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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의 개혁가 그 기초를 놓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성당 정문에 95개의 반박문을 게시함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그릇된 가르침에 반대하며,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모토로 종교개혁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루터, 칼빈, 츠빙글리와 같은 권위적 종교개혁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 종교개혁자들입니다. 이 세 사람을 권위적 종교개혁자로 분류하는 이유는, 이들이 종교개혁의 주류를 이끌며, 종교문제와 사회문제를 함께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일반적 종교개혁자들로 분류 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에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원래 로마가톨릭교회의 수도사였던 그는 늘 진실한 삶을 위해 울고, 금식하며, 고행의 길을 선택했지만, 늘 내면의 불안함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6절, 17절 말씀을 읽으며 구원은 선행이나 봉사가 아닌,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그릇됨을 깨닫고, 95개의 반박문을 붙임으로 종교개혁의 문을 열게 됩니다. 독일어로 쓴 그의 반박문은 2주 만에 독일인들 모두가 읽게 되었고, 라틴어로 번역돼 두 달 만에 온 유럽이 다 읽게 됩니다. 그는 지난 1000년 동안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던 믿음, 은혜, 칭의 교리를 성경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증명하면서 바울과 어거스틴의 신앙을 회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멜랑히톤이 루터주의 성명서라 할 수 있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며 독일의 종교개혁을 이끌어 갔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루터와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끈 인물입니다. 스위스 용병 군목이었던 그는 용병제도의 참혹함을 깨닫고 젊은 엘리트들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키는 일에 힘썼습니다. 또한 스위스가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번민하고 있을 때, 프로테스탄트 대표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하인리히 불링거가 취리히의 지도자가 돼 종교개혁 신앙을 이어가게 됩니다.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존 칼빈에 와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종교개혁 2세대 인물로서, 스위스 제네바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신학적인 개혁을 넘어서서 삶의 변화와 사회개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는 특히 사회복지 사역들을 통해 빈민 구제에 힘썼고, 프랑스 기금을 조성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제네바로 온 피난민들을 도왔으며,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 다음세대를 믿음으로 세우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가 제네바 아카데미에서‘주여, 우리로 주님의 지혜인 천국의 비밀을 공부하게 허락하셔서 우리의 신앙이 진보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고, 우리로 세움을 입게 하소서’라고 했던 그의 기도는 바른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줍니다. 이렇게 칼빈은 신학과 신앙의 개혁을 넘어서서 사회개혁과 삶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꽃을 피우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고스란히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에게 이어졌고, 그의 개혁신학은 1563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619년 도르트 신경, 1646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해 고스란히 남겨졌습니다.

영국에서는 성공회를 국교로 확립하려는 엘리자베스1세 여왕에 반대하며,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모범적 교회로 삼아 개혁하고자 소망했던 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청교도’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국교회의 억압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제임스1세 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를 향해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찰스1세 때,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왕과 귀족들에 대항해 의회파 중심의 프로테스탄트들이 들고 일어나 청교도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결과 의회파 수장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은 청교도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여 개혁 교회들의 통일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소요리 문답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전쟁과 자유

종교개혁의 열망이 전 유럽으로 퍼지면서, 곳곳에서 종교의 자유를 향한 긴 싸움이 시작됩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과의 이 싸움을 ‘30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종교적 명분으로 일어난 이 전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강대국의 이권 분쟁과 민족 대립의 양상으로 흘러버리고 맙니다. 결국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조약’이라는 평화조약 체결로 끝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