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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PEFLECTION & PROSPECT


복음주의학생운동 반세기 회고와 전망

청년아 일어나라


오정호 목사(대전새로남교회 담임)
대전충청학원복음화협의회 공동대표/국제선교회(O.M) 대전이사장

수원지가 메마르고 있다.
70년대 한국교회 부흥을 견인한 것은 군대와 캠퍼스 그리고 이농현상이었다.
군대복음화는 군의 특수성을 이용한 신앙전력과 정신교육이 밑바탕이 되었다.
지금과 그때의 상황은 매우 다르기에 똑같은 잣대를 갖다 댈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렵고 배고픈 병영생활 가운데서 교회는 병사들의 피난처였으며 전우들의 그리움을 풀수 있는 만남의 현장이었다.
헝그리 정신을 가진 군목들과 군종사병에 의하여 병영 속에 복음의 문화가 착근되었다.
그 이후에 사회로 진출한 젊은이들은 어려울 때 쉴 수 있었고 초코파이를 공급해 주던 따뜻한 이미지를 가슴에 각인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지역교회로 발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이농현상이 도시교회의 수적 부흥의 촉진제가 되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지금은 역이농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도시로 몰려나온 젊은이들은 직장을 찾는 것과 동시에 그들을 품어줄 사랑의 터전이 갈급했다. 당연히 교회는 그들에게 또 다른 어머니의 품 같은 피난처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캠퍼스는 어떠한가? 과거에도 전혀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당시는 캠퍼스에 낭만의 그림자라도 있었다. 지금처럼 직업훈련소, 직장대기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젊은이들은 캠퍼스의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쳐다볼 수도 있었고 선배들에게 빌붙어서 포장마차라도 들어갈 수 있었다. 교수들은 나름대로 진지했으며 직업을 위한 지식의 공급보다는 삶을 향한 가치관을 심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었다. 그 때가 어느때이던가. 군부독재시절의 서슬 시퍼런 때가 아니었던가.

물론 지역교회가 현실 참여에 눈을 돌린 쪽과 전통적인 신앙노선을 따라 개인구원의 더 비중을 둔 경향을 띤 교회로 색깔을 달리했다. 그러나 이런 색깔이든지 저런 색깔이든지 관계없이 젊은이 마음속에 나름대로의 불이라고 부를만한 열정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 전체가 교회 성장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지칭하는대로 정체기를 맞은 이후 젊은이들의 영혼속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마치 재가 남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캠퍼스의 현실은 진리를 사고서 팔지말라는 교훈과는 정 반대로 흐르는 것 같다. 직업을 얻는다면, 빵문제가 해결된다면 진리를 팔아서라도 물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거대한 흐름 앞에 젊은이들이 무릎을 꿇고 있다. 이런 분석 자체가 젊은이들의 흐름을 웬만큼 알고 있는 사역자들에게는 식상하리만큼 흥미없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을 흔들어 깨울 대안은 무엇인가?
내수동교회 대학부와 사랑의교회 대학부를 지도하며 섬겼고 그리고 현재 대전광역시에서 젊은이들의 부흥을 열망하는 담임목회자로서 고민처럼, 하소연처럼, 회한처럼 몇 가지를 마음에 담고 제안하고 싶다. 다른 사역자들에 대한 외침이라기보다는 필자 자신을 향한 고함이라 생각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모든 젊은이 사역자들이 열망하는 대학청년부의 활성화가 가능할까?

담임목사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한 지역교회의 사역의 무한 책임자는 담임목사이다. 그 책임은 권한을 전제로 한다. 어떠한 권한인가? 소위 말하는 설교권과 인사행정권과 재정권이다. 담임목사의 진정한 마음이 있는 곳으로 메시지의 방향은 갈 것이고, 인사는 이루어질 것이며, 재정은 투자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씨 뿌리는 비유에서 동일한 씨를 뿌리지만 밭의 질적인 면에 따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말씀하셨다. 젊은이를 얻기 위한 담임목사의 안목이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펑펑 솟아나는 간구와 열망이 아니고는 어떻게 젊은이그룹의 활성화가 이루어 질 수 있을까?

새로남교회 젊은이 사역은 대학부가 1,2부로 나누어져 있다. 청년부 역시 1,2부로 나누어져 있다. 각 부서마다 전문성을 지향하는 안수받은 목사님들이 진지하게 사역에 임하고 있다. 서울지역 같은 상대적으로 열리고 깨어 있는 곳이라면 이상할 것이 전혀 없겠지만 지방에서 대학부와 청년부를 1,2부식으로 나누어 부서를 조정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담임목회자에 의하여 그 사역의 깊이와 넓이가 결정된다. 환경적인 조건이나 역사의 깊이는 다르겠지만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젊은이에 대한 열망은 환경이나 역사의 장단에 얽매이지 않는다. 필자는 진실로 젊은이들을 얻기를 원한다. 세상 그 어떤 담임목회자보다 복음으로 변화 받은 젊은이들을 보기 원한다. 이러한 젊은이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동일하게 가질 때 무엇에, 어떻게, 누구에게 시간과 재정과 열정을 투자해야 할 것인지 감이 잡힌다. 놀랍게도 이러한 담임목사의 열망을 젊은이들도 눈치 채고 있다는 사실이다. 속에 품고 있는 것은 밖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샤넬 NO.5를 뿌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동일한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후각은 아름다운 향기로 채워지게 마련이지 않겠는가!

청년들과 동고동락하는 사람을 얻으라
연말을 앞두고 있는 지금 각 교회마다 그 교회나 부서에 적합한 목회자를 찾느라 야단이다. 신학교를 졸업한 사역자들이 결코 부족해서가 아니다. 신학한 사람들은 흘러넘친다. 중요한 것은 영혼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써야 한다. 준비된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투자가 있어야 한다. 어떻게 뿌리지 않고 거둘 수 있으며 땀 흘리지 않고 열매 맺을 수 있겠는가. 확신하건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쓸만한 일꾼이 흘러넘치는 때는 결코 없으리라(마 9:37,38). 사람 소중한 줄 알아야 사람에게 투자할 수 있고 사람에게 투자해야 또 다른 사람을 얻을 수 있다. 안목은 하루아침에 열리는 것이 아니다. 험난한 세월이 필요하다. 때로는 광야를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골프장 같은 초원을 지나기도 한다. 영혼을 다루는 영적 지도자는 시간이 만들지 않는다. 하나님의 훈련프로그램에 마음을 열고 자신을 던진 사람을 통하여 만들어 진다. 사람에게 투자한다는 원리는 실제 가치를 부여하여 투자할 때 그 열매를 확실히 맺을 수 있다. 세상의 교육은 무한경쟁이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의 사람 만들기를 위한 교육은 때때로 나사가 빠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흥망성쇠의 중심에는 사람이 원인 제공자이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사람을 불러 쓰는 안목도 귀하지만, 남들이 찾을 만한 사람을 준비시켜 세우는 일은 더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 주님께서 젊은이들의 부흥과 영적성숙을 위하여 찾으시는 사람은 분명 젊은 시절을 동일하게 젊은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기쁨과 고뇌를 체화한 경험이 있는 지도자를 찾고 계신다. 영적인 거품을 빼고 실사구시의 안목으로 알맹이 있는 사역을 위하여 한걸음을 내 딪는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곳에서는 결코 사람의 영혼이 세워지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한사람의 비전 곧 인격과 삶이 우리 주님의 닮은꼴이 되어 자신은 물론 이웃의 영혼에 복음으로, 변화의 능력으로 영향을 끼치라는 사람이 너무도 소중하다(골 1:28-29). 다른 부서도 동일하겠지만 젊은이들의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겉꾸밈의 사역스타일이나 이벤트를 중심한 부서운영을 과감히 척결하고 속 알참의 사역을 묵묵히 이루어 가야 할 것이다.
영적 헝그리정신을 회복하여 동료 사역자들과의 영적인 네트워킹을 통하여 다음세대를 세워 갔으면 좋겠다.
메마른 수원지에 폭포수 같은 은혜가 임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을 세우는 일이다(행 13:22). 사람 세우는 일 외에 어떤 일이 급선무가 되어야 하겠는가.
우리 주님께서 “청년아 일어나라”하셨다면, 우리 시대의 교회 역시 청년들을 불러 일으켜 세워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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