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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경숙 권사(명예권사 임직)


저는 시골 아주 작은 마을에서 2남 5녀의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 두 분은 항상 행복해 하셨고, 7남매를 향한 사랑도 대단히 크셨으며 항상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는 화목한 집이었습니다. 그 시골 마을에는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저희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지만 저희 7남매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동네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오빠가 고등학생 때 학교 선생님께서 학생 몇 명을 데리고 해수욕장에 갔다가 사고로 몇 명이 죽고 오빠는 살아 돌아오면서 저희 부모님은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셨습니다. 시골의 농사일에 바쁘고 힘드셨을 텐데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기도 시간에 맨 앞줄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다섯 딸들도 배워야 된다고 하시면서 도시로 학교를 보내시고, 우리 집도 생활의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지나치지 않으시고 많이 도와주시며 평생을 사셨습니다.


예수 믿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배우자가 꼭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내던 저는 결혼하면 같이 교회에 다니겠다는 그 말 한마디에 불교 집안의 장손인 남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교회 가는 것은 물론 성경 보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는 나를 부르는 종소리로 들렸습니다. 몇 년을 남편 모르게 울며 기도하고 찬송과 말씀을 보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요일에 출근한 남편이 집에 다시 와서는 교회를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출근한 그날까지도 교회 가는 것을 싫어하던 남편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 직장 상관이 새로 부임했는데 믿음이 좋은 분이셔서 남편을 전도한 것 같았습니다. 남편이 본인은 안 다녀도 아내는 결혼 전에 다녔다고 하니까 차를 보내 주면서 아내를 데리고 교회에 오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날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리더십이 강했던 남편은 직장에서 OCU회장을 맡아 군 선교를 위해 앞장서서 일을 했습니다.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저희 남편은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며 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긴 터널을 지나니 거기엔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일 년에 열두 번씩 제사 음식을 하며 제사를 지내는 시댁이었습니다. 믿지 않은 시댁 어른들과 불교 집안의 장손인 탓에 제사 지내는 것이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감히 제가 제사에 대해 문제를 삼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믿기 시작하면서 제사를 드리는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믿지 않는 시댁 어른들을 생각하여 음식은 그대로 준비하되 저희 부부는 절하는 대신에 추도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보란 듯이 저희 앞에서 향을 피우고 절하시던 시댁 어른들과 가족들이 시간이 지나자 찬송가를 같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온전히 모든 가족이 제사가 아닌 추도예배를 드리기까지 이십여 년이 걸린 것 같습니다.


제가 탄방동 새로남교회에 등록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계시던 목사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고 미국에서 젊고 열정이 넘쳐 보이는 오정호 목사님께서 예쁜 사모님과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저는 제자훈련을 목사님과 함께 성경공부 하는 것으로 알고 제자훈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습니다. 목사님은 훈련생들에게 매일 큐티, 일일 시간계획표 점검, 말씀암송, 독후감 쓰기, 중보기도 등을 통해 잠시도 말씀과 기도를 게을리하지 못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처음에는 감당하기 힘든 훈련 때문에 많이 지치기도 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사랑과 열정을 품고 제자훈련을 감당하시는 오정호 목사님의 모습은 저희들에게 많은 자극과 격려가 되었습니다. 제자훈련을 통해 저는 말씀 중심의 삶이 생활화되었고 저도 모르게 날마다 감사가 넘치고 분에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저를 이 가정에 보내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보내셨다고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시아버님은 경찰생활을 하셨는데 퇴직금 전액으로 영종도에 절을 지어서 대처승으로 30여 년을 지내셨습니다. 아버님은 어머님과 4남매를 두시고 객지에 나가셔서 경찰생활을 하시면서 작은집을 만들어 어머님과 자녀들을 돌보지 않고 평생을 사셨습니다.


4남매의 결혼식 때마다 연락은 했지만 한 번도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당당하시던 아버님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남편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4남매는 모두 반대했지만 남편은 아버님을 대전으로 모셨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숙제를 내주신 것 같았습니다.


첫째, 아버님이 4남매에게 용서의 손을 내밀 수 있게 하는 것과 둘째, 대처승인 아버님을 전도하여 세례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님은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성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고 병원에서도 간병인과 자주 다툼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버님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4남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내가 미안하고 내가 너희들에게 잘못했다고 하시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도 받으시고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가정을 향해 미리 계획하신 하나님의 은혜이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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