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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타임에 더 좋은 나의 친구

 

박춘근 목사 (평택 남부전원교회)

 

이상하고도 특별한 섭리의 결혼

모든 만남과 걸음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지만 우리 부부의 만남은 더더욱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결혼은 목사의 기도 응답이 아니라 아내의 기도로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대학 졸업 후 초등교사 발령을 받고 결혼에 대해 오랫동안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한다. 퇴근하면 교회에서 밤샘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던 어느 날, 마음에 엘리야의 심정을 가지고 주의 길을 평탄케 하며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심정을 가진 이번에 오시는 전도사가 네 남편이다라는 확신적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이 확신이 너무도 분명해서 제대 전이던 나를 만나 보기도 전에 담임목사에게 먼저 말하고 청원을 넣은 상태였고, 제대를 앞둔 나는 아내가 섬기던 교회로 사역 초청을 받는 이상한 일이 이어졌다. 제대 후 그 교회에 부교역자로 가게 되었으니 특별한 섭리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담임목사님의 중매를 통해 아내를 알게 된 당시엔 고신 측 교회에서 자라온 전도사로서 너무 체험적 신비성에 빠져 있는 자매로 보였고, 그 때문에 중매 청혼을 받고도 1년 넘도록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다. 불가불 결혼에 대한 생각을 갖도록 하나님은 몇 달 사이 일곱 여성에게 청혼을 받도록 중매를 이어지게 하셨다. 그것도 한 분 외에는 모두가 초··고등학교 교사들이었다. 이 일은 나로 하여금 깊은 생각과 기도를 하게 하였으며, 또 아내가 기도하며 담임목사님에게 고백했던 내용을 되새김질하게 되었고,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해야 하는 섭리를 알게 해주셨다. 그 결과 우리는 결혼하여 부부가 될 수 있었다.

결혼 36년 차인 지금 생각해 보아도 큰 은혜를 주심이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원 외에 내게 제일 큰 은혜는 아내와의 만남이다. 나는 아들만 일곱인 집안에 여섯째로 태어났다. 환경적 요인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여성을 만나 결혼까지 생각하는 것이 내성적인 나로서는 큰 숙제였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내 성격과 형편에 꼭 맞는 정말 예비된 사람을 보내 주신 것이었다. 당시 70년대 후반기만 해도 강원도는 교역자가 부족하고 목회자 길은 가난함을 의미하기에 믿는 가정에서도 쉽게 딸을 주려 하지 않는 것을 늘 보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하나님 뜻으로 알고 처가에 처음 인사하러 갔을 때, 당시 원주 경찰서장에서 은퇴한 장인이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재력도 하나 없고 신학교도 졸업 못 한 나를 첫눈에 받아주시고 허락해 주심은 기이하고 기이하다.

 

결혼만큼이나 특별한 섭리의 부르심

하나님은 내가 서울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강원도에 돌아와 청년부 설교를 한 번 한 것을 계기로 신학교 문턱도 밟지 않고 먼저 총각 전도사가 되도록 만드셨다. 강원도로 부임하려는 부교역자가 없을 만큼 교역자 수급에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나를 사역으로 부르심 또한 결혼만큼이나 정말 특별한 섭리였다. 그것도 첫 번째 사역에 400명이 넘게 모이는 제법 사이즈가 있는 교회였으니 비록 청년부 파트 전도사라고 하지만 특별한 케이스였다.

일반적으로 목사가 되는 케이스는 소명을 먼저 받고 신학교를 가서 졸업하거나 학기 중에 사역으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일반과는 많이도 다르게 사역이 먼저고 이후 신학으로의 부르심이었다. 이 같은 부르심 때문에 잠시라도 사역에서 벗어나거나 중단 없이 쉬지 않고 걸어온 것 같다.

그것은 군대에 가서도 동일하였다. 훈련소를 제외하고 제대할 때까지 하나님은 내게 설교 사역을 쉬지 않게 인도하셨다. 심지어 보충대에 있을 때도 아직 배치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설교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군종병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군목은 주일 저녁과 수요설교까지 모두 나에게 맡겼고, 독특한 것은 사례비까지 책정해서 당시 병장 봉급이 몇천 원인데 비해 나는 매월 30만 원의 사례비를 지급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군대에서도 유급 전도사로 섬기는 조금 독특한 걸음을 걷게 하셨고, 제대 시에는 그것으로 신학교 학비를 준비해서 나올 수 있게 해주셨다.

 

결혼하고 가정을 배우도록 인내한 아내

교회 부임하고서 1년 만에 체중이 10kg이나 내려가긴 했지만, 나는 교회와 당회로부터 2년간이나 특별 예비비에서 사역비를 두 배로 올려 받는 파격적인 은혜를 입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역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 결혼 후 5년 만에 함께 나누는 큐티 시간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아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남자 세계에서만 자라난 경향도 있지만, 원인은 나의 목회관과 방향이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이것밖에는 보이지 않는 식의 목회 때문에 아내에 대해서 소위 거룩한 요청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새벽기도 빠지기라도 하면 닦달함과 성가대와 교사 봉사, 주일성수라는 이름하에 일회용 기저귀도 없던 때에 빨래도 못 하게 함).

아내는 결혼 후 5년간 한 번도 불평과 불만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은 성격이 급하고 내성적인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귀한 아내를 주셨다는 감동이었다. 심지어 이러한 일도 있었다. 학부 3학년 때 제천 세광교회를 방문하였는데 개척하고 몹시 어려우셨던 목사님이 반갑게 맞아주시며 사모님께 여보, 전도사님 오셨으니 밥을 가져와요하셨다. 눈치를 보니 사모님도 식사를 하지 않으신 듯하였다. 머뭇거리시다가 목사님이 드시던 반상을 가지고 나가시더니 잠시 후 다시 상을 차려오셨는데, 목사님 밥그릇의 밥은 바닥이고 대신 내 밥이 차려져 나왔다. 분명 사모님은 목사님 밥을 덜어서 내오신 것이었다. 나는 그 식사를 가슴으로 받았다. 그리고 앉았던 방석 밑에 학교 등록금을 두고 나왔다. 당시에 백만 원이 넘는 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기차에서 등록금을 분실했다고 말했으나 아내는 불평이 없었다. 그리고 등록금을 차용해 온 아내는 잊히지 않는 말을 했다. “잃어버린 데에도 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겠지요하던 그 아내가 결혼 5년 만에 자기 고백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아내는 내가 하나님과 같은 남편하고 사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다하며 울면서 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데 순간, 나는 그 말을 통해 비로소 아내의 마음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알았다. 주님이 왜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내 하나도 기쁘게 못 하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서는 열심히 한다는 것이 혹 거짓은 아닌가? 하는 울림이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음성으로 내게 다가왔고 목양과 나 자신을 향해서 결혼 5년 차의 궤도를 크게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아내 때문이었다. 목회자 사모와 한 남자의 아내, 또 자녀의 어머니로서의 아내를 생각하게 했다. 또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목사로서의 나란 존재와 한 여자의 남편과 자식의 아비로서의 나란 존재를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날 이후 나의 수첩에 적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직 복음을 위하여!’라는 글귀는 괄호( ) 속에 넣게 되었고, 대신에 하나님과 함께라는 글귀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가정을 위한 새로운 규칙

결혼생활에서 늘 당연시하는 모든 것에 나는 새롭게 규칙을 가지게 되었다. 아내는 기도생활과 성경공부, 그리고 CCC에서 순장을 해왔음에도 직장생활과 자녀 양육, 그리고 가정생활까지 감당하느라 많이 힘들어했고 지쳐 있었다. 나는 목사이기 전에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준비가 안 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결혼생활에서 그러한 것은 아내가 해야 하는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을 위하여 받아야 하는 고생으로 여기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기도 중 아내에게 먼저 약속하고 다음과 같이 바꾸어갔다. 개인 큐티 중에 먼저 가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남녀를 만드신 하나님의 순서를 마음으로, 그리고 은혜 속에서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을 가져왔다. 남녀는 몸의 차이만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가 있겠다고 생각하고 아내와 관계를 재정립하기로 했다.

다음으로는 내 주변의 가정 모습이 연구의 대상이 되어 갔고, 가정은 목회에 있어서 너무나도 소중해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없어도 나보다 더 유능하게 타 목사님이 잘하실 수 있는 일은 중요성에서 제외하고, 내가 아니면 더 잘할 것 같지 않은 일에 소중성과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다.


가계도가 그래서인지 하나님께 딸을 원했지만 아들만 둘을 허락하셨기에 그에 따라서 새롭게 로드맵을 만들었다. 하나님 외에 우리 집에서 제1번은 언제나 엄마다(물론 아내는 아빠).

둘째, 한 번 밥을 차려 주는 것은 엄마가 하더라도 더 먹으려면 반드시 자신이 가져와야 하고 자신이 먹은 그릇은 설거지 장소까지 가져다 놓는다.

셋째, 물은 자기가 가져다 마시고 배려 차원에서 다른 사람의 물도 가져다준다.

넷째, 자기의 방은 자기가 청소한다.

다섯째, 저녁 시간의 설거지는 남자들 셋이 돌아가며 한다.

그 외에 아이들이 가져야 할 규칙을 정하였고, 나는 결혼 전 약속대로 아내에게 반말하지 않는 규칙에다 추가된 규정, 내가 먼저 나갈 때는 아내가 허깅하고 사랑해요를 반드시 고백하기로 하고, 아내가 먼저 나갈 때는 남편이 허깅하고 고백해 주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제 우리 가정은 아들 둘이 다 결혼해서 새 가정을 꾸리고 날개를 달고 나갔다. 하지만 지금도 아내와 함께한 약속을 36년간 지키고 있고, 또 지키려고 노력을 한다.

 

목양에 채움이 된 아내와 행복한 목사

개척한 교회에서 설문지를 낸 적이 있다. “하나님이 다시 결혼할 기회를 준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하겠는가?”였다. 당시 기억으로는 80여 가정 중에 두 가정만이 남녀 모두 물음에 예스를 했다. 이 두 가정 속에 목사와 사모가 있었다. 이처럼 우리 부부는 하나가 되어 갔다.

평택에서 교회개척 시 아내와 의논을 했다. 우리에게 주신 바 물질을 한번 다 드리고 시작하자고 아내는 허락했다. 실상 그 돈의 대다수는 아내의 교직 퇴직금이었다. 30여 년 전 당시 아파트 두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으니 작은 액수는 분명히 아닌데, 아내는 목사의 목양에 흔쾌히 따라 주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목사인 나는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지도 못했고, 어느 날 큰아이의 선교원(지금의 유치원)에도 못 보내는 아빠가 아빠야?” 하는 물음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 천만 원만 남기고 드릴 걸 하며 후회스럽게 혼잣말을 할 때도 아내는 침묵으로 웃기만 하였다. 하나님께 드린 것을 아까워하는 목사를 보며 그건 아니지요?” 하던 아내의 말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신 것이다.

교회라고는 텐트 치고 생 개척을 해서 밑바닥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밥을 굶길 때도 있어 목사인 나는 또 무너졌다. 기성교회에서 청빙이 왔는데 너무 힘드니까 옮기자고 했다. 그런데 아직 유년기였던 아이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개척한 교회에서 평생 섬기다 끝내고 싶다고 했으니까 굶어도 여기서 살아요한다. 분명히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둔 아내의 목소리임을 나는 안다. 만약에 그때 아내가 가자고 했으면 나는 떠났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보이지 않는 데서 목회의 절반은 아내가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게 채움으로 하나님이 아내를 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많이도 주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목회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약함을 아시기에 예비하셨고 걸음이 되게 하셨다. 현재의 남부전원교회로 옮겨오게 될 때도 청함에 3개월 동안 답을 못 주고도 1달이나 더 지체하고 옮기게 되었다. 사이즈가 크니 옮기는 것이 아니냐? 하는 아내의 말에 하나님의 뜻을 더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둘도 없는 최고의 친구

이제 사모는 아내이기 전에 나에게는 둘도 없는 최고의 친구다. 나는 아내와 있을 때가 가장 평안하고 즐겁다. 개척한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있을 때도,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반강제적으로 남부전원교회로 와서 14년째 교회를 섬기고 있는 지금도. 지난날을 회상하면 하나님께 감사만이 남는다. 돌아보니 아내가 결혼 전 기도 속에 받았다던 엘리야의 심정은 못되어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며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감사요, 행복이다. 그것은 나의 반려자로부터 시작되었다.

몇 해 전에 첫째 아들이 아버지, 우리 결혼하려 합니다하며 며느리 될 여자를 데리고 왔다. 부모의 조언을 구하는 아들 앞에서 나와 아내는 똑같은 말이 나왔다. “네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인이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 좋다.” 그 아들과 며느리가 찾아와서 아버지 목사의 축복 속에 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르겠다고 했다. 부모가 주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기꺼이 응해 주었고, 아들 내외는 최고의 결혼식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둘째도 결혼을 했다.

이제는 아내와 나 둘이다. 어느 날이었다.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우리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목사인 나도 말했다. “그러게. 이렇게 행복한 것이 하나님께 너무 미안한 것은 아닐까?” 이제는 은퇴를 내다보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지만, 하프타임에 더 좋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 내 아내가 있어 즐겁다.

 

/박춘근 목사

평택 남부전원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아내 최영순 사모와 2남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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