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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보다 먼저 찾아온 복음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선 선교의 놀라운 특징은 ‘선교사보다 복음이 먼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1866년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 선교사는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조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당시 셔먼호 선장이 조선의 군인 이현익을 억류해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는 등 강압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해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는 죽기 직전 성경이 들어있는 작은 보따리를 박춘권이란 졸병에게 건네게 됩니다. 1899년,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 땅에서 순교한 지 33년이 지난 이 때 마펫 선교사 앞에서 한 남자가 이런 간증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대로는 못살겠습니다. 제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입니다. 그때 그가 죽어가면서 제게 주었던 작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 마음에 찔려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시 토마스 선교사가 마지막으로 건넨 그 한 권의 성경이 한 영혼을 살린 것입니다.

조선의 문이 열리다

조선으로 향했던 토마스 선교사의 발걸음은 한 영혼을 살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에서 500여권의 성경을 배포했는데, 그 중 일부를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가져가 여관 벽을 도배하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 여관에 묵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합니다. 그 중 홍신길은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고,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됐으며,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인이었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장로가 됐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 신자가 됐다고 합니다. 특히 박영식은 자신의 집을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으로 내놓게 됩니다. 이렇듯 조선은 선교사보다 먼저 복음을 접하고, 또 복음으로 준비된 나라였습니다.

소래교회

소래교회는 1884년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입니다. 서상륜은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한글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는 일에 힘썼던 인물이고, 그의 동생 서경조는 황해도 장연 땅 소래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부하며 전도에 힘썼던 인물입니다. 그 당시 두 형제가 세운 교회당은 ‘초가 예배당’이었습니다. 그 이후 1895년 한옥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놀랍게도 교회를 건축할 때 선교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전히 토착민들의 헌금으로 건축했던 한국 최초의 자생적 교회이자 한국의 뿌리가 되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리더를 심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이 두 사람이 1885년에 입국하면서 본격적인 선교가 이뤄지게 됩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로서, 의료선교사인 부인과 함께 고아원과 고아학교인 구세학당을 설립했고, 초대 성경번역위원장을 맡아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위해 직접 영한사전, 한영사전, 그리고 한국어문법서 등을 만들고 출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서울의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 매진했고, 1887년 조선 첫 개신교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해 복음 전파에도 힘썼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 날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1885년 4월 9일, 제물포에 입국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드린 기돕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 전파에 힘썼고, 근대교육에도 열정을 쏟았습니다. 배재학당을 세워 산수, 과학, 천문학, 지리, 그리고 야구와 축구, 정구 등 새로운 교육을 통해 서양교육과 기독교 교육을 펼쳐 나갔습니다. 특히 일제치하의 우리 민족에게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 서재필 등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고자 군산으로 향하던 중 배가 침몰했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다 결국 순교하게 됩니다. 조선 땅을 찾은 여성 선교사도 있었습니다. 메리 스크랜튼 여사는 남성 위주 교육제도와 교육내용을 안타까워하며 여성 교육 기관을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처음에는 1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것이 후에 7명으로 늘어나게 되자, 명성황후는 여성의 순결성과 명랑성을 상징하는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 세워졌습니다.

의학 민족의 마음을 싸매다

1884년에 입국한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은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중상을 입은 민비의 조카 민영익의 생명을 구하게 됩니다. 이 일로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받고, 고종을 설득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합니다. 이로써 의료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광혜원은 후에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자 병원으로 현재 세브란스 병원의 모태가 됩니다. 제중원을 시작으로, 당시 우리나라 전역에 기독교병원이 세워졌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고통을 치유하게 됩니다. 알렌의 동역자였던 스크랜튼은 1885년 정동에 민간의료기관으로 ‘시병원’을 열어 전염병에 걸려 버려진 환자들을 데려다가 치료하고,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이후 시병원은 부녀자들과 어린이 치료를 전문으로 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했습니다.

문서선교의 출범

초기 문서선교는 한글보급과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선교 초기에 성경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한글을 택한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에 복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한글이 전파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1900년경 북감리회 선교사 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권서들은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책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써, 자기 백성들을 얽매고 있는 무지와 문맹의 사슬을 끊도록 지속적으로 영감을 불어넣는 자들이다. 현재 나의 목회를 받고 있는 1500명의 개종자들 가운데서, 글을 읽지 못하나 부분적으로나마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이는 1900년경의 신자들 사이에 한글 보급률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성서공회에 의해 1906년 최초의 공인역 ‘신약전서’가 출간되고, 1911년 구약전서가 출간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커져갔고, 한글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국을 품은 선교사

초기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자력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의 세 가지 원리를 세우고 교회의 조직과 운영 면에서 큰 선교열매를 거둡니다. 특별히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부터 시작된 사경회는 ‘전국적인 교회지도자 양성’의 열망으로 이어져 많은 신앙 인재들을 양성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선교지 분할협정을 세웠는데요. 이는 한국 선교에 있어 불필요한 중첩을 피하고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서울은 공동지역으로 정하고, 경기와 충북, 경북, 황해, 평남, 그리고 평북지역은 북장로교 선교회가, 충남, 전북, 전남, 제주 지역은 남장로교 선교회가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함남과 함북 지역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가 감당했으며, 경기와 충북, 강원, 황해, 평남, 평북지역은 북감리교 선교회가, 평북, 경기, 강원, 함남 지역은 남감리교 선교회가, 마지막으로 함남과 함북 지역은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분할해 선교에 힘썼습니다. 이런 지역 분할로 인해 교단별로 더욱 활발한 선교가 이뤄지게 됩니다.

1903년 완산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 선교사가 자기 안에 있던 그릇된 민족적 우월감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술과 능력을 의지한 교만함을 공개적으로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엄청난 성령의 불길이 한반도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불길이 1907년 1월평양장대현교회로 이어지면서, 대대적인 부흥의 불꽃이 타오르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자 다 함께 기도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온 세계에 한국식 기도로 알려진 통성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한반도를 뒤덮게 되면서, 차츰 교회가 조직화 되었습니다. 1907년 9월, 평양장대현교회 예배당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는데요, 당시 독노회에서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명이 목사로 장립하는 안수식이 거행됐고, 이기풍 목사를 제주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당시 참석 총대는 목사 33명, 장로 36명, 선교사 38명이었습니다. 이러한 뜨거운 부흥의 역사는 ‘백만인구령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참회와 회개의 영적대각성이 민족가운데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복음주의연합공의회를 중심으로 백만인구령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합니다. 백만인구령운동의 중심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나 김익두 목사처럼 복음의 열정에 불타 전국을 누비며 사경회를 인도하고 또 구령의 열정으로 전도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백만인구령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한국교회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 운동은 후대에 민족복음화를 위해 힘을 모았던 놀라운 움직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관순, 주기철, 손양원

초기 한국 선교는 민족의 아픔과 함께 하는 선교였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민하며, 복음의 능력으로 그 모든 고난을 견디게 만든 것이 바로 ‘신앙’이었습니다.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던 어린 소녀, 이화학당을 다니던 유관순은 나라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일제의 잔혹한 총칼 앞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그 뜨거운 마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아우내에서 시작한 그녀의 독립운동은 그녀의 가슴 속에 가득했던 애국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신앙이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곁에서 유관순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그녀의 조카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사흘동안 기도만 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뭔가 계시를 받은 듯 미친 듯이 기도를 마친 그녀의 얼굴은 온통 환하게 빛이 났고, 말에 힘이 있었고,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 교회와 주님을 사랑하던 유관순 열사는 자신의 생애를 조국을 위한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녀는 교회에서 나고 자랐으며, 교회에서 배웠고, 교회에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예배로 마지막 삶을 마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행복할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유관순이 남긴 마지막 기도가 마음을 울립니다.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 이 말은 주기철 목사님께서 평양 형무소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면서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한 마디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온 몸으로 맞서다 해방 1년을 앞두고 주님 품에 안긴 순교자입니다. 6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고, 일제는 그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온갖 회유를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런 기도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나 같은 약한 사람이 고문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어머니, 저의 마음이 변치 않게 기도해 주십시오. 남은 기족들을 부탁합니다.” 고통 중에 있던 그는, 감옥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많은 교회들이 신사참배에 동참할 때, 주님께서 쓰러져 있는 주기철 목사님에게 ‘너마저 날 버리겠느냐?’라고 물으셨고, 그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모른다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이런 고통 가운데 이 말씀을 남기시고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는 줄 알았는데,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지고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분이손양원 목사님입니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뤘고,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는 두 아들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잃고 맙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아들의 죽음에 가담한 청년을 살려주고, 또 용서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사랑의 원자폭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온전히 인정하는 손양원 목사님의 9가지 감사기도문은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를 사는 우리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고, 또 겸손하게 만듭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 순교자인 손양원 목사님은 6.25 때 공산군의 총에 맞아 48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늘 사랑하고, 늘 감사했던 그를 우리는 이 땅이 낳은 ‘성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