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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일보 [종교칼럼] 우리 시대의 목사
2019-04-03기사 편집 2019-04-03 08:23:34


지금처럼 목사상이 혼란스러운 때가 없는 것 같다. 목사는 과연 누구인가? 목사(牧師)를 가리켜 "목사는 황제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노숙자의 동료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정의는 "멘탈이 강한 사람" "선한 목자" "변신의 귀재"로 인식된다. 멘탈이 강해야 한다는 의미는 사명자로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변신의 귀재라 불리는 이유는 변질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의 표현이다. 

때로는 세상에 욕먹는 목사도 적지 않지만 주야장천(晝夜長川) 오직 양떼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간과 쓸개를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한길로 달려가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시대에 간 부은 목사(?)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목사는 정신노동자이며 동시에 육체 노동자이다. 끊임없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에 의해 탈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간 부은 목사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게 됐다. 필자가 속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이 정한 목사의 자격은 대학 졸업 후 신학대학원 3년 과정을 졸업하고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는 강도사(講道師) 고시에 합격한 이후 목사고시를 통과해야 비로소 목사의 자격과 신분을 얻게 된다. 

목사의 다른 이름은 양의 무리를 목양하기에 목자(牧者)라 부른다.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의 종 혹은 그리스도의 사역자(使役者)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죄인에게 전파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라 권하는 자이므로 복음의 사신(使臣)이라 한다.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이기에 전도인이라 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을 책망해 각성하게 하는 책임을 감당하기에 교사라 칭한다. 이러한 호칭은 계급을 의미하지 않고 각종 책임을 맡은 것을 나타내 준다. 

목사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 복음을 들어 깨닫고, 신앙을 고백해 하나님의 가족이 될 때이다. 천국의 시민이 늘어가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사의 생존의미이다. 목사의 힘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 곧 소명(召命)에 있다. 또한 목사의 힘은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순종하는 양무리에게 있다. 교우들의 지지를 받지 않는 목자는 존재할 이유가 사라진다. 또한 목사의 능력은 그가 고백하는 주군(主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복음 자체가 목사의 영원한 에너지원이 된다. 목사가 그가 전하는 복음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한다면 무엇으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목사는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자칭 의인이라 하는 죄인들이 있는 한 존재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복음의 메신저로 세워 주셨기에 그 개인의 취향과 기호 그리고 성격의 외내향성의 유무와 상관없이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 때로는 회중들의 환호와 열광이 기분을 좋게 할 수 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메신저의 사명을 묵묵하게 수행해야 한다.

목사는 아침에 비통한 마음으로 교우의 장례식을 집례 한다. 슬픈 감정을 채 떨치기도 전에 낮에는 교우들 가정의 경사스런 잔치를 인도해야 한다. 감정의 높낮이를 지혜롭게 다스리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교회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 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기에 백인백색(百人百色)의 현장이기도 하다. 상대의 마음과 형편을 가슴에 담기 위하여 역지사지(易地思之) 힘쓰다 보면 간혹 줏대 없는 인간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목사 가운데 윤리 문제로 매스컴을 타는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날 때면, 동료 목사들은 깊은 시름에 잠겨 가슴앓이를 한다.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기를 힘쓰지만,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고뇌한다. 목사의 역할모범이었던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목사상(牧師像)을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 목사의 본분(本分)은 복음으로 사람의 영혼을 얻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정호 새로남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