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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

목사로 부르심을 받아 걸어왔던 이날까지 삶을 되돌아보며, 별난 재주도 없는 종에게 주신 은총이 너무나도 과분했음을 마음으로 고백케 된다. 앞으로의 남은 내 삶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몸을 맡겨 영혼을 살리는 목회에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하며, 뒷모습이 아름다운 목회자로 기억되기를 소원한다.


지난 여름 형님인  사랑의교회 담임 오정현 목사가 뉴욕시에 산재한 동포교회의 연합한 할렐루야 집회 인도차 미국을 방문하고 있을때 필자가 사랑의교회 강단에서 메시지를 전할 기회가 있었다. 1부에서 6부로 이어지는 예배는 내 마음속에 감동의 물결을 출렁거리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사랑의교회에서 부교역자로 7년을 사역한 이후 15년만에 주일낮 강단에 서는 일이 아니던가.
한국교회의 위대한 목회자이시며 메신저이신 옥한흠 목사님과 형의 강단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설교 시작전 먼저 교우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여러분께서는 제가 7년 동안 부교역자로서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축복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유학할 수 있도록 학자금을 지원하여 주셨습니다.
조건 없이 사랑을 쏟아 부어주신 옥한흠 원로목사님과 당회를 비롯한 모든 교우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듯 사랑의교회는 저의 삶에 소중한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제자훈련의 동일한 목회철학의 바탕위에서 서로 협력하는 동반자 교회로 섬기고 있습니다. 저희 가정적으로도 여기에서 유아 세례 받은 아이들이 저보다도 훌쩍 컸습니다.
지금 회중석에는 오래전에 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제자훈련하고, 함께 아파트 지역을 심방하던 교우들께서 순장으로서 직분자로서 충성스럽게 섬기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동안 여러분께 때로는 개인적으로 전화도 드리고 싶었고, 안부도 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섬기는 목회지에서 주님과 교우들께 목양일념으로 충성하는 것이 여러분께서 후하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기도에 대한 예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주신 사랑을 남은날 동안 한시라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중하게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성도입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눈 후에 온 교우들과 함께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찬양을 드릴때에 필자의 마음속에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의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은 양볼을 타고 흘러내려 턱 밑으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그래 그렇구나. 연약한 인생을 부르시고 오늘까지 인도하신 주님께 무엇으로 감사할 수 있을까?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근근히 살아야 했던 유년기, 철없이 좌충우돌했던 청소년기를 거쳐 내수동교회 대학부에서 누린 젊은날의 은혜, 우리시대의 위대한 멘토들을 만난 남다른 축복” 입술로는 찬송가 가사를 따라 내려갔지만 속에서는 또 한번의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다.

찬송가 4절 가사 “만복 근원 예수시여 위로하소서. 우리 주와 같으신이 어디 있을까”가 뼈에 사무치듯 온 몸을 덮쳐왔다. 감동의 쓰나미가 내 영혼을 흔들었다. 주님만이 만복의 근원이시다.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그리고 생명을 던져 고백할 수 있는 피조물의 영광스런 고백이다. 별난 재주도 없는 종에게 주신 은총이 너무나도 과분했다. 주님의 은혜가 내 인생에 새벽이슬처럼, 하늘의 만나처럼 내려왔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8-9) 이 고백밖에 무슨 또 다른 고백이 필요하겠는가? 목회의 생명은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과 충성이다. 우리 주와 같으신이 어디 있을까!

Praise the Lord & Raise the People
주님을 예배와 찬양을 통하여 높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을 세우는 것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본질적 사명이다. 예배의 영광을 상실한 성도는 영혼의 중병을 가진 성도이며 사람을 하나님의 진리로 무장시키는데 소홀한 교회는 이미 교회의 정도를 이탈한 것이다. 예배와 사람을 세우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 할 수 없는 교회의 놀라운 특권이다. 성령의 교통하심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삶으로 옮겨지는 예배에 대한 갈구가 주의 백성들 사이에서 높아져 가고 있다.
필자는 새로남교회에 부임한 이후 한 길을 달려왔고 한 우물을 파 왔다. 그것은 제자훈련을 통한 평신도를 깨우는 사역이다. 세상으로부터(from) 주의 자녀들을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감을 분명히 가지도록 하나님의 진리로 무장하여 세상을 향하여 그 속으로(into) 파송하는 사역이다. 다시 한번 더 고백하건대 제자훈련사역 없이는 우리 교회의 목회현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필자는 지금도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every man complete in Christ / everyone perfect in Christ)로 세울 수 있겠는가를(골 1:28, 29)

필자는 제자훈련 사역을 하는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목회자”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있다.

우리 교회 강점과 보완해야 할 점
우리 교회 다양한 구성원들 중에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교우들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대덕테크노밸리와 인접한 까닭에 여러 연구소에 근무하는 연구원 교우들이 많은 편이다. 또한 정부대전청사가 가까이 있기에 공무원들의 비율도 적지 않은 편이다. 카이스트(KAIST)와 충남대학교를 비롯한 캠퍼스 가까이 위치하기에 교수들과 교사들이 적지 않다. 의료계통의 직업을 가진 이들도 많은 편이다. 전문 직종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이들의 공통점은 예의가 반듯하다는 점이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좋은 성품임에 틀림없다.
성실함이 그들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대인관계에서의 무례함을 피하는 것은 교양인이 가져야 할 미덕의 요소이다. 그러나 전문직종 종사자들에게는 함정도 있다. 인간적인 예의와 대인관계를 추구하다 보니 신앙적인 결단과 담대함이 부족하게 느껴질때가 있다. 회중을 획일적으로 끌고 가서는 안되지만 적어도 자신이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면 사도 바울처럼 복음의 빚진자의 심정으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임하여야 하리라.
진정 신앙인이라면 일반 상식인의 기준에 머물지 않고 한단계 뛰어 넘어야 한다. 영혼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삶의 체질로 녹아 내려 교회생활의 수동성을 물리치는 것이다. 소위 식자층에서 보이는 자기안주 혹은 자기만족 신드롬을 구령의 열정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
자신만의 영혼구원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의 영혼을 부등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것은 상식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가능하다. 아무리 제자훈련을 완벽하게 소화시켰다 하더라도 그 열매가 영혼구원과 맞닿아 있지 않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깊이의 목회에 대한 목마름이 온 몸의 세포를 흔들어 깨운다. 깊이의 목회는 사람을 살리는 목회이다. 방법이 아니라 생명이며 겉꾸밈이 아니라 속알참이다. 인간의 지혜로 이끌리는(driven) 사역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 몸을 맡기는 사역이다. 전 세대의 영적인 강점을 계승하면서 우리 시대의 영적인 은사를 품어 내는 것이다.
필자의 목회현장을 공개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며, 목회의 비전을 열어 보이는 것이 심히 부담되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까지 은혜의 손으로 이끄셨기에 내 모습 이대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지면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필자가 동역자들의 목회현장을 인터넷을 통하여 접하듯 새로남교회 목회현장을 열어두고 있다.(saeronam.or.kr)

돌아갈 교회가 있다는 사실
오늘 낮
피렌체 한인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미켈란젤로 광장을 오른 후에
아내가 나를 향하여 말을 건넸다.
“여보, 돌아갈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행복이예요”
“여보, 돌아갈 교회가 있다는 것이 은혜예요”

어찌 아내만의 마음일까
내 마음속에도
새로남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교회가 있다는 것이
돌아갈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서로 기쁨으로 손잡고, 안길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이며, 감사의 제목이어라.

돌아갈 데가 없는 목회자
돌아갈 교회가 없는 교인
돌아갈 데가 없는 나그네
돌아갈 품이 없는 죄인
돌아갈 가족이 없는 가출 청소년
살아있으나,
기쁨과 감사를 상실한 인생 아닌가!

육체의 먹고 마심에 취해
영혼이 둔감해질까 두렵다.
일상의 번잡한 왕래에 점령되어
속사람이 빛을 잃을까 조심스럽다.
어차피 한번은 돌아갈 인생,
어차피 한번은 상황종료를 맞아야 하기에

위의 시는 필자가 순례안식월을 보내는 중 이태리 피렌체를 방문했을때 새로남 교우들을 그리며 마음의 우물에서 퍼 올린 시이다.

금년 1월부터 지금까지 통찰력이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모든 동역자분들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영계가 혼란스러운 때에 마음에 담겨 있는 소원이 있다. 그 소원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목회자로 기억되고 싶다.
어찌하여 이 세상의 수많은 직업(?)가운데서 하필이면 목회자가 되었을까?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이 불가해한 엄숙한 사실 앞에서 두려울 뿐이다. 교우들도 두렵고, 자식들도 두렵고, 주님도 두렵다. 그러기에 남은 목회 여정을 은혜의 힘으로 달려가기를 소망한다. 시각장애인 바디매오는 육신의 빛이 없었지만, 영혼의 빛이 희미해지기 일쑤인 사역자로서 갈망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심의 불쌍히 여기심만이 목회의 생명줄이기에 다시 한번 애통하는 심정으로 가슴을 친다.

“자비하신 보좌앞에 꿇어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하니 믿음 주소서.
주의 공로 의지하여 주께 가오니 상한 맘을 고치시고 구원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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