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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전 우주와 같습니다

 

조성희 사모(행복연구원장)


수 년 전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다. 젊고 창의성이 풍부한 스티브 잡스는 창의성과 성격적인 독특함, 기이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궁금해서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스티브 잡스의 괴팍한 성격과 특이한 행동은 어린 시절의 삶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을 하였다.


‘스티브 잡스’는 사생아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양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자신을 낳고 버린 친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다. 청년이 되어서 그리움은 원망으로 바뀌었고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마음의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 동양 문화에 심취해 보기도 하고, 히피족이 되어서 맨발로 교정을 걸으며 기인의 행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지우지 못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스티브는 여자 친구와 동료와 함께 풀밭에 누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다가 무언중에 중얼거린다. “도대체 자식을 낳고 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인가, 돌보지 않을 자식을 왜 낳는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스티브 잡스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그는 당황하면서 다른 말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이는 그의 내면에 부모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깊은 고통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어느 날, 사랑하던 여인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잡스의 고통스러운 상처는 극도의 분노로 표출되었다. 그는 마치 정신줄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분노가 가득해서 외쳤다. “내 아이가 아니야.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 아이를 꼭 낳겠다면 헤어져. 더 이상 만나지 말자.” 사랑하는 여인이 울면서 애걸을 하건만 그는 냉정하게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세월이 흘러서 잡스가 성공 가도를 달릴 때, 대학 강연회에서 한 여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여인이 임신을 하게 되자 잡스는 예전과 똑같이 발작하듯 소리쳤고 여자와 헤어지고 말았다.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분노가 솟아오른 것이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친구들과 지인들은 잡스에게 정신과 의사를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마침내 잡스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애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결혼을 했다. 다행히 그의 부인은 참 좋은 여인이라고 했다. 잡스의 내면의 상처로 인한 성품의 연약함을 다 이해해 주고 잡스가 버렸던 첫째 딸아이도 데려와서 함께 지내면서 잡스를 지지해 주었다고 한다.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는 그 한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어머니와 연합된 모든 아이들의 이야기다. 아기는 태중에서 이미 어머니의 숨결, 말, 행동, 감정을 함께 공유하고 어머니에게 익숙해졌다. 그런데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익숙했던 어머니의 숨결이 사라진다면 영아에게는 온 세계가 사라진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생후 1~2년에 엄마의 영향력이 가장 크고, 적어도 10세~12세 이전까지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깊은 유대관계를 누려야 한다.
만약 이 시기의 아이가 어떤 이유로 부모와 떨어지게 된다면 분리 불안증이나 신체, 정서 발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외적으로 보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은 아이들도 있지만 어린 시절의 여파로 내면에는 불안감, 우울감, 불신, 자신감 결여 등이 내재된다. 성장하면서 겉모습은 그럴듯해도 내면이 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유리그릇 같아서 유혹이나 중독에 쉽게 빠진다. 우리가 어른으로서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발견하고 삶을 돌아보면 대부분 어린 시절에 그 뿌리가 있음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듯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는 전 우주와 같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부모 없는 세상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 부모를 통한 안정감이 어린 아이의 행복을 좌우한다

 

유학 중인 남편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밤 갑자기 커다란 거인이 우리 침대를 마구 흔들어대는 것을 느끼고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거인이 아니라 강도 6.7이 되는 지진이었다. 우리 집은 진앙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똑바로 설 수 없을 만큼 지축이 흔들렸다. 두려움 속에서 비틀거리며 아이들의 방으로 달려가 아이들을 안아 주었다. 지진의 떨림이 멈추어서 창문 밖을 바라보니, 동네 사람들이 잠옷 차림에 맨발로 거리에 뛰쳐나온 것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다운타운에 있는 방송국 근무를 위하여 출근하는데, 도로 옆의 인도에는 주민들이 거리에서 밤을 지새운 모습이었다. 지진의 여파는 어른들에게도 큰 충격이어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집에서 머물지 못하고 거리에서 서성인다. 이 모습을 보고 누구도 겁이 많은 어른이라고 비웃지 못한다. 인간은 땅에서 발을 딛고 사는 존재인데, 인간이 믿고 지탱하던 땅이 흔들리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지진의 충격처럼, 어린 자녀들도 부모의 존재를 통해서 마음의 행복과 불행이 갈려진다. 솜털 보송보송한 병아리처럼 아이의 눈으로 사방을 바라보니 온 세상은 낯선 곳이 분명하다. 오직 그를 품어 주고 눈을 맞춰 주는 엄마, 아빠의 존재만이 그를 안심케 하는 안전지대요, 피난처요, 요새라 여겨진다. 어린 자녀들은 그 품 안에서 안정감을 누릴 때 완벽한 만족과 행복감을 느낀다. 부모를 통해 안정감이 충족된 아이에게는 세상은 믿을 만한 곳이 되고 무엇을 하든지 긍정적인 마음과 태도를 가지게 된다.
반대로 믿었던 안전지대, 요새에서 안정감을 얻지 못한 아이의 마음에는 좌절과 분노, 불안함이 싹트게 된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의 행복지수의 일 번지는 외적인 요소에 달려 있지 않다. 흔히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좀 더 잘 사는 환경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는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다. 부모는 가정의 분위기를 늘 평화롭고 안정되게 가꾸어야 할 책임이 있다. 가정의 고요한 평화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원칙을 세워서 가정을 보호해야 한다.
사역의 고민거리를 가정에 들고 와서 신경전을 벌이지 않아야 한다. 어린 아이들을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가정에 와서도 끊임없이 전화 심방을 하느라 아이들을 방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가정에서는 어린 자녀의 필요를 최우선으로 삼겠다는 간단한 조약들이다. 이 정도만 지켜도 가정의 안정감이 커질 것이다. 부모와 어린 자녀가 함께 식탁에 둘러앉으면 하루의 일들을 서로 나누고 따뜻하게 격려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만든다. 부모가 없었던 낮 시간을 메꾸기 위해서 형사가 취조하듯이 자녀의 일과를 추궁하고 감시하는 듯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다. 어린 자녀가 기대하는 시간은 부모의 애정 담긴 눈길과 따스한 돌봄, 사랑의 표현이다. 이러한 정서가 충족되면 아이는 성장하면서 부모와의 약속을 더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자신을 스스로 관리하는 힘이 생긴다.



@ 어린 자녀에게 꼭 필요한 영양제는 자존감이다

 

엄마는 영유아 자녀를 위해서 영양제를 먹이며 건강하게 양육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그러다가 유아, 유치원 시기가 되면 다재다능함과 아이들의 두뇌 발달을 위해서, 학원이나 영재 교실 같은 곳으로 내몰게 된다. ‘놀이’라는 단어가 붙기도 하지만 실제는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경쟁하는 분위기에 노출되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배워야 할 시기가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기력한 아이로 변해 버린다. 왜 그럴까? 아이들을 상담해 보면 대부분 유아 때부터 받은 갖가지 교육의 스트레스가 심해서 배운다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과 반발이 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모는 안타까워서 어르고 달래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엄마의 손을 떠나 세상 속에 던져진 작은 아이가 이미 많은 상처를 받은 탓이다. 아이의 자존감은 다 무너져 내렸고 아이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것이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런 현상은 사역자의 가정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어린 자녀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내면의 자존감을 세우는 영양제를 먹여야 한다. 자존감을 높이는 영양제를 아이의 표현으로 몇 가지만 나누어 보려고 한다.


1. “나는 엄마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야”


어린 자녀의 자존감을 높이는 처방 가운데 제일 필요한 것은 자신이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자녀이며 부모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확신이다. 바로 ‘소속감, 유대감’ 이다. 나는 혼자 있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부모와 함께 있고 ‘우리’라는 단어로 결속되어 있다. 내가 잘할 때나 못할 때나 나의 부모는 한결같이 내 곁을 지킨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사도 바울의 확신과 같은 믿음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확신이 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야단을 쳐도 그것이 사랑임을 알고 있다. 종아리를 맞고도 일기장에 사랑을 남긴다. “아빠, 엄마~ 죄송해요. 더 잘할게요.” 그러나 이 확신이 부족한 아이들은 자신이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칠까 전전긍긍하고 자신이 잘못하면 부모의 사랑도 사라진다고 오해한다. 그래서 거짓을 꾸며서라도 부모의 환심을 사려고 애쓴다. 우리는 작은 아이에게 말과 행동으로 사랑의 확신을 주어야 한다.


• 수시로 -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이라고 불러 준다.
• 기도할 때 - “하나님,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들을, 딸을 제게 보내 주셔서 감사해요.”
•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 “엄마가 무지 사랑하는 우리 딸, 아들이에요.”
• 잘못을 저질렀을 때 – “엄마는 너를 사랑해, 그래서 잘못된 행동을 혼내는 것이란다.

                               훗날 엄마가 천국 가고 너 혼자 있을 때, 어디에서 살게 되더라도

                               인정받고 존중받는 사람이 되게 하고 싶기 때문이야.”
• 설명해도 이해력이 떨어질 때 - “그래, 너는 수학이 어려운가 보구나. 그래도 국어는 곧잘 하니까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모든 과목을 다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

                               지금은 이해가 안 돼서 힘들겠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할 수 있단다.”
• “사랑해, 사랑해”가 엄마 아빠의 노래가 되면 아이는 걱정이 없어진다.


2. “나는 엄마 아빠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야”


사람의 가치를 달아보는 저울은 없으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나는 이 모임에서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존재인가? 사람들은 나를 어느 정도 귀중히 여길까?” 부모도 어린 아이들에게 황당한 질문을 던진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더 좋아?” “만약 아빠 엄마가 헤어지면 너는 누구랑 살고 싶어?”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질문은 어린 자녀들에게도 중요한 물음이다. 아이가 소속된 가정, 부모에게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 “동생과 나 사이에서 부모는 누구를 더 좋아할까?” “언니와 내가 잘못했을 때, 부모는 각각 어떻게 우리를 대하실까?” “나보다 잘 생기고 무엇이나 잘하는 형은 늘 자랑하시는데~ 나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나는 첫째, 막내도 아니고 중간이니 별로 관심도 없으시겠지?” “만약 내가 없어진다면 부모는 얼마나 슬퍼할까?” “나는 말도 잘 못 하고 조용하니 우리 아빠는 실망스럽겠지?”
만약 어린 아이가 내면에서 가지고 있던 이런 궁금함을 부모에게 질문한다면 부모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조그만 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까불지 말라고 핀잔하며 면박을 줄 것인가? 사실 작은 아이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그만큼 심오하고 중요한 물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부모가 그것을 건성으로 받거나 웃음으로 무시한다면 아이는 부모에 대해서 크게 오해할 수 있다.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가 아닐까 지레짐작했던 것을 기정사실로 확신하고, 마음의 골방에 넣어 둔다. 영원히 수면 밑에 가라앉혀 두지만, 무의식 속에 늘 무가치한 자신을 탓하고 괴롭히게 된다.
그러므로 자녀가 몇 명이든지 각 아이들은 저마다 소중한,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려 주어야 한다. 특히 동생이 생겼을 때 큰아이들에게는 위기의 순간이다. 동생이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부모의 관심을 다 가져가니 얄밉기 그지없다. 동생이 조금 자라면 양보하라고, 잘 놀아 주라고 늘 야단맞으니 큰아이는 고통스럽다. 그래서 동생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모가 이삭과 리브가처럼 아이의 가치를 소중하게 다루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바다같이 넓은 마음을 가지기를 기대하지 말고 부모의 지혜로 큰아이도, 동생도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알려 주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 동생이 생겼을 때 :

  (아기에게) “아가~ 아빠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네 형이야. 넌 앞으로 형 말을 잘

                들어야 해. 형은 우리 집에 큰아들이고 너를 잘 돌봐 주는 좋은 형이 될 거야.”
  (큰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 동생이 생겼지만 너는 아빠의 자랑스러운 첫째 아들이야.

                아빠는 너를 사랑해. 그리고 네가 좋은 형이 될 것이라고 믿어.

                아빠 없을 때는 엄마와 동생을 잘 도와줘. 부탁해.”

                → 아이는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확증을 받고 동생에게 질투심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도리어 아빠가 믿어 주신 만큼 더욱 책임 있는 형이 되려고 결심한다.


• 형제들 사이에 끼인 내향적인 아들에게 :

   “사랑하는 아들~ 형이랑 누나 사이에서 어려운 일은 없니? 엄마는 말 없고 조용하지만

    마음이 따스한 너를 사랑해. 너도 주장하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 늘 참는 것 같아.

    엄마에게는 솔직히 말해도 돼. 필요한 것도 말하고~. 엄마는 네 마음 잘 알고 네 편이야. 알지?”

     → 아이는 엄마가 자신을 잘 알고 자기 마음을 읽어 주는 데 감동한다.

         씩 웃지만 마음에는 자신이 정말 소중한 존재임을 확신하고 엄마를 더욱 신뢰한다.


유년기의 작은 아이들은 큰아이, 작은아이 가릴 것 없이 다 똑같은 어린 아이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을 각각 만나 데이트하고 사랑을 표현하므로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귀하게 여기도록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3. “내가 무엇을 해도 아빠 엄마는 잘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셔”


어린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요소 중에 다른 하나는 바로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용기, 자신감, 능력감이다. 이것은 실패하거나 실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실수와 실패와 잘못이 있었어도 여전히 그를 지지해 주고 믿어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자신감이다. 사도 바울도 이 자신감을 빌립보서에 기록해 놓았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사도의 이 자신감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자신이 가난할 때, 부할 때, 그 어느 때라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의 어린 자녀들에게도 이런 자신감, 능력감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역할을 감당할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 부모의 조건 없는 지지와 격려가 있을 때 비로소 아이들은 안심하고 무엇이나 시도해 볼 용기가 생긴다.

“괜찮아, 실수할 수 있지. 계속하다 보면 잘하게 될 거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아빠 엄마도 네 나이 때는 잘하지 못했어. 훌륭한 어른들도 어린 시절에는 다 너와 같은 경험이 있단다. 걱정하지 마. 창피하게 생각하지 마. 네가 시도한 것이 용기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 비웃는 것이 부끄러운 태도야. 우리는 너를 지지한다.”

어떤 일에서 어떻게 실수했더라도 부모의 마음 담은 격려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의 작은 시도가 잘못되었을 때 부모가 크게 반응하여 화를 내고 다그치거나, 낙심하는 표정을 보이면 아이들은 죄책감을 느낀다. 다시는 그런 분위기를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 부모가 실망할 수 있는 일은 아예 시도하지 않게 된다. 많은 청소년들이 꽃도 피우기 전에 자신의 삶을 쉽게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대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은 부모는 어떤 상황과 순간에도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 줄 방도를 찾아야 한다. 아이의 실수와 부족함을 비난하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타인의 몫이다. 적어도 부모의 행동은 타인과 달라야 한다. 결과보다는 마음 졸이고 준비한 자녀의 속내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 부모의 넉넉한 가슴과 여유로움을 경험한 자녀는 성장하면서 더 많은 모험을 시도하며 도전 자체를 즐기게 될 것이다.

자존감은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는 외골수의 자존심 싸움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여 사람들의 시선에 끌려다니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따라 기꺼이 모험하고 헌신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자존감이 높은 자녀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타인의 삶도 존중하는 멋진 인생이 될 것이다.



@ 어린 자녀를 위한 최고의 교육은 부모의 손에 달려 있다

 

아파트 주변에는 우리 자녀들을 교육해 주는 학원들과 교습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우리 자녀에게 가장 좋은 교육장은 가정이고, 좋은 교사는 부모다. 교육 재료는 아이와 부모가 함께하는 일상 속에 다 준비되어 있다. 부모가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자녀의 주변을 돌아보면 내 자녀에게 꼭 맞는 가르침을 줄 수 있다. 특히 자녀에게 믿음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가치를 심어 주고 올바른 태도를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특권이다. 이러한 가치는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못한다. 어린 자녀를 위해 부모가 준비할 수 있는 교육은 무엇일까.


1. 아이와 함께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교육으로 활용한다


아이와 함께 자연을 보고,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그 시간을 다 교육의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자녀와 함께 했던 시간을 되짚어 보면서 대화하는 것이다. “무엇을 보았니? 어떤 느낌이었어? 왜 그랬을까? 네가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나님이 보시면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작은 풀 한 포기, 돌멩이 한 개, 곤충 한 마리도 그 안에 하나님의 교훈이 담겨 있음이다.
30년 전, 아이들이 자랄 때 나는 다양한 것을 느끼게 해주려고 많은 시도를 했다. 작고 협소한 아파트에서 여러 종류의 식물을 가꾸고 벽돌과 화분을 이용해서 수족관도 만들었다. 여러 종류의 물고기와 다양한 새들, 거북이, 다람쥐를 키웠다. 거실의 작은 벽에는 마치 유치원 벽화인 것처럼 재미있는 그림 게시판을 만들어서 아이의 동심을 배려해 주었다.

어느 날 유치부 다니는 작은아이가 질문을 했다. “엄마, 하나님은 어떻게 이 세상을 다 볼 수 있어요? 어떻게 미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을 수 있어요?” 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설명한다는 것이 난감했다. 잠시 기도하고 생각한 후 이렇게 말했다. “참 좋은 질문을 했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엄마도 다 설명하지 못해. 엄마가 하나님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수족관을 보면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잘 봐~. 여기 소파에 앉아서 우리 수족관을 바라보면 잘 보이지? 검은 고기, 빨강 고기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한눈에 다 보이지? 그것은 우리가 이 수족관을 만들었기 때문이야.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을 다 만드셨으니 아마 우리처럼 이 세상을 한눈에 다 보실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때 일이 상세하게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작은아이가 “아~ 그렇구나” 하고 쉽게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 것이 생각난다.


2. 나이에 맞는 봉사, 배려, 나눔을 교육으로 활용한다


작은 아이들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고 배려하고 나누는 섬김을 배워야 한다. 가족을 위해 식탁에 수저를 놓고, 현관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음식을 먹고 난 후 자기의 그릇을 개수대에 옮겨 놓는 것들은 사소하지만 삶에서 매우 중요한 교육이다. 어리니까 그저 어리광만 피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자녀를 이롭게 하는 태도가 아니다. 어린 자녀들이 부모의 가르침을 통해 섬기고 나누는 습관을 쌓으면 세상의 어떤 곳에서도 환영받고 존경받게 된다.
미국에서 교회를 다닐 때 한국과 다른 풍경을 목도했다. 그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유아실, 영아실에서 아기 한 명씩을 업어 주고 안아 주면서 돌보는 장면이었다. 우리나라 부모들 같으면 자신의 자녀들이 더 어린 아기를 돌보느라 뛰어놀지 않고 수고하는 것을 싫어했을지 모른다. “왜 네가 그런 일을 하는 거야? 너 말고 더 큰 아이들, 어른들도 있을 텐데~”라고 말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곳의 부모들은 자기의 어린 자녀가 끙끙대며 봉사하는 것을 기뻐하고 당연하다는 인식이었다.

차원이 다른 부모 사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부모는 아이가 작은 유아일 때부터 아이의 손을 잡고 해외로 선교 봉사를 가기도 한다. 어떤 청년은 유아 때부터 여름, 겨울 방학을 모두 해외 단기 선교 떠나는 부모님과 동행했다. 그 덕분에 10대가 되었을 때는 선교 경험이 10년을 넘은 베테랑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교지를 방문하면 어른들이 도와주지 않아도 자기 또래의 아이들을 위한 집회는 스스로 알아서 다 진행했다는 간증도 들었다. 참으로 지혜로운 부모들이고 자랑스러운 청년들이다. 그들에게 봉사와 섬김, 나눔은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이 된 것이다. 누가 이런 젊은이를 환영하지 않겠는가.


3. 훈육을 위한 울타리를 세워 교육으로 활용한다


작은 아이들은 언제나 부모의 관심을 끌기 원한다. 소리 지르고 떼쓰면서 관심을 끌고, 때로는 흐느껴 울면서 애처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부모와 힘겨루기를 한다. 아이들은 어려도 부모가 자신에게 얼마나 많이 끌려다니는지 잘 알고, 어느 때가 되면 부모가 지쳐서 포기하는지 계산이 된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면 음식을 먹지 않고 버티거나, 새로운 장난감을 사주지 않으면 이전 것을 부숴 버리기도 한다.
자녀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여 그냥 방치하면 안 된다.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 음식을 거두면 된다. 장난감을 부쉈으면 그에 상응하는 훈육을 하고 아이의 용돈으로 장난감을 고치게 하고 새 장난감 사는 시기를 곱절로 늦추어 버린다. 때로는 아이의 고집을 꺾기 위해서 마음이 아프지만 격리하여서 절제와 인내를 배우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만약 부모가 귀찮고 바빠서 번번이 아이의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면 아이의 고집에 끌려가는 부모가 된다. 아이와 힘겨루기에서 패배한 부모는 더 이상 자녀를 다스릴 권위가 서지 않는다. 작은 아이에게 마땅한 훈육을 하고 울타리를 쳐서 경계로 삼고 그 이상을 넘나들지 못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훈육의 울타리를 세우는 것은 자녀의 일생이 하나님의 말씀의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행복을 누리기 원함이다.


어린 자녀를 교육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스승은 바로 엄마다. 엄마는 할 수 있으면 자애로움으로 아이를 가르쳐야 한다. 어린 아이가 반복하여 잘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좋은 습관으로 자리 잡기 위해 씨름하는 시기이므로 엄마도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수고해야 한다. 엄마가 비록 사역에 지쳐있는 순간이라도 신경질과 짜증 섞인 소리로 외치는 것은 어린 자녀가 설 곳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동시에 어린 자녀를 너무 외롭게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자녀에게도 꼭 필요한 시간이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오늘’을 요구하지 않고 훌쩍 떠나게 될 것이다. 외로움에 지친 아이는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을 마음껏 먹은 자녀는 인생을 노래하면서 강건하게 살 수 있다. ‘아가서’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향해 노래한 솔로몬의 고백을, 어린 자녀들과 부부가 함께 고백해 보면 어떨까.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아가 6: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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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18 Winter (34호) 청소년 자녀는 조개 속의 진주입니다 file 2019.01.04
» 2018 Autumn (33호)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전 우주와 같습니다 file 2018.10.10
36 2018 Summer (32호) 어머니의 사랑은 자녀를 살리는 보약입니다 file 2018.06.27
35 2018 Spring (31호) 아버지 당신은 자녀의 미래입니다 file 2018.04.01
34 2017 Winter (30호) 평신도는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file 2018.01.05
33 2017 Autumn (29호) 성도의 교제는 영적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2017.09.28
32 2017 Summer (28호)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2017.06.23
31 2017 Spring (27호) 복음은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생명의 피입니다 2017.04.05
30 2016 Winter (26호) 건강한 리더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에서 출발합니다 2016.12.28
29 2016 Autumn (25호) 말씀의 훈련은 '내가 복음'을 '주님의 복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2016.09.21
28 2016 Summer (24호) 사모의 영광은 예배의 영광에서 채워집니다 2016.06.22
27 2016 Spring (23호) 교회는 어두운 밤 외로이 서 있는 등대입니다 2016.03.29
26 2015 Winter (22호) 사모의 즐김은 피로회복제와 같습니다 2016.01.04
25 2015 autumn (21호) 사모의 지성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2015.10.06
24 2015 summer (20호) 사모의 멋은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2015.07.15
23 2015 Spring (19호) 쉼은 크고 넓은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2015.04.02
22 2014 Winter(18호) 절제함은 우리의 질주를 막아주는 성령의 브레이크입니다 2015.01.09
21 2014 Autumn(17호) 사랑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것입니다 2014.09.14
20 2014 Summer (16호) 정직함은 영혼의 산소입니다. 2014.07.02
19 2014 Spring (15호) 화평은 십자가의 은혜와 함께 갑니다 2014.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