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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랑받고 싶어요 - 오대희

2011.04.27 20:51

조회 수:1897



나도 사랑받고 싶어요

레아의 마지막을 더욱 더 존귀케 하셨던 하나님


[성경속의 여성 - 레아]
                                  
오대희 목사(칼럼니스트)

동생이 태어났어요
모든 것이 좋았다. 부모님도 좋았고, 가정형편도 좋았다. 많은 사람들은 레아를 사랑했으며, 그는 부모님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걸음마를 하면서 집 밖에 나갈 때에도 사람들은 레아에게 덕담을 한마디씩 건넸다. 씩씩한 어린 아기의 모습이 보기 좋아 부모님은 ‘들소’의 뜻이 담긴 ‘레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모든 것이 좋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엄마가 동생을 가졌다. 동생이 엄마 뱃속에서 자라는 동안 엄마 배에 귀를 기울여 보며 동생을 기다렸다. ‘나 닮은 공주님일까? 아니면 잘 생긴 왕자님일까?’ 가족들도 기대했고, 레아도 동생이 기다려졌다. 동생이 태어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동생은 누가 보아도 눈에 띌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부모님은 동생의 모습을 보고 ‘아름다운 암양’이라는 뜻의 ‘라헬’이라고 불렀다. 목축하는 그의 가정에서 어린 암양은 최고의 찬사였다. 라헬은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집 밖을 나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동생을 바라보며 웃던 이웃들의 눈이 잠시 레아에게로 향했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지만, 침묵 속에 담긴 의미는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다. 심지어는 “동생은 예쁜데 너는 왜 그러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생은 나에게 더 이상 동생이 아니었다. 나의 자존감을 낮게 하며, 늘 나를 비참하게 하는 존재로 내 인생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내게는 너무 먼 당신
레아의 가정에 먼 곳으로부터 친척이 왔다. 야곱이었다. 야곱이 자기 집에 온 첫날부터 레아의 마음은 온통 야곱에게 가 있었다. 그러나 야곱의 눈빛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생 라헬에게 가 있었다. 야곱의 눈에 레아는 보이지 않았고 오직 라헬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여전히 동생은 사랑을 받고 있었고, 레아는 이것이 운명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그저 지켜보기만 했었다. 야곱이 아버지와 계약을 했다. 7년간을 일하면 그 대가로 라헬과 결혼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야곱은 7년간 열심히 일했고, 간간이 라헬과의 만남도 행복해 보였다. 레아는 늘 지켜보기만 했다.

드디어 결혼식 날이 되었다. 레아를 늘 안타깝게 여기시던 아버지께서 오셨다. 그리고 신혼 방에 동생을 대신해서 들어가게 하셨다. 이것이 레아를 시집보낼 수 있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고 부모님은 생각하셨던 것 같다. 행여나 이 기회가 평생 마음으로만 연모하던 야곱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기대로 꿈같은 신부로서의 첫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 다음 날 아침, 신부가 바뀐 것을 안 야곱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동생 라헬뿐이었기 때문에, 7년간의 봉사와 수고에 대한 허무함과 속은 것에 대한 섭섭함이 분노로 폭발했다. 결국, 야곱은 동생을 다시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고, 레아는 여전히 이전과 같이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를 사랑했지만 그는 한 번도 레아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고 레아는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며 그렇게 살아야 했다. 남편 야곱은 레아에게 너무 먼 당신이었다.  

그러나 레아에게는 ‘하나님!’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은 레아의 위로자이셨고 보호자이셨으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레아를 차별 없이 대하시고 사랑하는 분이셨다. 하나님의 위로가 없었다면 레아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아에게는 태의 문을 열어 주셨고, 라헬에게는 자녀를 주지 않으셨다. 남편 만나기가 참 힘들었던 레아와는 달리 동생은 남편과 함께 더 길고 많은 시간을 함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태를 여셨고 라헬의 태는 닫으신 것이다. 레아에게 자녀는 그녀가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자녀를 얻기 위한 레아와 라헬의 경쟁은 첩까지 동원하게 되었고, 야곱의 가정은 12명의 아들을 거느리는 대 족장의 가족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로서 레아의 상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얍복강을 건널 때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아주버니가 가족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남편이 밤새 기도하며 고민하고 돌아와서 내린 결론은 레아에게 상처 그 자체였다. 네 무리로 나누어 앞으로 가는데, 여종들의 자식을 제일 앞에 세우고 그 다음 레아의 가족을 세웠다. 야곱은 동생의 가족과 함께 마지막에 남았다. 앞을 치면 남편은 동생의 가족과 함께 도망가는 것이 남편의 계획이었다. 얍복강을 건너 브니엘에서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러 가는 그 길은 레아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남편에게 버림이 된 것에 대한 섭섭함이 더 큰 시간이었다. 죽음의 공포가 가족들에게 다가오는 그 순간에도 남편은 동생과 함께 있었다.

내 아내 곁으로
세월이 흘렀다. 레아의 인생은 그렇게 흘렀다. 흐르는 시간은 야곱을 다듬어 갔다. 하나님은 남편 야곱의 인생에 관여하셨고, 남편은 인생의 험한 순간을 연속적으로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있었다. 야곱은 오랜 시련의 시간을 지나왔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애굽의 바로 앞에 선 야곱의 고백이었다. 조상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나그네 인생은 험악한 세월 그 자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그의 노년을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 험악한 세월을 보낸 야곱의 수고를 멈추게 하시고 주님의 품으로 부르시기로 작정하셨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에게 유언을 했다. 아들들을 모두 축복하고 난 후 야곱은 자신의 장례에 대해 유언했다. “나는 조상이 있던 곳으로 가련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준비해 둔 막벨라 굴에 나를 묻어다오. 내 할아버지, 할머니도 거기 계시고, 아버지 어머니도 거기 계신다. 그리고 나도 내 아내 레아를 거기에 장사하였단다. 그곳에 나를 장사하여다오”
마지막 야곱의 부탁은 조상들의 곁으로 가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 레아 곁으로 가고 싶은 것이었다. 인생여정을 마치는 야곱은 한 평생 사랑받기를 소원했던 레아의 곁으로 가기를 원했다. 조금만 더 일찍 레아를 그렇게 존귀하게 여겨 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레아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님께서 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레아의 후손을 통해 나게 하셨다. 한 평생 주변인 같았던 야곱의 아내 레아의 계보를 통해 메시아가 오신 것이다.

여전히 사랑받고 싶은 마음의 감정들
레아의 삶은 돌아보면 마치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요, 우리 할머니들의 삶과 같았다. 여필종부(女必從夫)라고 남편 한 사람 바라보며 살아온 긴 세월이었지만, 마음에 남은 것은 섭섭함 그 자체였다.
한 남편의 아내이기 전에, 한 여성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특히, 내가 믿고 따르는 남편으로부터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리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과 늘 존중히 여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역이 바쁘다는 이유로 교회의 성도들을 돌보는 일이 앞서다보니, 목회자의 아내에게 남편의 사랑은 사치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랑받고 싶은 이 감정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사모들의 남편이 야곱 같지 않기를 소망한다. 너무 늦게 아내의 소중함을 깨닫지 않기를 소망한다. 아내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방법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 사랑이 교회 사랑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 자체가 바뀌기를 소망한다. 언제나 부족한 인생이었지만 레아의 마지막을 더욱 더 존귀케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보다 더 일찍, 그리고 한결같이 우리 사모들의 삶에 함께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