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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사도들

복음의 역사는 바울과 사도들로부터 시작합니다.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 집사와죽음을 불사하고 수차례 전도여행을 떠났던 사도 바울, 그리고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도 베드로가 거꾸로 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합니다. 순교라는 단어는 초기 복음 전파 현장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상의 언어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은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속사도

사도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은 그의 제자들이었던 속사도들에게 이어졌습니다. 속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로부터 직접 듣고 배운 복음의 증인들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이그나티오스라고 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지에 대해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한 아이를 세워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아이가 복음 때문에 로마로 압송되어 사자밥으로 던져졌던 순교자 이그나티오스입니다.

그의 친구이자 동역자였던 폴리카르포스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서머나교회 감독이었던 그는, 자신의 믿음을 회유하기 위해 왔던 로마 군대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86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분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폴리카르포스는 화형의 제물이 되고 맙니다. 그가 화형을 당할 때, 원형경기장 안에는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했던 ‘향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 향기를 일컬어 ‘폴리카르포스의 믿음의 향기’, ‘거룩한 순교의 향기’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속사도 시대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외부의 거센 핍박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던져 복음을 지키려 했고, 복음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속사도들의 신앙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을 남긴 변증가 시대 테르툴리아누스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변증가

변증가시대의 교회는 두 가지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핍박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이단들의 공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을 지키려 했던 이들이 바로 변증가 교부들입니다. 이레니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라는 교부가 그 중심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레니우스는 순교자 폴리카르포스의 제자로, 총괄갱신 이론을 세운 사람입니다. 총괄갱신은 에베소서 1장 10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인류를 자기 안에 총괄하심으로, 인류를 회복하여 갱신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이론에 근거해, 이레니우스는 특별한 지식을 가진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이단 ‘영지주의’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했습니다. 이 외에도 변증가 시대의 대표적인 교부로는 삼위일체라는 용어와 구약·신약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철학과 신학을 통해 변증하려 했던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가 있습니다.

니케아 교부

후기 니케아 교부들은 핍박의 시대가 종식된 이후,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고 변증한 이들이 니케아 교부들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리를 신학적으로 공식화하고 명료화하는 것이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 125년 동안 지속된 주관심사였습니다. 특별히 아타나시오스는 반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싸우며, 오랜 세월 유배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변증하고 지켰습니다. 이런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후기 니케아 교부 중 가장 빛나는 인물은 어거스틴이라고도 불리우는 아우구스티누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랜 세월 방탕함에 빠져 살다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로 회심을 합니다. 그 이후, 그는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자 가장 존경받는 교부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 ‘참회록’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함을 주제로 한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또,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주장했던 펠라기우스주의와 당시 재세례를 주장했던 도나투스파에 반대하며 은총론, 구원론, 교회론을 명확히 했습니다. 이후, 그의 신학은 교회 역사의 모범이 됐고, 종교개혁자 루터와 츠빙글리, 칼빈 등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박해 속의 순종 카타콤 공동체

카타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 공동묘지 아래 세워졌습니다. 미치광이라 불리는 네로 황제로부터 디오클레티안 황제까지 약 250년간 지속된 박해로 인해, 사람들은 믿음의 자유를 찾아 카타콤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들은 카타콤에서 예배와 성례, 장례 등 모든 생활을 이어갔고, 도처마다 많은 카타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박해로 인해 변절하는 그리스도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박해에 맞서다 화형이나 사자 굴에 던져지는 등의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박해를 피해 카타콤 공동체로 들어오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두는 당시 로마의 핍박과 압제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해에 맞서 순교를 자처하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카타콤 공동체로 들어온 그리스도인들, 이들이야말로 우리에게 ‘복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산증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와 함께한 기독교 - 초대교회의 정리

핍박과 압제 끝에, 드디어 서서히 신앙의 자유가 찾아옵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로마 제국을 독재하던 막센티우스와의 전투를 앞두고 꿈속에서 ‘키로’라는 상징을 보게 됩니다. 이 상징은 그리스어로 십자가를 뜻하는 크리스투스의 첫 두 글자였습니다. 그는 이 꿈을 믿고 나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313년, 종교의 관용령인 ‘밀라노 칙령’을 반포합니다. 그 이후, 경건한 부모 밑에서 자라 정통 신앙을 가지고 있던 테오도시우스가 황제 자리에 올라데살로니가 칙령을 반포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됩니다. 이때가 바로 380년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핍박과 변증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선으로 바꾸셔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외적인 핍박을 통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워 주셨고, 내적 이단의 공격을 통해 성경 66권의 정경화 작업은 물론이고 정통신학을 더욱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