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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머 부인(Mrs. Phoebe Palmer) - 박명수

2011.04.27 20:46

조회 수:1954 추천:3



Mrs. Phoebe Palmer

역사속의 여성 사역자 팔머 부인을 만나보자



[역사속의 여성]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잊혀진 여성의 이야기
지금까지 역사는 남성을 중심으로 씌어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사(history)를 남자(his)의 이야기(story)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의 역사는 반절의 역사에 불과하다. 역사가 완성되려면 남자의 이야기에 여자의 이야기가 합해져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역사가들은 여자(her)의 이야기(story)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지도교수는 여자 분이었다. 이 분은 항상 자기 과목 가운데 여성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강의했다. 필자도 그 영향을 받아서 필자의 책 가운데 여성에 관한 장을 넣으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여성들의 이야기는 남성들의 이야기에 묻혀서 사라진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이 감추어진 여성의 이야기를 발굴해서 세상에 드러내게 된다면 이것은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빛을 가져다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강조하면 진보주의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런 오해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여성운동이 거의 진보주의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서 억압되어 왔고, 이제는 그 억압에서 해방되어 남녀평등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성운동을 진보주의자들의 영역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많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여성사역을 강조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 복음주의자들은 남녀평등이라는 관점에서 여성의 권리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여성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사역의 관점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복음주의적인 여성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최근 많은 복음주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빛을 보게 된 여성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팔머부인(Mrs. Phoebe Palmer)이다. 이 여인은 18세기의 대각성운동을 20세기 성령운동으로 연결시킨 인물로서 19세기 미국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이다. 미국 교회사가이며 저명한 복음주의학자인 마크 놀은 19세기 미국 교회에 있어서 찰스 피니와 함께 미국의 부흥운동을 이끌어 갔던 인물이 바로 팔머부인이라고 평가하며, 최근의 영성신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19세기 미국기독교에서 팔머부인보다 더 깊은 영향력을 끼친 여자는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팔머부인의 은혜체험
푀비 팔머는 어떤 사람인가? 푀비는 1807년 12월 18일 경건한 감리교 가정에서 태어나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감리교 속장이었으며, 매일 두 번씩 가정예배를 드렸다. 푀비의 가정은 부유했다. 아버지는 유능한 사업가였으며, 그의 집에는 교계와 정계의 유명한 인사들이 자주 방문했다. 이런 푀비는 1827년 9월 뉴욕의 의과대학을 졸업한 젊은 의사 월터 팔머와 결혼을 했다. 월터 역시 경건한 감리교신자였으며 한때 목회를 고려하기도 했지만 병든 자를 치료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사가 되어서도 계속 주일학교의 교사 일을 했다.
팔머부인의 신혼생활은 행복했다. 하지만, 곧 이어서 불행이 닥치기 시작하였다. 결혼 후 그녀는 아들 알렉산더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매우 약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이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다음 해 팔머부인은 다시금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첫째를 잃었기 때문에 팔머부인은 이 아들에게 정성을 다 쏟았다. 모든 외부활동을 단절하고 오직 아이만을 보살폈다. 그러나 이 아이도 7개월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런 사건을 통하여 푀비 팔머는 자신이 하나님보다도 아이들을 더욱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팔머부인은 1833년 건강한 딸 사라를 낳았다. 그리고 이어서 1835년에 둘째 딸 엘리사를 낳았다. 둘째 딸은 건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산모도 매우 위태로웠다. 팔머부인은 사경을 헤매었다. 그는 내세에 대해서 두렵지는 않았지만 ‘겨우 심판의 불을 면하는 구원’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좀 더 생명을 연장해 주셔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팔머부인의 생명을 연장해 주셨고, 그녀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신앙시를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깐, 팔머부인을 큰 시련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사건이 벌어졌다. 어느 여름날 친구의 방문으로 어린 엘리사를 유모의 손에 맡겨두고 외출을 하였다. 잠시 후 램프의 기름이 떨어졌고, 유모는 심지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 기름을 부었다. 램프는 곧 불붙었고, 유모는 당황한 나머지 램프를 아기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불은 온 방으로 급작스럽게 번졌고, 아기는 불에 타서 결국은 죽고 말았다. 갑자기 아기를 잃은 팔머부인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하나님께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질문했다.

이때 그에게 주어진 말씀은 로마서 11장 33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였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그는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느끼게 되었고, 자신이 겪는 시련의 크기에 비례해서 그 결과도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자기의 딸을 돌보실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이제 자신의 임무는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영혼을 구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팔머부인은 이 사건을 세상적인 젖을 떼는 것에 비유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그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어졌다. 엘리사의 죽음을 통하여 그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주님의 일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생겨났다. 푀비 팔머는 엘리사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살리는 구령의 열정이 생겼다고 간증한다.

화요성결집회와 팔머부인
팔머부인에게는 사라라는 언니가 있었다. 사라의 남편은 건축가였는데 푀비 팔머는 사라의 집으로 이사해서 함께 살았다. 사라 역시 팔머부인처럼 경건하게 자랐다. 사라는 일찍이 13살 때 회심했다. 사라 역시 진지한 신앙의 과정을 통하여 성령충만을 체험하였다. 그 후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이곳저곳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는 것보다는 자기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1836년 2월, 첫 번째 화요성결모임을 갖게 되었다. 팔머부인은 언니가 시작하는 화요성결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화요성결모임은 19세기 성결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언니 사라가 시작했지만, 이것을 발전시킨 사람은 바로 팔머부인이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팔머부인은 부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팔머부부는 자신의 부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뉴욕 자신의 집에 많은 객실을 마련하고 미국 전역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화요성결모임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뉴욕을 방문하는 수많은 신자들은 팔머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고, 특별히 감리교지도자들 가운데 그녀의 손님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팔머부인이 인도하는 화요성결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많은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들은 돌아가서 이 집회에서 경험한 은혜를 나누었으며, 팔머부인의 화요성결집회는 이런 형태로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것이 발전하여 오늘날 20세기 오순절운동이 나오게 되었다.

팔머부인의 화요집회는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말씀중심의 신앙운동이라는 것이다. 팔머부인은 대부분의 성령파들과는 달리 말씀에 근거해서 신앙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의지하지 말고, 객관적인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비록 개인적으로 특별한 체험이 없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그렇게 말하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실제로 그와 같은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둘째, ‘제단신학’이라는 독특한 은혜 체험의 방식을 갖고 있었다. 팔머부인은 신학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었고, 이것을 통하여 자신이 어떻게 해야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가를 알았다. 그것이 바로 제단신학이다. 구약성서에 보면 제사장이 제단에 제물을 죽여서 올려놓으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을 보내어 제단의 제물을 태우신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단에 올려놓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불을 보내사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주의 제단에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올려놓는 것이다.
셋째, 간증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누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면 우리는 당연히 주신 분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은혜에 대해서 간증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간증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팔머부인은 간증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그녀는 신자들이 간증을 통해서 그들이 체험한 은혜를 더욱 확고히 하는 것을 보았다.

팔머부인의 사역과 여성운동
팔머부인의 성령운동은 여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같이 창조하신 이유는 남자와 여자가 다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방식이 남자와 여자가 다를 수가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팔머부인의 사역방법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어머니로서의 독특한 체험에서 유래한 사역이었다. 팔머부인은 자식을 잃은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그녀는 이런 과정에서 먼저 자식을 잃는 가운데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경험을 하였고, 그다음으로 자식을 하나님께 맡기고 이제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맡는다는 새로운 사명을 인식했다. 팔머부인의 여성사역은 여성만이 갖고 있는 영적인 체험에 근거한 것이다.
둘째, 가정에서 시작된 사역이었다. 19세기 미국에서 직장과 교회가 남성의 영역이었다면 가정은 여성의 영역이다. 가정에서 신앙을 고양시키는 것도 여성의 역할이다. 팔머부인의 화요집회가 성공적으로 전개되자 사람들은 이 집회를 교회에서 가지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팔머부인은 반대하였다. 만일 교회에서 집회가 열리면 그것은 전통적인 예배로 회귀할 것이고, 여성의 지도력은 상실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셋째, 교파를 뛰어넘어 전개된 사역이었다. 원래 팔머부인은 감리교인이었다. 그리고 평생 감리교인으로 머물렀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감리교를 뛰어넘어 초교파적으로 전개되었다. 신학자도, 성직자도 아닌 팔머부인은 성서의 진리를 평범하게 전했고, 이런 그의 메시지는 교파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또한 팔머의 집은 어떤 특정교파의 예배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평신도운동이 초교파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넷째, 화요집회는 여성들에게 적합한 구조로 변형되었다. 기존교회의 예배가 성직자 중심, 설교중심이라면 화요집회에서는 성직자의 특권이 인정되지 않았고, 누구나 겸손히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참석해야 했다. 여기에서는 찬송, 기도, 간증이 주된 내용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설교할 수 없었지만 찬양, 기도, 그리고 간증에는 차별이 없었다. 화요집회는 설교를 듣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는 데 초점이 있었다.

팔머부인의 영향력
처음에 화요성결집회로부터 출발한 팔머의 사역은 점점 확대되었다. 그가 이렇게 사역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남편의 도움 때문이었다. 의사인 남편은 일 년의 반은 병원 문을 닫고 아내를 도와 사역을 했으며, 재력가였던 팔머부부는 결코 사례를 받지 않았다. 이런 남편의 협조와 함께 그녀는 사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 중 몇 가지만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순회부흥이다. 팔머는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 많은 곳으로부터 간증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머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유럽에도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결국에는 대서양을 넘나드는 국제적인 사역자가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1886년에 팔머의 화요집회와 같은 집회가 전 세계적으로 238개가 매주 열리고 있었다고 한다.
둘째, 출판사업이다. 팔머부인의 사역이 증진함에 따라서 그는 출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성결에의 안내」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대중적인 경건잡지를 만들어 냈다. 1870년대에 이 잡지는 37,000부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은 당시로써는 매우 획기적이었다. 팔머부인은 이 잡지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증거하였다. 이것은 19세기 미국의 영적 부흥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셋째, 봉사활동이다. 팔머부부는 원래 상류계층의 인사들이었지만 그들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뉴욕에 살던 이들 부부는 도시빈민의 비참함을 보았다. 그래서 팔머부인은 뉴욕 맨해튼의 가장 비참한 지역에 이들을 위한 도시빈민선교단체인 ‘파이브 포인트 선교회(Five Points Mission)’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미국 최초의 빈민선교단체 가운데 하나였다. 이 단체를 통해서 팔머부부는 빈민급식, 이민보호, 고아양육, 무료숙박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사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로 교적을 옮기기도 하였다.
넷째, 선교활동이다. 팔머부부는 선교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남편 팔머는 중국선교에 대해 깊은 영적부담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미국에서 하고 있는 사역은 그들로 하여금 선교지로 갈 수 없게 만들었기에 그들은 대신 선교사를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미국 감리교가 최초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도록 헌금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파송된 선교사 가운데 하나가 ‘로버트 S. 매클레이’였다. 그는 후에 감리교의 일본선교책임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한국에 와서 고종으로부터 최초로 교육과 의료를 위한 선교사 파송의 윤허를 받게 되었다. 이것으로부터 한국선교는 시작되었다. 결국 한국교회도 팔머부부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지도자양성이다. 대부분의 부흥사가 대중들에 대한 영향력이 큰데 비해서 지도자들에 대한 영향력은 약했다. 하지만 팔머부인의 주변에는 항상 지도자들이 있었다. 실제로 팔머의 성령운동은 당시 미국의 지성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중 회중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인 ‘토마스 업함’을 비롯하여 미시간대학교 총장, 보스턴대학교, 드류대학교, 시러큐스대학교, 웨슬리안대학교 총장들이 팔머부인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미국 감리교 감독들 가운데 상당수 역시 팔머부인의 영적 제자들이었다.           
여섯째, 여성사역의 기초를 만들었다. 19세기 미국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가정에 제한되어야 했다. 하지만 팔머부인의 이같은 사역들은 많은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이들은 팔머가 걸어간 길을 따라서 위대한 여성사역자들이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구세군의 공동창시자인 ‘캐서린 부쓰’이다. 캐서린은 팔머부인이 영국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에 큰 은혜를 받고 자신도 팔머부인과 같이 사역을 하기 원했다. 남편, 윌리엄 부쓰와 같이 구세군을 창시한 캐서린은 구세군에서 남녀가 같이 사역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
        
여성사역과 한국교회의 미래
한국교회는 1907년 성령운동을 통해서 기초가 잡혔다. 그리고 80년대부터 제자훈련을 통해서 성숙하였다. 이제 이 기초 위에 여성들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70%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일어나 각각 자신의 은사대로 하나님을 섬기기만 하면 한국교회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팔머부인에게서 배울 것이 많이 있다. 우선 그녀는 여성이지만 여성의 세계를 넘어서서 사역을 확장시켰고, 부자이지만 상류층에 머물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봉사했고, 평신도이지만 남다른 통찰력으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이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다. 한국교회에도 팔머부인과 같은 여성사역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