고 외치며 자신들끼리 뭉친다. 그들은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만 한없이 관대하고 상대방에게는 무례히 행한다. 결국 집단 이기주의 같이 자신들의 필요에만 집중하니 서로 갈등하는 사회가 되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도외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랑을 오해함으로 생기는 혼란을 몇 가지만 나누어 보자.

1. 그저 모든 것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는 시간, 사랑의 사람을 소개하라고 했다. 한 집사님이 어느 교회 목사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로님이 사업한다고 성도들의 돈을 끌어다 쓰고 부도가 났어요. 근데 목사님은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지 그 장로님을 꾸짖지 않고 선교사로 파송해 주었어요.” 그 말을 듣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잠깐만요, 그 장로님이 성도들의 돈은 다 갚으셨어요?” “아뇨” “그럼 성도들의 돈은 누가 갚나요? 교회인가요? 목사님인가요?” 결론은 아무런 대책 없이 장로님만 선교사로 파송하고 교회는 큰 소용돌이에 휘말렸다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설명해 주었다. 목회자가 왜 장로님만 감싸주어야 하는가. 직분자를 믿고 돈을 빌려 준 성도들은 누가 책임져 주나. 성도들은 평생 동안 교회를 향한 서운함을 떨쳐버리지 못할 것이다. 개인에 따라서는 믿음의 삶을 버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한 영혼을 잃어버린 그 책임은 누구의 몫이 될까. 그 목회자는 사랑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신 것이다. 사랑으로 덮을 것이 있고 끝까지 책임을 지고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다.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이 희생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바른 결정이 아니다. 사랑을 운운하며 적당히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함이다. 누구든지 다른 이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잘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지도해야 한다. 서로 간에 해결을 위한 책임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 잘못을 행한 사람이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 여긴다.

2. 은혜를 남발하면 사랑이라고 믿는다
교회는 은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동시에 은혜로움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함이라고 믿는다. 사실 은혜를 많이 강조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 때가 많다. 문제는 은혜로운 것이 전혀 아님에도 은혜를 남용하고 남발하여 하나님의 사랑마저 오해하도록 만드는 어떤 사람들이 있음이다. 책임을 맡고도 대충 건성으로 일하는 사람,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얼버무리고 핑계 대는 사람, 말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도리어 은혜와 사랑을 외치는 사람이다.
“거- 은혜로 합시다. 세상처럼 빡빡하게 굴지 말고” “좋은 게 좋은 것 아닙니까? 사랑으로 합시다.” 다른 사람들이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만약 좋은 게 좋다는 의식을 은혜라 여기고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책임과 분별, 희생, 옳고 그름은 어떤 곳에서 사용해야 될까. 엄밀히 말해서 ‘은혜로’라는 주장은 나를 변호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가 나에게 상처 주고 손해를 입혀 힘들 때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면 그것이 은혜다. 상대의 잘못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내가 대신 짐을 지려고 은혜를 말한다면 성숙한 사랑의 태도라 하겠다. 목회자도 은혜와 사랑을 잘못 인식하고 무분별한 사랑으로 성도를 돕다가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지도력이 커질수록 더욱 성경적인 개념의 울타리를 확실히 세워야 사사로운 유혹이나 청탁, 이득의 덫에 걸리지 않으리라.

3. 감정이 따라야만 사랑이라고 믿는다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한 우리 마음은 수프 접시처럼 얕아 사랑의 감정이 채워지기 어렵다. 만약 사랑의 감정이 충분하게 따라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우리는 평생에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통해 사랑의 결론을 드러내셨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견디느니라” 주님은 감정을 사랑의 기준으로 보지 않으셨다. 의지적인 결단을 통해 행동되어지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신다. 어떤 이는 말하길 “감정은 그렇지 않은데 사랑하는 척하면 위선이며 거짓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그렇지 않다. 세상의 어떤 일도 감정에 충실하고서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의미 있고 옳은 일일수록 더욱 의지적 결단이 중요한 것 아닌가.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얄팍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익산 예안교회에 큰 시험이 닥쳤다. 이단에 빠진 장로와 몇몇 교우가 합작이 되어 거짓 이야기로 목회자를 공격하고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목회자가 참고 대응하지 않자 그들은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를 빙자하여 소리쳤다. “주여! 목사를 벌하여 주옵소서. 혼내 주옵소서!” 어느 날은 목사님 기도하는 바로 옆자리까지 와서 소리 질렀다. “목사를 벌하여 주옵소서!” 그때 목사님이 얼른 그의 손을 붙잡고 더 큰 소리로 기도했다. “주여! 축복해 주-씨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며 침례를(?) 베풀었다. 그 사람은 기겁을 하고 뛰어나갔다. 감정이 따르는 사랑이었다면 결단코 그 손을 잡지 못했으리라. 하나님은 시험의 때를 통과한 목사님과 교회를 아름답게 소성시켜 주셨다.


사랑의 가면을 쓴 두 얼굴



유럽의 왕정 시대에는 가면을 쓴 파티가 많이 있었다. 얼굴을 가리므로 신분을 숨기고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어서 왕족과 귀족은 물론 평민들도 좋아했다. 사람들은 가면 뒤에 숨어서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추구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절대 왕권을 위해 온몸을 금색으로 칠하고 태양 가면을 쓴 채 궁정 무대에서 직접 춤을 추었다. 태양 가면은 아폴로 신을 상징하며 금색을 통해 그가 프랑스에 빛을 안겨주는 왕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 주기 원했는데 그의 야망은 이루어졌다. 또 하나의 중요한 가면무도회는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3세가 암살되는 현장이다. 1792년 일단의 귀족들이 국왕 암살을 모의했고 그들은 가면 뒤에 숨어서 권총을 발사하므로 목적을 이루었다. 이렇듯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에게 밀착하는 이를 향해 가면을 썼다고 말한다.
교회 안에도 사랑의 가면을 쓰고 주님 흉내 내는 두 얼굴의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들은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랑의 가면을 쓰고 다가온다. 동정심이 많고 이해심이 많은 헌신된 자로 꾸며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하게 만든다. 자신의 계획이 잘 진행되도록 폭넓게 사람들을 사귀고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어 간다. 악한 자들은 그런 면에서 거의 심리학 박사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악한 자들의 가면 속을 다 꿰뚫어 볼 순 없지만 경각심을 잃지 않도록 가장 단순한 특징 두 가지만 살펴보자.

1. 악한 자는 아첨하는 말과 비위를 맞추는 일에 능숙하다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혼자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는 고독함이 있다. 누군가 목회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공감해 준다면 목회자는 그와 가까이 있고 싶을 것이다. 악한 자들은 이런 지도자의 외로움과 중압감을 잘 알고,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도 다 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목사님은 장차 큰일을 하실 분입니다, 우리 교회는 목사님의 꿈을 이루기에 너무 미약합니다.”
목회자는 자신을 존경한다는 그를 점차 신뢰하게 되고 모든 것을 의논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상처, 자신의 약점, 속마음까지 다 드러내고 목양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악한 자는 함께 맞장구를 치며 지도자와 나누었던 모든 것을 차곡차곡 수집해 놓는다. 그리고 어느 시점, 자신이 필요한 것을 교회나 목회자에게 요구한다. 공적 책임자인 목회자는 아무리 개인적 친밀함이 있어도 목양에 맞지 않으면 승낙하기 어렵다. 그러나 악한 자는 목회자의 거절을 듣는 순간, 목양적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목자로 존경한 것이 아니기에 앙심을 품고 그동안 수집해 놓은 것을 다 꺼낸다. 목회자의 약한 부분, 마음의 고민을 하나씩 풀어내 엄청난 떡고물을 묻혀서 세상에 퍼뜨린다. 목회자를 궁지에 내몰고 더러운 오명을 씌우는 일에 앞장선다.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격이 된 것이다. 마치 선배 목회자들이 주의를 주던 말과 흡사하다. “청빙할 때 앞장섰던 사람이 나중에 내어 쫓는 데도 앞장서니 사람의 양면을 조심하라.”
우리는 입속의 혀도 물릴 때가 있음을 안다. 하물며 사람들이랴. 언제나 듣기 좋은 달콤한 말로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봄이 필요하다. 시간이 흘러야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을 기억하고 적정거리를 두는 것도 지혜로움이라 하겠다.

2. 악한 자는 지나친 선물 공세와 섬김으로 다가온다
오랜 세월 목회하다 보면 성도들의 진심 어린 귀한 선물을 받을 때가 있다.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담은 것이니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신실하다. 하지만 악한 자들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 공세를 펼친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목회자는 선물을 주고 필요를 챙겨주는 사람이 고맙지 않을 수 없다. 사모도 그런 성도에 대해서는 친정가족 같은 마음이 들어 고민을 나누고 의지한다. 그러나 잦은 선물 공세와 목사관에 드나드는 섬김은 약이 되지 못하고 독이 될 때가 많다. 감사히 받은 선물이 올무가 되고 특별한 섬김을 받고 교제한 것이 함정이 될 수 있음이다.
어느 교회는 재정 장로가 오랜 세월 동안 교회 돈을 횡령했다. 십 년 만에 그 일이 드러나서 교회가 발칵 뒤집혔는데 목회자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 장로가 목회자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그 돈 나만 쓴 것 아니다. 그 돈으로 내가 목사님께 선물도 많이 했고 자동차도 사드렸다.”
우리 교회도 초창기에 지나치게 선물하는 여전도사가 있었다. 제법 큰 돈을 가지고 몇 번 찾아왔다. 나보다 연배가 10년이나 높은 사역자이지만 그 선물을 받을 수가 없었다.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정중히 거절하느라 많이 힘들었다. 어느 때는 웃으면서 한 시간씩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훗날 그녀는 교회를 사임하게 되자 교회를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들먹이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녀의 태도는 가뜩이나 분란이 가득한 교회에서 폭풍의 눈이 되기에 충분했다. 목회자와의 사이에 엄청난 비밀이 있는 것처럼 거짓을 퍼뜨렸지만 꺼릴 것이 없으니 함정에 빠지지 않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다른 교회에 부임해서 똑같은 선물 공세로 사모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어서 목회자와 원로 장로 부인들을 미혹했다. 결국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지고 우리의 충고를 무시했던 목회자는 쫓겨나고 말았다.
이유 없이 지나치게 큰 선물, 본인의 형편에 맞지 않은 선물, 온 신경을 목회자에게만 집중하는 사람의 섬김은 한번쯤 멈추어 서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대접을 받을 때도 적절한 것인지 살펴보고 더욱 예의를 갖추고 적정선을 지켜야 함이 옳으리라.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



1. 자신이 사랑의 빚진 자임을 날마다 기억한다
어린 시절, 삶이 무겁고 힘들어 허덕이는 나에게 주님이 찾아오셨다. 주님은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알려 주셨다. 나를 사랑하셔서 친히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감격이었는지 마치 내가 온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한 조각, 발밑에 차이는 돌멩이 한 개, 바람에 날리는 풀 한 포기에서도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세상이 너무나 경이롭게 느껴졌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는데 영혼의 기쁨이 가슴을 채워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기도하는 모습 그대로 천국에 데려가 주시기를 간구한 날들도 있었다. 주님과의 뜨거운 열애는 나의 평생에 내가 사랑의 빚진 자임을 잊지 않게 만들었다. 사랑함의 순종이 힘들어 몸부림치면, 죄의 풍랑 앞에서 떨고 있는 나를 들쳐 업고 성큼성큼 걸어가시는 주님이 떠오른다. 영원히 잊지 못할 그 날의 감격은 나로 하여금 다시 십자가를 주목하게 한다.
내가 받는 어떤 모욕과 억울함, 비난도 나를 사랑하기 위해 주님이 치르신 혹독함보다 더할까.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떠오르면 어떤 상황이든지 쉽게 평정이 되고 나의 심령도 고요히 옷깃을 여민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이며 내가 품고 용서해야 할 형제라고 가르쳐 주심이다. 또한 나 자신도 다른 이에게서 용서와 용납을 받으며 사는 자임을 상기시키신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이 훈련을 시키시고 내가 마지못해 드리는 사랑, 의지적 결단으로 드리는 사랑이라도 순종으로 받으시고 칭찬해 주신다. 신기한 것은 사랑은 사용할수록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사랑의 바구니가 차고 넘치게 채워진다는 사실이다.

2. 요셉의 인생 해석을 통해 사랑의 법칙을 배운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복수 현장에서 가슴 울컥한 사랑으로 반전을 보여준 요셉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평생의 원한을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요셉은 그리움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소리 내어 울었다. 큰 충격을 받은 형들이 보복을 두려워하며 떨자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과 후손들의 생명을 위하여 나를 먼저 보내셨나이다” 세월이 흘러 부친의 장례가 끝나자 형들은 또 한번 요셉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성경은 요셉이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고 묘사한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하나님이 하셨나니…” 악한 형들을 안심시키려 애쓰는 요셉의 모습은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다. 복수를 해도 어린 시절의 원통함을 다 풀지 못할 텐데, 도리어 긍휼과 사랑으로 되갚을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힘은 요셉의 신본주의 인생관에서 나온 것이라 믿는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 해석 코드를 사람에게서 찾지 않았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해석 코드를 찾았다. 많은 굴곡과 배신의 현장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향해 미움을 표출한 적이 한 번도 없는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이 하셨나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찌르는 가시조차도 그분의 손에 있음을 깨닫고 다른 사람을 향해 분노와 원한을 품지 않는다. 가슴에 시퍼렇게 멍든 상처를 풀어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이렇듯 자신의 인생을 해석하는 코드가 사람 중심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신본주의 인생관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보복할 틈이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원수 맺을 자격이 없는 존재며 오히려 용서하고 품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3. 사랑은 의와 믿음과 화평이 함께 하는 진리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교회 안에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사랑으로 인한 갈등이 있다. 연약하게 보이면 무조건 보호하고 감싸는 것이 사랑이라 여기는 사람, 교회 안에서는 결코 상처 받는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전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시각으로 사랑을 강조하고 대체적으로 이분법적인 사고로 사람과 사건을 대한다. 가진 자와못 가진 자, 강자와 약자로 분류하여 연약한 자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한다. 교회 안에 사소한 일이라도 생기면 먼저 물음표를 붙인다. “누군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는가? 담임목사는 사랑이 있는가? 교회는 사랑이 있는가?”
그들은 누군가 상처 받았다는 말에 많은 무게를 둔다. 그러다 보니 교회를 어지럽히는 잘못된 생각이나 태도를 가진 사람조차 훈계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심지어 영혼을 유괴하기 위해 살며시 들어온 이단과 거짓된 자도 ‘사랑’의 이름으로 두둔한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인간적인 연민으로 하나님의 의와 믿음을 도외시하는 판단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결과적으로 목회자와 성도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거짓된 눈물과 변명을 구별하지 못하고 교회와 지도자를 비난하며 대립하는 우를 범한다.

믿음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듯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 마음대로 해석하고 사용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많은 본문에서 사랑의 원칙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사랑의 원칙은 단순히 사람끼리 감싸주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매우 높은 도덕적 수준을 내포하고 있다. 나아가서 하나님 자신이 드러나는 진리의 통로임을 보여 준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너는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이 말씀들은 사랑만 덩그러니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진리 안에 있는 믿음과 의로움을 전제하고 서로에게는 화평의 열매를 맺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입증하라는 말씀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왜 주어졌는가?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다.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으로 드러내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말씀의 분별과 지혜를 잊지 않아야겠다. 교회 공동체 안에 갈등이 생길 때 사람의 말에 치우치지 않고 분별하는 원칙을 가져 보면 어떨까?


- 사람의 말을 듣고 감정에 몰입되기 전, 사랑에 대한 성경의 원리를 붙잡자.
- 그 사람의 주장을 성경에 비추어서 옳은 일인가, 믿음에 합당한 내용인가 살펴보자.
- 교회를 걱정하는 그의 태도는 화평인가, 대립인가를 살펴보자.
- 아무리 친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성경의 원칙에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기로 결심하자.



가장 귀한 보석에 가짜가 많듯이 사단은 하나님의 선물인 사랑에 거짓을 덧발라 성도들을 미혹하고 교회를 흔들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에 집중하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자신과 교회가 진정한 사랑의 통로 되도록 인도해 주시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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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17 Winter (30호) 평신도는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file 2018.01.05
33 2017 Autumn (29호) 성도의 교제는 영적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2017.09.28
32 2017 Summer (28호)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2017.06.23
31 2017 Spring (27호) 복음은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생명의 피입니다 2017.04.05
30 2016 Winter (26호) 건강한 리더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에서 출발합니다 2016.12.28
29 2016 Autumn (25호) 말씀의 훈련은 '내가 복음'을 '주님의 복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2016.09.21
28 2016 Summer (24호) 사모의 영광은 예배의 영광에서 채워집니다 2016.06.22
27 2016 Spring (23호) 교회는 어두운 밤 외로이 서 있는 등대입니다 2016.03.29
26 2015 Winter (22호) 사모의 즐김은 피로회복제와 같습니다 2016.01.04
25 2015 autumn (21호) 사모의 지성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2015.10.06
24 2015 summer (20호) 사모의 멋은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2015.07.15
23 2015 Spring (19호) 쉼은 크고 넓은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2015.04.02
22 2014 Winter(18호) 절제함은 우리의 질주를 막아주는 성령의 브레이크입니다 2015.01.09
» 2014 Autumn(17호) 사랑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것입니다 2014.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